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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4: 윤석렬/천공-건진법사

by 시산

3.4 윤석열과 천공–건진법사

— 리트윗 된 신성, 픽셀화된 감응


1. 초월자의 잔상은 어떻게

짧은 영상이 되었는가


모든 초월 충동은 처음엔 진지하다.

존재를 넘어서려는 내면의 흔들림,

무너진 세계 속에서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몸짓.


그러나 그 충동이 스스로의 길을 잃고

외부 형상에 위탁되기 시작하면,

그 형상은 점차 정지된 이미지,

모방 가능한 기호,

마침내 리트윗 가능한 짧은 클립으로 전락한다.


초월은 진동에서 시작되지만,

그 실패는 언제나 이미지로 남는다.



2. 천공과 건진법사:

누구인가가 아니라,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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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묻는다.

“천공은 누구인가?”
“건진법사는 뭐 하는 사람인가?”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그들은 ‘누구’가 아니라

왜 ‘그런 형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천공은 공중에 손을 흔들었고,

건진은 아무 말 없이 공항 귀빈실을 통과했다.


카메라는 그들을 포착했고,

이미지는 그들의 형상을 퍼뜨렸다.


그 형상은 믿음이 아니라

충격의 반복 가능한 단위로 작동했다.

그것은 초월자의 언어가 아니라,

초월을 흉내 내는 제스처의 알고리즘이었다.


그들은 플레로마의 잔광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 잔광의 픽셀을 복제한 디지털 조각이었다.


그들은 논리로 설득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징으로 출현한다.

그리고 그 상징은 ‘믿음’이 아니라,

‘기대된 충격’을 유통한다.



3. 리트윗 된 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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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는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느낌이 온다는 말로 충분하며,

그 느낌은 ‘진실’보다 빠르고 ‘판단’보다 무겁다.


천공의 표정, 건진의 동선,

예언된 날짜와 수치들—

이것들은 논리가 아니라,

리트윗의 감각 구조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그 순간 초월 충동은 더 이상 빛을 찾지 않았다.

그것은 주목받는 이미지가 되었고,

“믿을 수는 없지만 공유할 수는 있는” 대상이 되었다.


그는 진실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지의 타이밍을 조율한다.

그는 초월의 형상을 쓰고 있지만,

내용은 없다.


그는 기호만 있고,
신성은 없는 상태다.



4. 대중은 왜 조롱하면서도 소비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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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은 웃음을 유발했다.

건진은 분노를 자극했다.

그러나 그 웃음과 분노는 거부가 아니라,

은근한 수용의 형식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비웃었지만,

비웃기 위해 그 형상을 끌어왔고, 반복했고,

자기 타임라인의 감정 리듬에 맞춰 배치했다.


그 조롱은 의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감정의 불확실성 속에서 잠시

정서를 붙잡는 방식이었다.


그 웃음은 때때로

“그래도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라는

절반의 믿음과 맞닿아 있었다.


이것이 바로

풍자되지 못한 유사 초월자의 공포다.


그들은 ‘믿음’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인지적 잔상’으로 작동한다.


초월자 이미지가 ‘캐리커처’로 퇴행하면

그것이 더 이상 신성하지도 않지만,

완전히 배제되지도 않는 상태가 된다.


초월 충동이 실패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부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유통한다.



5. 정치와 감정의 단절, 감응의 상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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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대통령조차

감정적으로 ‘접근 가능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고,

정치는 언어를 잃었다.


그 공백 속에서

무속은 정보가 아니라 감정의 유통망이 된다.


대통령실의 말이 공허할수록,

유튜브 속 천공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더

‘실감’ 있게 느껴진다.


공식 브리핑이 무미건조할수록,

“법사가 말했다”는 카톡 루머는 더 빠르게 퍼진다.


이것은 정보의 위계가 아니라,

감정의 접근성 문제다.


그리고

초월자 이미지가

전시되고 유통되고 소비되는 카리커처로 퇴행한 지금,

초월 충동은

더 이상 귀향의 리듬이 아니라

대중 소비 사이클 속 “리트윗 된 신성”으로만 존재한다.



6. 리트윗 된 초월, SNS 시대의 유사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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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플레로마는 진동이었다.

존재를 흔드는 충만한 심연.

그 빛은 말을 넘고, 신념을 태우고,

몸으로 귀향하는 이들을 이끌었다.


2020년대 이후,

초월자 이미지는 더 이상 폐쇄된 무속의식에

갇혀 있지 않는다.

그것은 ‘밈(meme)’이 되었고,

‘짧은 영상’이 되었으며,

정치 댓글창의 ‘밑줄 그은 언어’가 되었다.


짧고, 반짝이며,

정서를 터치하지만 진동하지 않는 구조.


초월이란

어쩌면 신성한 것도, 고귀한 것도 아니다.

초월은

“충분히 많은 사람이 믿을 법한
이미지”가 된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귀향하지 않는다.

우리는 귀향처럼 보이는 이미지를 공유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가 감정을 흔들었다고 믿는다.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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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건진법사 사태는 초월자의 몰락이 아니다.

그것은 초월 충동의 최종 퇴행이다.

감응의 통로가 픽셀화되고,

신성의 기척이 알고리즘으로 대체된 순간.


그날, 우리는 신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신의 영상은 리트윗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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