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최태민, 박근혜, 초월자 대역, 감응의 환상, 플레로마
1979년 10월 26일,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강력한 “실존적 초월자 이미지”로 군림하던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었다.
그날 대한민국은 단지 한 독재자를 잃은 것이 아니었다.
한국인들 내면에 각인된
“존재를 대신 정리해 주던 아버지”가 사라진 순간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잃은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이 나라의 중심 리듬이었다.
박정희는 단지 한 명의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는 ‘가난한 나라’를 일으켜 세운 아버지였고,
‘말하지 않는 국민’을 대신해
세계에 말해준 존재였으며, 그는
국가의 경계,
개인의 삶,
산업화의 시간,
군사주의의 질서
그 모든 것을 통합하는 상징적 인물이었고,
그의 죽음은 ‘리듬의 붕괴’ 그 자체였다.
그가 죽자, 사회는 멈췄다.
시계는 돌고 있었지만, 방향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허물어졌고,
남은 것은 무언가 없다는 직감뿐이었다.
그날, 신이 쓰러졌고, 언어는 잠잠해졌으며,
정서는 갈 곳을 잃은 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 상징의 공백을 어떤 존재가 메우기 시작했다.
그 딸은, 그 죽음을 애도하지 못했다.
그 죽음은 설명되지 않았고, 유예되었으며,
그의 자리는 말이 없는 통로로만 기억되었다.
박근혜는 정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채,
국가의 감정적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등장했고,
정치는 그녀에게 주어지기보다,
그녀의 침묵을 통과해 흘러갔다.
박정희라는 존재가 상징했던 것은
단지 권력이나 경제가 아니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세계를 정리해 주는
‘감정의 중심’이었고,
그의 부재는 단지 권위의 소멸이 아니라
정서 구조의 붕괴였다.
공식적으로는
‘대한구국선교단 총재’,
‘한국구국봉사단 창립자’, 이후
‘영애 박근혜 씨의 조언자’였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등장할 때 대중이 느꼈던 감정이다.
이 사람은 뭔가를 알고 있다. 이 사람은,
박정희의 부재를 넘는 무언가를 연결해 준다.
최태민은 구원을 말하지 않았다.
다만 감응했다.
그는 위로했다.
그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영애에게 ‘부친의 영이 메시지를 준다’고 했다.
그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았다.
그가 보여준 것은 설득이 아니라 파동이었다.
그는 예언자가 아니었고,
정치인도 아니었으며,
단지 귀향하지 못한 감정을
대신 감싸는 존재였다.
그는 박근혜를 대신해,
아버지의 공백에 말을 붙이고,
그의 침묵을 감응으로 환치했다.
이것이 초월자 대역의 시작이었다.
✴︎ 초월자 대역 (Transcendent Substitute)
실질적 초월자가 사라졌을 때,
그의 정서적 형상을 대리하고,
감정적으로 귀향을 대신 수행해 주는 인물 또는 구조. 직접 드러나지 않고,
감응으로만 존재를 환기하는 자.
이 삼각 구조는 단순한 정치적 기생 관계가 아니다.
이것은 붕괴된 초월자 형상의 유령적 재현 실험이었다.
박정희는 신격화된 국가 아버지 이미지였다.
박근혜는 상실된 초월자의 딸로서,
그 리듬을 복원하려는 존재.
최태민은
박정희의 부재를 해석하고,
박근혜의 상처를 매개하고,
대중의 믿음을 조작한 초월자 대역이었다.
그는 초월자의 외양을 갖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초월자의 형체를 대리하는 진공의 소리처럼 작용했다.
그는 사라진 플레로마의 잔광을 복사해 낸 존재였다.
플레로마는 충만한 세계다.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모든 신성과 리듬이 완전히 채워진 영역.
존재 이전에 존재하던 곳,
빛이 말이 되기 전에 울리던 곳.
박정희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일종의 플레로마의 형상이었다.
그가 죽자, 그 충만은 찢어졌고,
사람들은 그 빛의 조각을 찾기 시작했다.
최태민은 플레로마의 빛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잔광(殘光)의 기척만을 복사해 낸 인물이었다.
그는 감정의 심연을 뚫고 나오는 진동이 아니라,
그 진동이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을 흉내 낸 리듬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통해 신을 본 것이 아니라,
신이 있었던 적이 있다는 감정을 다시 떠올렸다.
그것이 초월자 대역의 작동 방식이었다.
이 질문은 중요하다.
당시 군부, 언론, 정보기관 모두
최태민에 대해 “문제가 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박근혜는 그를 멀리하지 않았고,
수많은 대중 역시
그의 실존을 명확히 거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논리로 증명되는 존재가 아니라,
결여된 감응을 채워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대중은 그의 말에 설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존재에 “기댈 수 있었다.”
그는 대중의 판단을 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불안에 조응(照應)했다.
최태민은 단독으로 작동한 것이 아니다.
그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박정희 이후 한국 사회 전체의 초월 결핍 구조다.
