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리아빈은 왜 ‘달콤 살벌’한가

스크리아빈의 Fantasy in B minor

by 여자말러리안

오늘은 필자 자칭 ‘달콤 살벌한' 작곡가를 소개하려고 한다.

여기서 ‘달콤 살벌’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달콤함과 살벌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를 뜻한다.

그 표현에 가장 잘 맞는 작곡가는 바로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1872~1915)'이다.

나무위키_스크리아빈

스크리아빈은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 무엇보다 피아노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인물이다. 그가 남긴 215곡 중 무려 204곡이 피아노곡이라는 사실만 봐도, 그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었는지 분명해진다. 그의 음악은 늘 전통을 벗어나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뿌리와 세계관을 조금만 이해하면, 스크리아빈의 음악은 금세 다르게 다가온다.


1905년 러시아 제1차 혁명 이후, 러시아의 문화계는 두 갈래로 나뉘기 시작한다.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상징주의 예술, 그리고 정권의 이념을 대변해야 했던,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그러하듯, 예술은 정치적 이념을 담아야 한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출처: 스크리아빈의 사상적 배경 연구 (윤정아, 충남대학교 대학원 2008)

이러한 분위기 속 러시아의 예술가들은 망명을 선택하고 남아있던 음악가들은 유럽과 미국에서 들려오던 새로운 음악의 조류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 러시아 작곡가 스크리아빈은 두 개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예술관을 세워나간다. 한가지는 상징주의를 의식한 듯, 인간의 자유와 이상을 향한 열망. 두번째는 마르크스 사상에 깊게 매료되어 갖게 된 사회적 이상. 이 두가지 흐름이 충돌하고 또 융합하여 '스크리아빈의 음악'이 탄생한다. 그의 음악은 현실과 초월, 육체와 영혼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듯하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신비주의'라는 이름으로 설명되곤 한다.

신비주의는 간단히, 우주전체와 나 자신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직접 체험하는 것인데, 논리적으로 분석하거나 이성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방식이 아닌, 직관과 같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즉각적인 느낌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적 체험은 잠깐 번쩍 스치는 순간처럼 일시적이며 예측할 수 없이 찾아온다. '나'라는 존재는 단순한 개인이 아닌 신성(신적인 빛을 담고 있는)을 가진 존재라고 보는 것이라 한다.


음악을 들을 때 문득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을 느낀다던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 바로 그런 종류일 것이다. 스크리아빈이라는 작곡가는 궁극적으로 음악을 들으며 '신성함'에 닿을 수 있을 듯한 쾌감, 그 순수한 경외감을 느낄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스크리아빈의 음악은 나에게 굉장히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스크리아빈의 음악을 '달콤 살벌'이라고 표현한다.

그중에서도 그의 음악이 지닌 ‘살벌함’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스크리아빈의 피아노곡을 들을 때면 특이한 그만의 음향이 느껴진다. 감각적이며 떄로는 촉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피아노의 타건이 단단한 나무가 아닌, 얇은 유리를 톡 건드렸을 때 퍼지는 차캅고 날카로운 음향이 느껴진다. 그뒤 퍼져 나오는 음색은 마치 깨진 유리조각 이 공기 중에 흩어지며 눈부신 궤적을 그리는 듯하다. 아름다움과 날카로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모호한 감정이다. 내가 ‘살벌하다’고 표현한 건 바로 이 순간 때문이다. 그런데 스크리아빈의 음악에는 이처럼 서늘함만 가진 것이 아니다. 초기 작품들에서 특히, 그는 쇼팽의 영향을 깊이 받아 서정적인 달콤함과 몽환적인 선율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피아노곡에서 느껴지는 이 양극의 감정을 ‘달콤 살벌하다’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크리아빈의 피아노 소나타는 총 10곡이다.

전통적인 3악장 구조에서 벗어나 한 악장으로 구성된 소나타도 있고, 두 악장만으로 이루어진 소나타도 있다.
형식부터 이미 자유롭고 실험적이다. 1번부터 10번까지의 소나타를 따라가다 보면, 초기의 낭만적 정서부터 후기의 신비주의적 세계에 이르기까지 스크리아빈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했는지 그 흐름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중 오늘 소개할 음악은 <Fantasy in B minor, Op. 28>이다.

곡은 3분의 4박자 Moderato로 조용히 시작된다. 서정적인 도입처럼 보이지만 몇 마디 지나지 않아 불규칙한 악센트와 악보를 들여다보면 임시표가 눈에 띄게 많이 등장한다. 조성의 경계를 흐리고 음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반짝거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다 più vivo, 말 그대로 조금 더 생기 있게, 더 살아난 듯한 순간으로 들어선다. 오른손의 멜로디는 마치 쇼팽의 서정성을 품은 듯하면서, 벨 에포크 시절 드뷔시가 떠오르기도 한다. 멜로디 사이사이 수놓아진 꾸밈음과 펼침음들은 고운 자수처럼 촘촘하게 짜여있는데, 아쉽게도 서정은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마치 행복한 순간은 늘 짧게 지나가듯 말이다. 이 아름다운 멜로디는 조심스럽게 시작되다 금방 사라진다. 그리고는 한 차례 아르페지오가 끝나고 다시금 왼손의 폭발적인 16분 음표와 함께 다시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처음보다 훨씬 강한 압력을 받으며 회귀한다. 왼손의 16분 음표는 반주를 넘어 곡 전체를 끌고 가는 폭발적인 에너지로 기능한다. 그 위에 서정적 선율이 놓이며 동기 발전과 변형이 극적으로 드러난다. 악보에 역시 appassionato 지시와 거의 절규에 가까운 fff의 악상이 겹치면서, 음악이 물리적 통증까지 주는 효과를 낸다. 클라이맥스 후 b minor라는 조성 위에 끊임없는 반음계적 진행이 교차하면 전통적인 '해결'로의 귀결이 아닌, 더 많은 질문과 여운을 남기는 방식으로 끝을 낸다.


필자는 이 곡을 처음 듣고 스크리아빈의 매력에 완전히 빠졌고 소나타 10개를 모두 찾아들었다.

개인적으로 Marc-André Hamelin의 연주를 추천한다. 스크리아빈의 색채를 살리면서 서정성 또한 과장되지 않게 투명하게 풀어내어 부담 없이 듣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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