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브람스와 말년의 버르토크

클라우스 메켈레(Klaus Mäkelä) RCO의 밤

by 여자말러리안

2025년,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모든 일들이 하나둘 정리되고,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조용한 시기.
그렇게 닫혀가는 한 해의 끝자락, 다시 문을 열 듯

'거대한 오케스트라들의 순례'가 찾아온다.

그중에서도, 클라우스 메켈레와 네덜란드 왕립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내한은 클래식 애호가들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든다.

NOL 인터파크 상세페이지(출처)

클라우스 메켈레와 네덜란드 왕립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는 올해 11월, 아시아 투어의 일환으로 한국을 찾았다. 11월 5일 예술의 전당을 시작으로, 6일 롯데콘서트홀, 9일 부산콘서트홀까지 단 세 번의 무대로 한국 청중과 만나는 일정이었다. 내가 본 공연은 그 서막을 알리는 아시아 투어의 첫날, 11월 5일 공연이었다. 세계가 주목하는 젊은 지휘자와 전통의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낸 첫 공연은 그 자체로 시작이자 마침표처럼 느껴졌다.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1번 d단조와 버르토크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작품번호 116. 젊은 브람스와 말년의 버르토크의 작품들이다. 서로 다른 세기를 살았지만 두 거장의 궤적은 묘하게 닮아있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1854년부터 1858년 사이, 브람스가 스물한 살에서 스물다섯 살 무렵에 작곡한 작품이다. 그렇기에 흔히 ‘젊은 브람스의 패기와 열정’을 담은 곡이라 여겨지지만, 이 음악 속에서 들리는 것은 단순한 열정이 아니다. 청춘의 불꽃은 금세 가라앉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깊은 사유와 내면으로의 침잠이다.

마치 자신과 대화를 나누듯, 음악은 놀랍도록 절제되고 원숙한 빛을 띤다.

베토벤이 남긴 거대한 유산의 그림자 속에서 그는 혁신 보다 형식과 논리, 내면과의 조우를 택했고

신독일파와 같은 당대의 화려한 표제음악이 음악계를 집재하던 시절,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순수음악이라는 고독한 길을 걸었다는 점, 또 그 당시 스승의 붕괴와 죽음을 목도하고 클라라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품은 채 모든 감정을 침묵 속에 눌러 담아야 했던 어린 브람스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버르토크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은 그의 삶의 끝자락에 빚어진 걸작이다. 당시 그는 나치즘에 가담한 조국 헝가리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한 상태였다. 전쟁과 폭력이 남긴 상처는 그의 정신을 서서히 좀먹었고, 이윽고 백혈병이라는 육신의 고통마저 그를 찾아왔다. 그러던중 버르토크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


버르토크의 해당 곡은 보스턴 교향악단의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가 취임 20주년을 맞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버르토크에게 신작을 의뢰했다. 그는 쿠세비츠키 재단의 위촉을 받아 1943년 8월 15일부터 10월 8일 사이에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버르토크가 미국으로 망명한 지 3년 만에 탄생한, 그의 첫 대규모 걸작으로 평가된다.

(채은주, 〈Béla Bartók의 Concerto for Orchestra에 관한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음악학과, 2021.)


위촉을 한 쿠세비츠키 재단(Koussevitzky Foundation)은 미국의 러시아계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에 의해 설립되었고 당시 20세기 동시대의 작곡가들을 지원하고 새로운 관현악 작품을 위촉하고 초연하기 위한 음악 후원재단이다. 즉, 이 곡은 버르토크에게 다시 삶의 의지를 되새기게 한 작품이자, 그의 생애 마지막에 찾아온 가장 위대한 선물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예술이 어떻게 인간을 지탱하는가.

그 오래된 질문에 대한 RCO와 클라우스 메켈레의 답변이 궁금해진다.


키릴 게르스타인 (arte archive출처)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피아노 협주곡 1번 D단조 Op. 15> 키릴 게르스타인 (Kirill Gerstein)

피아니스트의 개성은 무대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에서 드러난다. 긴장으로 무대를 얼어붙게 만드는 이가 있는가 하면, 부드러운 온기로 청중을 감싸는 이도 있다. 게르스타인은 후자였다.


1악장 (Maestoso)의 도입은 단순한 서주가 아닌, 마치 하나의 세계가 깨어나는 장면처럼 들린다.
팀파니의 강렬한 타격이 대지를 울리며, 잠들어 있던 세계를 깨운다. 즉, 브람스 내면의 문이 열리는 순간처럼 느껴진다. 그 열린 틈으로 현악기들이 불안과 격정을 토해내듯 쏟아져 나온다. 불협화음으로 뒤엉킨 소란의 끝에 피아노가 등장한다. 게르스타인의 시작은 깊은 고요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브람스의 내면을 닮아있다. 첫 프레이즈(phrase)가 넘어갈 때쯤 게르스타인의 손끝에서 따뜻함이 번져 나왔다.

