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귀향에서 말하는 귀향으로
우리는 이 긴 여정의 끝에서,
사실은 귀향에 실패한 이야기들만을 따라왔다.
대역이 대신했고,
유령이 연기했고,
픽셀이 잔상을 남겼다.
그 모든 구조는
‘말하지 않는 귀향’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스스로 말하면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박정희 이후,
최태민은 초월자의 대역이었다.
최순실은 초월자의 유령이었다.
천공은 초월자의 카리커처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두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한동안은 그 형상들에 귀향을 맡겼다.
왜냐하면
직면은 고통스럽고,
귀향은 혼자 가야 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초월 충동은
카리스마 리더나
영적 공동체의 이름으로 집단화될 때
대개 왜곡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의 고통과 무너짐을 통해만
진짜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초월 충동은
누군가의 설교나 예언이 아니라,
내가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을 때
조용히 심연에서 올라오는 리듬이다.
그 리듬은
• 내 고독에서 시작되고,
• 내 안의 부서진 말들 사이를 흐르며,
• 어느 날 조용히 나를 귀향시키기 시작한다.
우리는 감정을 잃은 게 아니다.
우리는 그 감정을 말할 길을 잃었다.
* 분노를 말할 언어를 잃었고,
* 상실을 나눌 대화를 잃었고,
* 고통을 사유할 시간을 잃었다.
그래서 초월 충동은 유통되었고,
패러디되었고,
끝내 이미지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감정을 복원하는 언어의 구조를 다시 세워야 한다.
우리는 이제
다시 초월 충동을 꺼내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신비화된 구원 서사가 아니라
정직한 붕괴의 직면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시작을 위해 필요한 건 세 가지다:
초월은 죽지 않았다.
그것은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단지 우리가 그 방향을 다시 바라봐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안다.
귀향은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형상으로 주어질 수도 없고,
리트윗될 수도 없다는 것을.
초월은,
내가 나를 향해
되돌아가는 길이다.
초월 충동은 드라마틱한 계시가 아니다.
그것은 매일 밤 불 꺼진 방 안에 앉아
스스로를 말없이 마주보는 능력이며,
출근길 지하철에서
어제보다 1초 더 숨을 길게 쉬는 능력이며,
누군가에게 고백하듯
“나 요즘 좀 무너진 것 같아”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다.
그 순간이 초월 충동의 귀환이고,
그 리듬이 ‘진짜 귀향’을 다시 시작하게 만든다.
우리는 묻는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정말 있을까?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침묵을 멈추는 작은 고백
내 안의 감정을 말로 불러내는 용기
누군가의 무너짐을 가만히 들어주는 인내
모든 귀향은 사적인 리듬으로, 조용히
그리고 그 끝에서,
플레로마의 잔광이 다시
말할 수 있는 빛으로 깨어날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드디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다시 돌아가는 중이다.
초월 충동은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충동이 다시 살아나려면,
우리는 누군가를 따르기 전에
자기 존재의 무너짐을 직면하고,
거기서부터 말없이 귀향을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초월은 믿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안으로 건너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