Chap.1 - 통증을 다시 이해하다 # Prologue
* 기존 글을 브런치북에 수록합니다.
아픔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통증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 있던 감정과 삶의 결을, 조심스레 꺼내어 본다.
통증은 단지 고통이 아니라, 회복을 향한 언어일지도 모른다.
통증이란 무엇일까.
왜 우리는 아프고, 그 아픔은 우리 삶에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문득 찾아온다.
진료실에 앉아 누군가의 고통을 마주할 때,
혹은 말없이 견디는 한 사람의 일상 속에서.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통증’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품고 있는지를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다고 여겼던 이 단어의 가장 가까운 정의부터 조심스럽게 꺼내본다.
국제통증학회는 통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통증은 실제적이거나 잠재적인 조직 손상과 관련된, 또는 그러한 손상과 유사하게 설명되는 불쾌한 감각 및 정서적 경험이다.” (IASP Terminology, 2020)
이 정의는 단순히 몸이 아픈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감각’과 ‘정서’라는 말이 함께 담겨 있다는 것은 통증이 단지 신체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통증은 언제나 주관적이고, 그 사람의 삶과 기억, 감정과 해석 위에서 만들어지는 경험이다.
그래서 같은 병명이어도,
어떤 이에게는 견딜 만한 통증이
다른 이에게는 삶 전체를 무너뜨리는 무게로 다가오기도 한다.
의사로서 나는 통증의 원인을 찾기 위해 많은 검사를 한다.
이학적 진찰을 하고, 필요하다면 MRI나 CT를 찍고, 때로는 피검사까지 진행한다.
환자 역시 알고 싶어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왜 이런 통증이 생겼을까요?”
"낫기는 할까요?"
그 질문은 단순히 원인을 알고 싶어서라기보다,
나에게 일어난 이 고통에 이름을 붙이고 싶은 절박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번 원인을 찾아도 낫지 않는 통증을 마주할 때, 나 역시 질문하게 된다.
혹시 우리가 ‘눈에 보이는 원인과 결과’라는 프레임 안에서만 통증을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삶은 그렇게 단순한 방정식으로 풀리지 않는다.
통증 역시 마찬가지다.
통증은 때로 말이 되지 못한 감정이 몸으로 흘러나온 결과이기도 하다.
삶의 결이 그대로 신체에 남는다.
눌러 담은 분노, 외면한 상실, 감당하지 못한 관계의 무게가
근육을 조이고 신경을 긴장시킨다.
그 고요한 긴장은 시간이 지나며 불편한 감각으로 자리 잡고,
결국 통증이 된다.
“나 그 사람하고 이별하고 나서 마음이 너무 아파.”
“엄마를 떠나보내고 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
이런 말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누군가를 잃고, 누군가와 멀어지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사람들은 ‘아프다’는 말을 꺼낸다.
수많은 감정 표현 가운데 왜 하필 ‘아픔’일까.
왜 우리는 감정을 말하면서, 몸의 언어를 빌려 말하는가.
분명한 건, 이 또한 통증이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만져지지 않아도,
그 고통은 누구에게나 ‘아프다’는 말로밖에는 표현되지 않는 감각으로 다가온다.
‘마음이 아프다’는 말은 단지 감상적인 표현이 아니다.
이별이나 죽음을 겪을 때, 사람들은 ‘가슴이 아프다’고 말한다.
실제로 정서적 고통은 뇌에서 신체 통증과 같은 부위를 자극한다는 연구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의학적 설명이 아니다.
‘아프다’는 말은 우리 안에 쌓인 감정이
스스로 통로를 찾아 나오는 방식이다.
그 표현은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외침이고,
누군가에게는 유일한 자기 언어이다.
그리고 그 통증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검사 결과가 아니라, 삶의 맥락을 깊이 들여다보는 일이다.
말로 다 전해지지 않는 아픔이 있고,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고통이 있다.
통증은 그렇게, 삶의 행간을 따라 흘러온다.
환자가 만성적인 통증을 앓고 있다면, 병의 원인을 묻기 전에 나는 묻고 싶어진다.
“당신의 한 주는 어땠나요?”
단순한 문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 전체를 마주하려는 질문이다.
통증은 삶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지금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가.
나를 얼마나 돌보며, 얼마나 외면하며 살아왔는가.
몸의 통증은 단지 자세 때문만은 아닐지 모른다.
실제로 디스크를 찢는 그 자세는
그저 나쁜 습관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토록 고단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 몸에 좋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던 이유는
그 일 속에 내가 감당해 온 책임과 사랑과 생존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해받고 싶었던 걸까.
그토록 무리한 걸음을 내딛으면서도,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 삶 앞에서,
어쩌면 단 한 사람쯤은
그 무리의 이유를 물어봐주길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닐까.
걷지 못한 날보다, 걷고 싶지 않았던 날들이 더 많지는 않았을까.
지켜야 할 건 자세보다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방치한 채 지나쳐온 날들은 없었는지.
그 모든 것이 몸을 통해 말을 걸어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통증은 그 자체로도 괴롭지만,
무엇보다도 통증 속에서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감정의 무게를 감내하며 살아간다.
몸에 남은 쑤심,
하루 종일 맴도는 묵직한 느낌,
잠들기 직전 찾아오는 날카로운 통증은
그저 물리적인 증상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통증이 우리 삶에서 부정적인 의미로만 남게 된다면,
그 고통은 파국적인 상상과 연결되고,
“안 그래도 힘든” 우리의 하루는 더욱 지치고 비참해질지도 모른다.
이제는 통증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때다.
통증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관계를 돌아보고,
내 마음과 몸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통증은 나를 변화시키는 첫 신호일지 모른다.
그리고 때로는, 누군가와 다시 이어지는 징검다리가 된다.
단절되었던 감정이 회복되고,
혼자였던 삶에 다시 사람이 들어온다.
통증을 통해 우리는 다시 연결된다.
회복이란 무엇일까.
완전히 나아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조금씩 살아갈 수 있는 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극적인 변화가 아니라,
고착된 삶이라는 메마른 땅 위에
천천히 스며드는 물 한 모금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여정을 글로 함께 건너가고 싶다
“The wound is the place where the light enters you.”
상처는 빛이 스며드는 자리이자, 회복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 Ru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