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틸레만 x 빈 필의 ‘황금빛 사운드’
11월 앞다투며 내한을 펼쳤던 세계 최정상 오케스트라들의 여정의 마지막은 빈 필이다.
빈 필 그리고 크리스티안 틸레만의 슈만과 브람스. 모두 '시간'의 세례를 받은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닮은 듯 다르게 고전미와 완숙미를 지니는 슈만과 브람스, 카라얀의 계보를 잇는 전통 독일 지휘자 틸레만,
그리고 황금빛 사운드의 대명사인 빈필까지.
교향곡 레퍼토리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가진 빈 필. 그리고 그들의 정통성과 가장 맞닿아 있는 슈만과 브람스.
협연자 없이 순수 교향곡만으로 구성된 이번 프로그램은, 스스로의 전통과 음악에 얼마나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브람스를 세상에 처음 알린 슈만,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자신만의 언어로 독일 교향곡 전통을 새롭게 완성한 브람스. 19세기 독일 음악의 흐름을 한 공연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두 작곡가의 음악적 계보가 무대 위에서 순서대로 펼쳐지는 매력적인 프로그램이다.
그날 예술의 전당에는 세월이 켜켜이 스며든, 시간이 만든 깊이와 전통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객석에 들어서는 순간, 먼저 느껴진 것은 조용한 기대감이었다. 음악애호가들은 차분하고 단정한 태도를 지닌 채 자리에 앉아 포디움 위, 빈 지휘대와 핸드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시간이 되자 빈 필 단원들이 하나둘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흰머리가 성성한 연주자, 깊게 파인 주름.
수십 년을 악기와 함께 동고동락해 온 이들만이 지닐 수 있는 걸음걸이, 서로 가볍게 나누는 미소,
악기를 쥐는 손의 습관적이면서도 단정한 움직임이 모든 것이 빈이라는 도시가 지켜온 전통과 품격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저 단원들이 무대로 들어오는 모습만으로도 이 오케스트라가 왜 “전통”이라는 수식어로 불리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뒤로 길게 떨어지는 턱시도를 입은 틸레만이 들어왔다. 몸이 살짝 앞으로 기울어져 포디움으로 곧장 파고드는 걸음걸이로 금방 들어왔다.
첫 곡은 슈만 교향곡 3번 '라인'이다.
라인 강의 풍경과 독일적 정서를 음악으로 담아낸 이곡은 마치 각 악장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대변하듯이 계절의 흐름처럼 따뜻하다. 생동감 있는 리듬과 흐름이 빈 필의 황금빛 음색을 타고 쏟아졌다.
틸레만의 해석은 중도를 지키며 강물의 흐름을 손바닥으로 쓸어 확인하듯 음악의 결을 세심하지만 유려하게 정돈해 나갔다. 1악장이 시작되자마자 뒤셀도르프와 쾰른 일대로 이어지는, 슈만이 마주한 ‘그’ 라인강에 온 것처럼 생기가 돌았고 명랑한 첫 시작에 마치 음원을 틀어놓은 듯한 정갈한 사운드에 놀랐다.
2악장은 스케르초 풍의 춤곡으로 가볍지만은 않게, 마치 라인 강 가장자리를 느긋하게 산책하듯 시간의 여백과 여유를 살리며 연주했다. 3악장은 슈만의 목가적인 정서가 느껴지기도 했고 현악과 목관 그리고 금관 어느 하나 지나치지 않게 맞물렸고, 그 균형이 주는 안정감 때문인지 음악의 전체가 마치 한눈에 펼쳐지듯 명료하게 조망되는 경험을 했다. 4악장에서 아타카로 넘어가는 5악장 역시 어느 하나 튀지 않고 제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도 서로를 감싸는 듯한 빈필 사운드를 다시 한번 보여줬다. 틸레만의 지휘봉 끝은 놀라울 만큼 집중적이고 예민하게 움직였으며 덕분에 마지막 악장은 밝은 활력과 품위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부드럽게 마무리되었다.
두 번째 곡은 브람스 교향곡 4번이다.
1악장의 제1 주제가 시작되자, 익숙한 멜로디에 왠지 모를 뭉클함이 올라왔다. 하행했다 다시 상행하는, 낭만적이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첫 프레이즈를 빈 필은 밀도 있고 단단한 음색으로 시작했다. 브람스가 누군가에게 혹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이어 다시 스스로의 대답을 찾아가는 듯했다. 슈만이 자연에 대한 예찬과 경외심을 담고 있었다면, 브람스에서는 농밀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겹쳐지는 브람스 특유의 정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많은 음원을 들었지만, 이렇게 마음에 남은 연주는 아직 없었다. 가능하다면 음원으로도 다시 듣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시작이었다. 2악장은 조금 더 내밀하고 고요한 세계로 침잠하는 듯했다. 브람스 4번의 꽃은 목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데,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는 말처럼, 장식 없이 담백하지만 놀라울 만큼 밀도 있는 음색으로 선율을 이어갔다. 현악군은 지나치게 울리지 않고 평평하게 길을 만들어주었고, 그 위에서 목관이 유유자적 걸어가듯 세심하게 소리를 쌓아 올렸다.
점점 곡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3악장은 탄력 있게 에너지를 밀어붙였고, 전면에 등장하는 금관은 정확한 타격과 균형을 지켰다. 현악, 금관, 타악이 서로의 울림을 덮지 않으며 한 덩어리로 움직였다. 마지막 4악장에는 여러 선율들이 서로 얽히고 풀리며 대위적인 결을 만들어냈고, 속도감까지 더해져 압도적인 긴장감이 느껴졌다. 특히 플루트의 솔로는 불필요한 장식이나 비브라토를 배제한 채, 자칫 감정과잉으로 기울어질 수 있음에도, 정갈하게 4악장의 골조를 세웠다.
브람스의 완성도 높은 작곡 기법과 틸레만, 빈필의 집중력과 노련함이 하나로 맞물리자, 압도감은 객석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곡이 끝나는 순간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 역시 일어났고, 음악에 대한 경외와 존경심이 올라온 순간이었다. 이날의 빈 필 사운드는 단순히 훌륭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스트링의 소리결은 부드럽다 못해 광택을 만들었고, 목관은 둥글고 따뜻하며 군더더기 없이 선명했고, 그 담백한 음색이 스트링의 금빛 결과 조용히 어우러졌다. 금관은 필요 이상의 힘을 쓰지 않으면서도 무게감 있는 깊은 색조를 유지해 전체 사운드에 단단한 중심을 놓아주었다. 이 모든 요소가 지나치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움을 이룬다.
말 그대로 황금빛 결을 가진 황금빛 사운드의 빈필이었다. 빈 필과 틸레만이 만들어낸 이 밤은 전통과 해석이 이루는 황금비의 순간이었다.
+빈필스러운 앙코르곡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