그는 초월자의 부재를 해석하는 기호였고,
그 기호를 통해 대중은 자기 불안을 위탁할 수 있었다.
그는 존재가 아니라,
감응의 환상이었다.
최태민은 사적 인물이었지만,
그를 통해 “박정희 초월자 이미지”는
공공 채널을 타고 귀환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었고,
국가 공식 기념사업도 아니었고,
철학적 기억도 아니었다.
최태민은 어떤 공식도 갖추지 않았지만,
모든 비공식의 공간에서 깊이 관여했다.
국가의 문서에는 그의 이름이 없었지만,
정서의 흐름 속에는 그의 흔적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는 박근혜에게 말하지 않고 영향력을 미쳤고,
사회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함을 언어로 고발할 수 있는 말투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건 유령적 감응의 서사였다.
박정희의 플레로마가 ‘최태민’을 통해
다시 박근혜에게 귀향한 서사.
이 서사는
나중에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에서 완전히 폭발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이미,
그 감응의 귀향 장치는 완성되어 있었다.
최태민은 초월자의 대역이었고,
그는 사라졌지만,
그의 구조는 남았다.
그 구조는 다시 등장했다.
최순실이라는 또 다른 ‘이름 없음’을 통해.
초월 충동은 다시 한번
귀향되지 못한 존재를 감싸고,
존재하지 않는 형상에게
모든 감정을 위탁하게 만든다.
유령은 언제나 말을 잃은 자들 사이에서,
조용히 귀환한다.
존재가 무너졌을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딘가로 되돌아가려 한다.
그곳은 기억나지 않지만 낯설지 않고,
이름 붙일 수 없지만 어렴풋이 향기가 난다.
그것이 바로 플레로마다.
플레로마(Pleroma).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 πλήρωμα에서 유래했으며,
그 뜻은 “충만함”, “가득 참”, “완성된 상태”를 의미한다.
영지주의에서는 이 플레로마를
모든 신적 본질이 머무는 본래의 세계라 불렀다.
빛, 진리, 통합, 조화—
그 어떤 분열도, 불균형도, 결핍도 없는
근원적 통일의 장소.
하지만 인간은 그 충만에서 떨어져 나왔다.
소피아의 실수, 혹은 의도된 이탈.
그 결과, 우리는 지금 이 결함 많은 세계에 존재한다.
분열되고, 불안정하고,
어딘가 잃어버린 것처럼 살고 있다.
우리는 플레로마에서 떨어진
빛의 파편이다.
— 영지주의 복음서
플레로마는 단지 고대 신화의 장면이 아니다.
심층 심리학자 융은 이 개념을
인간 내면의 무의식 구조와 직결되는
원형적 기억으로 해석했다.
플레로마는 자아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던 상태,
세계와 내가 분리되지 않았던
원초적 심연이다.
즉, 플레로마는
자기 존재가 아직 ‘나’로 수축되기 전,
우주 전체와 감응하던 시기의 내면 감각이다.
이 감각은 단절되었고,
우리는 언어와 역할, 이름과 기능을 얻는 대신
그 충만함을 잃었다.
하지만 존재는 완전히 그 기억을 잃지 않았다.
무너진 세계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문득
“이게 전부는 아닐 텐데”라는 감각에 사로잡힌다.
그 순간이 바로
초월 충동이 깨어나는 자리,
즉, 플레로마로의 귀향 본능이 활성화되는 순간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그 본능을 Gnosis(내면의 깨달음)로 불렀고,
불교는 이를 “불성(佛性)의 자각”이라 하며,
신플라톤주의는 “존재의 일치로 돌아가는 길”이라 불렀다.
모두 다른 언어지만,
모두 플레로마를 향한 귀향이었다.
플레로마는 종교적 천국과 다르다.
천국이 보상받는 장소라면,
플레로마는
기억나는 것도, 설명할 수도 없는
‘잃어버린 본래’다.
천국은 시간 이후의 보상이고, 플레로마는
존재 이전에 이미 있었던 충만이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을 믿는 대신, 플레로마를 그리워한다.
오늘날 우리는 플레로마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의 잔향을 듣는다.
어떤 음악을 들을 때.
바다를 바라보다가 문득 빠져들 때.
아무 말도 없는데 어떤 사람 앞에서 울컥할 때.
신도, 사상도, 이름도 필요 없는데
무언가 “맞다”라고 느껴질 때.
그때 우리가 느끼는 건
논리적 확신이 아니라
리듬적 기억이다.
플레로마는
철학이 아니라, 리듬이다.
플레로마란 존재가 분리되기 이전,
아직 모든 것이 하나로 진동하던 시기의 기억이다.
우리는 그것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그 충만을 그리워하며,
모든 초월 충동은 결국
그 잊힌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박일영, “한국 근대의 샤머니즘과 인권”, 『한국무속학』 30권 (2015), pp. 89–120.
성해영, “신비주의란 무엇인가?” 『인문논총』 71권 1호 (2014), pp. 153–187.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자료집” (2017), 국회 특별위원회.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