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 온 지역에 농인 모임이 있다고 해서 가보았다. 그곳은 청각장애인들이 수어 통역을 지원받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상담하고 취미나 여행 등의 문화 활동을 같이 하는 단체인데 정부 보조금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다. 전에 살던 곳에서는 아주 가끔 갔는데 모임이 주로 평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행사는 토요일에 열려서 어떤 분위기인지 궁금해 참석해 보았다.
다른 곳도 비슷하지만, 젊은 사람은 일하는 직원 외에는 거의 없고 회원이 대부분 중장년이나 노인들이다. 노인성 난청으로 듣지 못하게 된 분들이 1/4 정도 되는 것 같았는데 이분들은 수어를 몰라서 행사를 수어로 진행하면 음성으로 통역해 주는 사람이 따로 있다. 음성으로 진행되는 비장애인 행사에서 청각장애인을 위해 수어나 문자로 통역해 주는 것과 비슷했다.
아는 사람이 없어서 직원을 붙들고 궁금한 걸 물어보고 대화를 시도하며 시간을 보냈다. 옆에 앉은 사람에게 괜히 수어로 말을 걸었다가 생각나지 않는 수어 단어 때문에 난처해질까 봐 조용히 앉아 있다가 오기로 마음먹었다. 총회가 끝난 후 20여분 후에 게임을 하는 순서였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니 서로 안부를 나누라며 이야기하는 시간을 주었다. 나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핸드폰에 받아놓은 전자책을 읽었다. 수어나 짧은 단어로 삶의 거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농인 세계에서 글자로 빽빽한 문장은 이질적이어서 누가 볼까 봐 신경이 쓰였다.
게임은 ‘단어 알아맞히기’였는데 사회자가 앞에 나와 있는 사람에게 사진을 보여주면 그걸 수어를 사용하지 않고 제스처로 표현해서 알아맞히는 거였다. 동물이나 사물 등을 몸으로 표현하는데, 사람에 따라 기가 막히게 표현하는 사람도 있었고 알쏭달쏭하게 표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객석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손을 들고 먼저 맞히겠다고 나서는 게 신기했다. 수어를 모르는 노인들을 배려해 답을 맞힐 기회를 양보하는 것도 그렇고, 조금만 재미있어도 깔깔대며 열성적으로 참가하는 게 좋아 보였다. 수어를 잘 못하는 게 들통날까 봐 얌전히 앉아서 보고 있으려니 구경꾼이 따로 없다.
게임이 끝난 후 기념품 가방을 받아 들고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한 할머니가 우산을 놓고 왔다며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와야겠다고 해서 내가 1층에서 가방을 봐드리겠다고 했다. 그분이 우산을 챙겨 내려오자 가방을 전해드리고 길을 나섰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한 손에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선물 가방을 들고 불편하게 걷고 계셨다. 도와드릴까요 하고 물으니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 음식점 앞에 먼저 가서 기다렸다가 식사 장소를 알려드렸다. 그분은 노인성 난청으로 내 말을 잘 알아들으셔서 대화하기가 편해 자리를 잡고 앉을 때까지 도와드렸다.
숟가락도 놔드리고 아버지 수발들듯이 보살펴 드리니 맞은편에 앉은 분이 수어로 딸이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오늘 처음 뵌 분이라고 하니 웃는다. 내 앞에 앉은 분도 서로 챙기는 게 부부 같아 보여 두 분이 부부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여자분이 자기가 누나뻘이라며 남편은 다른 방에 있다고 한다. 내 앞에 있는 남자 A는 자기가 혼자 따로 놀아 누님이 챙겨주는 거라고 했다. 수어로 ‘혼자 따로 논다’는 표현은 ‘외롭다’라고도 해석이 되는 말이라 헷갈렸는데 그분도 나처럼 어울릴 사람이 없었나 보다.
나보고 새로 나왔냐고 묻는 분이 계셔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고 직장생활을 하느라 평일에 하는 활동은 참가하지 못했다고 하니 잘 왔다고 한다. 이름이 뭐냐고 해서 지화(수어로 하는 한글 자모음)로 알려드리니 얼굴 이름을 다시 묻는다. 농인들은 언어 장애가 있는 분들이 많아서 음성으로 이름 부를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 얼굴의 특징을 손으로 표현하는 얼굴 이름이 있다. 예를 들면 코가 유난히 뾰족한 사람은 코를 잡아당기고 여자면 새끼손가락을, 남자면 엄지손가락을 같이 세워 얼굴 이름으로 표현한다. 4년 전 수어학원에 다닐 때 쓰던 얼굴 이름을 알려주니 너무 흔하다며 바꾸라고 한다. 사실 얼굴이 면적이 그렇게 넓은 게 아니어서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고 똑같은 이름이 너무 많다. 내 이름에 ‘아름다울 미’가 들어가니 예쁘다는 표현의 수어에 다른 손가락을 보태 얼굴 이름을 만들어주며 그걸로 하는 게 좋겠다고 한다. 그래서 고맙다고 하고 작명해 주신 얼굴 이름을 고이 받았다.
밖으로 나와 걷다 보니 건너편에 있는 마트가 싸다고 한 게 생각나 다시 길을 건넜다. 건너편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는 사람 중에 아까 ‘혼자 따로 논다’라고 수어로 표현한 분이 보였다. 비가 오는데 우산을 펴지 않고 걷는 모습을 보니 새삼 ‘외롭다’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가 없어도 외로우면 힘든데 듣지 못하면서 외로운 세상은 어떨까. 어쩌면 외로움 때문에 비 맞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가 보다. 처음 만난 사람이 비 오는 날 우산을 쓰지 않고 손에 들고 걷는 게 걱정인 걸 보면 나도 참 걱정이 팔자인 사람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