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 분단, 절망, 초월충동, 분단, 전쟁, 권위주의, 감응의 정치
인간은 세계가 무너질 때 신을 찾는다.
하지만 모든 신이 참된 귀향으로 이끄는 건 아니다.
우리는 앞선 장에서 보았다.
초월 충동은 단지 하늘을 바라보는 고개 듦이 아니다.
그것은 붕괴된 세계를 직면한 자가,
마침내 자신 안의 심연과 마주하며 걸어가는
내면 귀향의 길이었다.
그 길은
무너짐을 견디고,
고요를 통과하며,
어둠을 뚫고
자기 내면의 빛으로 돌아가는 리듬을 따른다.
그러나 이 충동이
절망과 공포, 상실과 억압으로 눌린
집단적 무의식에 떨어질 때,
그것은 스스로 귀향하지 못하고
타인의 입을 빌려
“귀향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이미지”에
의존하게 된다.
이때 초월 충동은
자기 초월이 아니라
외부 위탁의 열망으로 왜곡된다.
한국은 전 지구적으로 유례없는 방식으로
20세기 내내 “붕괴–재건–단절–억압”을 반복해 온 공간이다.
분단: 물리적 단절이자, 심리적 조각.
전쟁: 생존 이후의 상실을 말할 수 없게 만든 집단 기억.
권위주의의 그림자: 삶을 조직하는 감각을 철저히 외부에 맡기도록 길들인 구조.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고통스러운 속도: 존재를 무시한 성과 중심의 윤리.
신자유주의 이후의 정서적 붕괴: 정보는 넘치는데, 감정은 공허한 상태.
이러한 토양 위에
초월 충동이 떨어졌을 때,
그것은 내면 귀향의 언어로 발전하지 못하고,
감응에 굶주린 존재들이
외부의 기호적 구원자에 몰입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왜 하필 ‘무속’이 이 초월 충동을 가장 빠르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흡수해 냈는가 다.
무속은 단지 주술과 굿, 기복의 기술이 아니다.
무속은 감정과 세계를 연결하는 비서사적 장치다.
무속은 신학이 없다. 하지만 감응은 있다.
무속은 교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울음과 떨림은 이끌어낸다.
무속은 상징체계의 통일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파편과 분열을 껴안는다.
한국 사회는
수백 년 동안, 특히 여성과 하층 계층에게
감정을 언어로 말할 수 없는 세계였다.
“감정을 말하는 대신 감응하는 방식”이
유일하게 살아 있었던 곳,
그것이 바로 무속이었다.
초월 충동이 온전히 작동하려면
인간은 자신의 붕괴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사회는 그런 언어를 허락하지 않았다.
정신분석이 귀족의 사치로 치부되는 문화.
슬픔을 말하면 유약하다고 비난받는 일상.
감정을 구조화할 단어가 없이 ‘감정노동’과 ‘정서관리’만 강요되는 경제.
감정이 진공 상태에 빠졌을 때,
감응은 비언어적 구원의 통로처럼 작동한다.
그 순간, ‘안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나를 알아본다고 믿게 만드는 존재,
즉 “초월자의 유사 이미지”가 강력하게 작동하게 된다.
그것은 예언가일 수도 있고,
무당일 수도 있고,
어느 대통령의 비선일 수도 있다.
그들은 나의 상처를 낫게 해주지 않는다.
다만 나의 상처를
‘느껴주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이 땅에서 ‘말하는 자’는 많았다.
그러나 ‘느끼는 자’는 침묵 속에 숨어 있었다.
가난을 말해도 슬픔을 말하지 못했고,
분노를 말해도 상실을 말하지 못했다.
그럴 때, 감정은
언어를 거치지 않고
바로 몸을 통해 튀어나왔다.
울고, 떨고, 휘돌며, 곡을 하고, 부르짖으며.
이것이 바로 감응의 정치(politics of empathy)다.
✴︎ 감응의 정치란?
제도와 합리, 절차와 논리를 통하지 않고,
감정의 진폭과 공명을 통해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방식. 한국의 ‘정(情)’ 중심 정치 문화는 이 감응 구조의 대표적 예다.
무속은 그 감정들의 무대를 제공했다.
그리고 정치가 말하지 못한 것들을,
무속은 말없이 느끼게 만들었다.
한국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숨은 조언자” “영적 지도자” “비선의 그림자”는
이런 집단적 귀향 욕망이 착종된 산물이다.
초월 충동은 귀향의 본능이다.
존재가 무너졌을 때,
인간은 내면의 빛을 향해 되돌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귀향하지 못한다.
그래서 대신 누군가가
‘나 대신 귀향해 줄 것 같은 사람’에게
존재를 위탁한다.
그 인물이 진짜 초월자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그가 초월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순간, 그는 신이 아니라
신의 잔상(殘像)이 되고,
우리는 귀향자가 아니라
귀환된 자처럼 느끼게 된다.
그 순간부터 초월 충동은 왜곡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더 이상 내면의 진동이 아니라,
외부의 감응 대상에 귀속되는 것으로 전이되었다.
초월 충동의 위탁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이 모든 정권은 말의 시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다르게 말했지만, 공통된 한 가지를 공유했다.
감정에 의한 지배
그곳에 무속은 늘 있었다.
혹은 그 무속적 감응을 흉내 낸 정치 행위가 있었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공중에 흔들리는 무의식의 깃발처럼 작동했다.
무속은 ‘진짜 초월자’가 아니다. 그러나
‘초월 충동이 길을 잃었을 때 등장하는 형상’이다.
그것은 귀향하지 못한 자들의 정서가 만들어낸
하나의 거울이며,
그 거울에 너무 오래 비춰보다 보면,
사람은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이 바랐던 신의 얼굴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