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메모해 둔 내용을 찾으려고 다이어리를 뒤지다가 표지에 꽂혀 있는 천 원짜리 지폐를 한 장 발견했다. 천 원으로는 살만한 것이 없는 시대가 되어 가치가 떨어진 돈이지만 나에게는 한때 중요한 지폐였다는 생각과 함께 추억이 밀려왔다.
수어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처음 교육원에 등록해서 수업에 들어간 날에 수어의 구성에 대해 배웠다. 수형, 수위, 수동, 수향으로 이루어지는 수어는 손가락의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의미가 달라진다. 또 중요한 것은 비수지라고 하는 얼굴 표정인데 손가락의 모양과 함께 어떤 표정을 짓느냐에 따라 긍정적인 내용인지 부정적인 내용인지 판별할 수 있다. 처음 한 달 동안 이런 내용을 배우며 표정을 짓는 연습도 하고 숫자와 한글 자음, 모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농인들의 표정은 아주 풍부해서 연기를 전공하는 학생들이 이따금 수어를 배우면서 표정 훈련을 하기도 한다.
두 번째 달에는 조금 어려운 내용을 가르친다는 지영 님 수업을 신청했다. 이분은 가르치는 내용뿐 아니라 삶 자체가 농인의 표본이어서 이후로 약 일 년이 넘게 수업을 계속 듣게 되었다.
요즘은 인공와우수술을 청력을 잃은 아이들에게 시행하는데 심사숙고해 결정해야 한다. 보통 부모가 알아서 자식에게 수술을 시키는데 지영 님 어머니는 딸에게 수술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지만, 지영 님은 수술하지 않고 농인으로 남았다.
선생님이 사는 법은 수업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대체로 농인들은 수어와 표정, 제스처를 써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조금 재미있는 내용이라도 엄청나게 신나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능력이 있다. 지영 님 수업에서 배꼽을 쥐고 웃지 않은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수업 내용 또한 알차서 하루라도 수업을 못 들으면 애가 탈 정도였다.
내가 지영 님에게 배운 것은 못 듣는다고 모두 불행한 것이 아니고 누구나 자기 삶의 범위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영 님은 카페에 가서도 당당하게 수어로 주문한다. 주저하거나 쭈뼛거리는 모습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의 모어가 수어이기 때문이다. 그냥 외국인이라고 생각하면 편한데 외모가 한국인처럼 생겨서 조금 불리하다.
수어로 주문하면 직원은 당황하며 알아서 필담 준비를 한다. 지영 님 덕분에 스타벅스에 사이렌오더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이걸 이용해 주문하면 아주 편하다.
농인 친구들을 모아 아이슬란드를 한 달 동안 차를 빌려 직접 운전하며 여행을 다닌 것은 따라 할 엄두도 나지 않는 일이다. 화산재가 길에 떨어져 있어 운전하기 힘들었다고 하는데 화산재가 아니더라도 나로서는 가이드 없이 그곳에 간다는 건 꿈도 꾸기 어렵다.
지영 님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나는 그녀가 너무 좋아 내가 조금 들을 수 있고 말도 하고 전화도 하니 준비할 때 필요한 일이 있으면 시켜달라고, 무보수로 비서 노릇이라도 하고 싶다고 했다. 워낙 많은 일을 하고 있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이라 그렇게라도 따라다니며 기를 받고 수어도 배우고 싶었다. 그 제안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아마 내가 얼마나 자기를 추앙하는지 잘 알았을 거다.
지영 님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듣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주눅이 들어 있었는데 그녀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 그녀를 모범으로 삼아 할 수 없다고 지레 포기했던 많은 일들에 도전했고, 선생님을 일부러 찾아가 내가 해낸 걸 보여주고 칭찬을 받았다.
어느 해 설 연휴 전날, 수업이 끝나자, 지영 님은 수강생들을 앉혀놓고 빳빳한 천 원짜리 지폐를 한 장씩 나누어 주셨다. 세뱃돈이라는 것이다. 수강인원이 많으니 자기 딴에는 의례로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준비한 이벤트였다. 나는 그 돈을 받아 들고 오래 보관하겠다고 결심했다. 청각장애인 수어통역사 시험에 합격하면 그 돈을 쓰겠다고 결심하고 다이어리에 넣어두었는데 그 시험뿐 아니라 수많은 시험을 통과한 지금에서야 다시 그 지폐를 발견한 것이다.
해가 바뀐 후 다음 해 설 연휴 전에는 내가 선생님을 찾아가 빳빳한 만 원을 선물로 드렸다. 이게 뭐냐고 묻길래 작년에 받은 세뱃돈이 정말 고마워서 열 배로 되돌려드리고 싶다고 하니 함박웃음을 짓는다. 앞으로도 그 천 원은 계속 다이어리에 꽂혀 있을 것이다. 다음에 지영 님을 만날 일이 생기면 그걸 들고 가 사인이라도 받아서 가보로 남겨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