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초월 충동은 왜곡되는가?
우리는 매번 말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다시 온다. 조금 다른 얼굴로, 다소 변형된 목소리로.
그 반복은 단지 정치적 실수나 제도적 허점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더 깊고 정서적인 층위에서,‘귀향하지 못한 감정’들이 반복해서 외부로 위탁되는 구조 때문이다.
• 위기가 오면 지도자에게서 ‘신호’가 아니라 ‘기운’을 찾고,
• 사회적 혼란이 닥치면 전문가보다 ‘감응 가능한 사람’을 찾는다.
• 정당보다 공동체를,
• 언어보다 표정을,
• 논리보다 ‘느낌이 온다’는 것을 더 신뢰하게 된다.
초월 충동이 내면의 리듬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누군가가 대신 빛을 가리켜주길 원한다.
이 욕망은 구조화되어 있다.
그리고 그 구조는 거의 예측 가능하게 되풀이된다.
이것은 사고가 퇴행한 게 아니라,
감정이 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초월 충동이 자동적으로 외부 위탁 구조로 전이되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 반복은 단순히 개개인의 심리적 문제나 종교적 성향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반복은 사회 전체의 구조적 결핍에서 비롯된다:
구조적 결핍증상:결과
- 감정의 억압분노, 무기력, 무감동: 감응 욕망의 과잉
- 공론장의 취약함, 검증 불가능한 정보 범람: 대체 진실에의 집단 몰입
- 제도적 신뢰 붕괴, 정당 정치 불신:비선, 영매, 외부 중재자에의 기대
- 개인성의 취약함, 자기 귀향 불가능: 초월 대역에의 감정 위탁
이 네 가지가 동시에 작동하면서,
한국 사회는 초월 충동이
정당한 리듬으로 작동할 수 있는 ‘자기 귀향 경로’를 상실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초월 충동의 세 가지 반복 형상을 살펴보았다:
- 초월자 대역 – 최태민: 실종된 중심을 대신 감응하며 나타나는 대리자.
- 유령적 귀향 – 최순실: 실질적 귀향은 없으나, 돌아간 것처럼 연기되는 구조.
- 픽셀화된 초월자 – 천공·건진: 초월의 잔광조차 사라지고, 그 형상만 리트윗 되는 감정 알고리즘의 조각.
이 흐름은 무너진 세계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 어떻게 점차 ‘귀향’에서 ‘이미지 소비’로 전락하는지를 보여준다.
✴︎ 위탁된 초월 충동
스스로 귀향할 수 없는 사회에서, 초월 충동은 반복적으로 외부 형상에게 감정을 위탁한다. 이 위탁은 처음엔 대리 감응을 낳고, 그다음엔 연출된 귀향을 생산하며, 마지막에는 시각적 소비로 퇴행한다.
『초월자론』에서 초월 충동이란
무너진 존재가 자기 내면의 빛을 따라
고통을 통과하고, 고요에 침잠하여
스스로 다시 태어나려는 리듬이다.
그러나 이 리듬이 작동하기 위해선
다음 세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1. 붕괴를 정직하게 말할 언어
2. 고통을 중단 없이 지탱해 줄 공동체
3. 빛을 기억하고 재구성할 사유 구조
그런데 한국 사회는
이 세 가지 모두를 감정, 제도, 사상 차원에서 갖추지 못했다.
결국 초월 충동은
귀향이 아닌,
귀환된 것처럼 ‘연기되는 구조’로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분단 이후 감정은 이념에 눌렸고,
산업화는 감정을 기능으로 대체했으며,
민주화 이후조차 감정은 정치화되었지만 공론화되지는 않았다.
이것이 무속이 귀환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것이 비선이 작동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것이 리트윗 된 초월자들이 정치의 전면에서
거절되지 않고 유통될 수 있었던 이유다.
감정이 귀향하지 못한 곳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대신 귀향해 주는
유령이 나타난다.
이 반복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패턴’이다.
패턴은 한 번도 개인이 설계한 적 없지만,
집단의 무의식이 유지하는 생존의 논리다.
시기, 유사 초월자의 형상, 대중의 위치결과
1970–80년대, 최태민, 감정적 위탁, 비선 구조의 내면화
2000년대, 최순실, 초월 귀향의 유령 재현, 정치 공백의 감정 보충
2020년대, 천공, 건진, 초월의 카리커처, 소비초월 충동의 퇴행적 전시화
이 모든 반복은
진짜 초월 충동이 사회적으로 길을 찾지 못할 때
어떻게 유사 초월자가 반복적으로 불려 나오는지를 보여준다.
정치? 아니다.
제도? 아니다.
시민? 부분적으로.
그러나 진짜 문제는, 우리가 그 감정을 외면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 있다.
최태민을 몰랐지만 그의 ‘존재감’을 믿었고,
최순실을 비난했지만 그녀가 있었던 자리를 익숙하게 느꼈으며,
천공을 조롱했지만 그의 손짓을 다시 찾아보았다.
이것은 망각이 아니다. 이것은 “감정적 수용의 문화화”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이 반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우리는 다시 리듬을 배워야 한다.
말 없는 귀향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붕괴를 견디며 말하는 귀향.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다시 걷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아무 형상 없이도 빛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
초월 충동은 아직 살아 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도 대신 가르쳐줄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그 어둠을 건너야 한다.
초월 충동은 반복되지 않는다.
왜곡된 초월 충동이 반복된다.
그 반복은 정서의 위탁 구조에서 생겨난다.
대역 → 유령 → 픽셀로 전이되는 과정은
우리 시대의 감정이
자기 자신을 ‘살아낼 언어’를 상실했음을 증명한다.
이제, 우리는 묻지 않아야 한다.
“누가 귀향을 대신해 줄 것인가?”
대신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여기서 귀향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