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통증을 다시 읽는 시간 # 16
진료실에서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매일같이 비슷한 질문들을 듣는다.
“원장님, 제 친구는 여기서 주사 한 번 맞고 싹 다 나았다는데,
저는 어째 세 번을 맞았는데도 깨끗하게 낫질 않는 걸까요?”
“환자분마다 몸의 상태가 다르고,
하는 일과 자세도 달라서 경과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요, 저나 그 친구나 뭐가 그리 다르겠어요.
잘 모르겠고, 그 친구가 받은 대로 주사해 주세요”
또 다른 환자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선생님, 이번에 MRI에서 천추 디스크가 있다고 하는데요.
제 직장 동료도 똑같이 천추 디스크라는데, 그 사람은 허리만 아프다 합니다.
왜 저는 종아리까지 저리고 아픈 걸까요?"
"허리 협착이 오래되고 심해지면, 신경이 눌려 좌골신경통 양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같은 천추 디스크라도 모든 증상이 같을 수는 없어요.
환자분의 경우는 조금 더 심한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환자의 얼굴에는 고개 끄덕임보다는
“뭔가 납득되지 않는다”는 그림자가 남는다.
마치 나의 설명이
그들의 서운함이나 억울함을 덜어주기에는
어딘가 모자란 듯 보인다.
가끔 진료실 문이 닫히고 나면
내 마음에 씁쓸한 여운이 남는다.
환자들은 ‘왜 내가 다르냐’는 이유를 듣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나의 고통이 다르다’는 사실을
그저 누군가가 인정해주길 바랐던 건 아닐까.
사실 세상 모든 것이 제각각 다르듯,
결국, 사람의 몸과 마음 또한 서로 다르게 빚어져 있다.
진료실에서 내가 내놓은 답은 어디까지나 의사의 설명이었을 뿐,
그들이 진정으로 갈망한 것은
자신의 고통이 비교될 수 없는 무게라는
그 단순한 사실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이르면
진료실은 더 이상 병을 치료하는 공간만이 아니다.
누군가의 억울함, 누군가의 불안,
그리고 말로 다 표현되지 않는 고통의 무늬가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는 자리라는 것을,
나는 새삼 깨닫게 된다.
통증은 단순한 신경 신호가 아니다.
뇌 속에서 그것은 기억과 감정, 관계와 경험을 통과하며
각기 다른 얼굴로 다시 태어난다.
백 명의 환자가 있다면 백 가지의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과학은 오랫동안 공통된 패턴을 찾으려 애써왔다.
그러나 평균값으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지점에서,
고통은 늘 한 사람만의 서사를 드러낸다.
그래서 오늘날 연구자들은 개인의 뇌 활동을 추적하며
그 사람만의 고유한 통증의 지도(Biomarker)를 그리려 한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한 가지 진실은 분명하다.
통증은 객관의 언어가 아니라, 주관의 언어라는 것.
통증을 호소하는 목소리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추게 된다.
“이 사람의 고통을 나는 오늘,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은 매번 나를 따라다닌다.
내 경험이 때로는 고통을 쉽게 일반화하고,
‘이 정도면 괜찮다’는 내 잣대로 덮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진다.
진료실 밖에서는 때때로 이런 목소리가 부딪힌다.
그런 장면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쪽에 씁쓸한 여운이 남는다.
“어이고, 그 정도로 아프다고 해? 나는 그보다 배는 더 힘들어.”
“아니, 당신이 내가 되어봤어? 하루 종일 저리고 뻐근해서 일도 못 하는데.”
“저린 건 그나마 참을 만하지. 나는 불이 타는 듯 아픈데, 그에 비하면 당신 건 엄살이지.”
비교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서,
우리는 어느새 의도치 않게 서로를 상처 내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은 저마다 자기 고통의 중심에 서 있다.
사실, 고통은 애초에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숫자와 언어로 이 복잡한 감각을 담아낼 수 있겠는가.
통증은 지금 이 순간의 감정만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두려움까지도 함께 얹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진정한 문제는 누가 더 아픈가의 싸움이 아니라,
“그 고통이 그 사람에게는 진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는 흔히 자기 고통을 기준 삼아 남을 재단하지만,
고통은 관계와 기억, 살아온 날들이 겹겹이 스며든 주관의 언어다.
그래서 공감은 “내가 너를 이해한다”는 선언이 아니다.
그보다 더 조용한 태도,
“나는 네가 서 있는 자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는 고백에 가까울 것이다.
환자들이 서로의 아픔을 경쟁처럼 내세우는 순간에도
나는 안다.
그 고통은 그 사람에게는 전부라는 사실을.
누구의 고통이 더 큰가를 따지는 대신,
그 고통이 그 사람에게는 오직 하나의, 절대적인 경험임을 받아들일 때,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은
더 이상 갈등의 이유가 아니라
우리를 더 사람답게 만드는 이해의 자리가 된다.
"In some way, suffering ceases to be suffering at the moment it finds a meaning."
“고통이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고통이 아니다.”
— Viktor E. Frankl, 정신과 의사, 『죽음의 수용소에서』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