불안과 열정으로 뒤엉킨 '젊은 브람스'의 청춘의 서정과 서투름이 게르스타인의 연주를 통해 세월이라는 옷을 덧입혀 마치 주름이 지긋해진 브람스가 자신의 젊음을 회상하듯 했다.


2악장(Adagio) 은 브람스의 가장 내밀한 마음속 공간을 비춘다.

그는 악보 위에 라틴어 미사 구절,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를 직접 적어 넣었지만, 그 안에는 종교의 언어를 넘어 브람스 개인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회한이 함께 스며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음악 속신을 향한 기도와 인간의 사랑은 언제나 닮아 있다.

게르스타인의 2악장은 나를 현실과 꿈의 경계선으로 데려갔다. 그게 단순한 졸음이었는지, 아니면 시간이 멈춘 듯한 몰입의 상태였는지조차 헷갈렸다. 그의 연주는 청중 모두를 깊은 침잠으로 끌어당겼고, 각자의 번뇌와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며, 모두가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 순간 콘서트홀은 마치 하나의 무의식 아래 잠긴 듯했다. 그 안에서 청중들은 각자의 꿈을 꾸면서도, 같은 음악 속에 머물렀다. 이후 아타카로 3악장 피날레를 향해 곧장 달려 나간다.


달음박질친 3악장(Rondo: Allegro non troppo). 이제 더 이상 고요는 없다. 무의식과 침잠의 세계를 벗어나, 다시 세상을 향해 달려 나가는 한 인간의 강렬한 생의 의지가 느껴진다. 고통을 견뎌낸 자만이 품을 수 있는, 단단한 생명의 리듬이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당기며 마치 달궈진 금속을 담금질하듯, 끊임없이 부딪히고 반짝인다. 그 에너지는 결국 카덴차로 이어지고, 한 인간이 자신을 단련시켜 마침나 내 스스로의 운명을 쥐어 잡는 순간처럼 들린다.

게르스타인은 반주를 기다리는 독주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한 사람의 청중으로 존재했다. RCO의 음이 흘러나올 때마다 그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안에는 지휘자도, 오케스트라도, 독주자도 없었다. 오직 음악을 '함께 듣는' 사람들만 있었다.


메켈레의 지휘에는 음악에 대한 신뢰와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 게르스타인의 카덴차가 시작되자 메켈레는 지휘봉을 내리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는데, 두 손을 모아 들고, 마치 기도를 올리듯 그 연주를 들었다.

푹 숙인 그의 모습에 게르스타인에 대한 깊은 존중과 경외가 느껴졌다.

연주가 끝나자, 폭발하듯 박수가 쏟아졌고, 그 박수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 덕에 게르스타인은 여러 번 무대 안팎을 오가며 관객의 환호에 답했고 얼굴에는 감사의 미소가 서려있었다. 그리고 앙코르곡으로는 슈만의 <Blumenstück, Op.19>을 선택했다. 독일어로 꽃의 조각, 꽃다발로 번역되며 화려한 기교보다는 섬세한 감정과 따뜻한 서정성을 가진 곡으로 클라라에 대한 조용하지만 소박한 사랑이 담겨있는 곡이다. 게르스타인은 거장의 협주곡이 심어놓은 강렬한 여운 위에 한 송이의 꽃을 올려놓듯, 청중의 마음에 마지막 선물을 남겼다.

12월 예정된 그의 독주회가 더욱 기대된다. 한국 관객들의 따뜻한 환호를 품에 안고 떠난 게르스타인, 그 온기를 다시 무대 위에서 어떻게 피워낼지 궁금하다.


여운을 잠시 내려놓고, 이제 RCO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차례다. 인터미션 동안, 버르토크의 곡을 위해 각자의 악기를 점검하고 연습하는 단원들의 모습이 분주했다.


벨러 버르토크(Béla Bartók)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Concerto for Orchestra) Sz.116, BB 123>

2악장 문을 여는 솔로를 준비하는 작은북(스네어 드럼), 하프 주자들의 세심한 현 조율이 무대 위를 조용히 긴장감으로 채워나갔다. 그만큼 버르토크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은 연주자들에게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이 곡은 바로크 시대의 합주 협주곡(concerto grosso) 전통에서 유래했다.


합주 협주곡(Concerto Grosso)의 개념

'Grosso(큰)'이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하나의 독주 악기가 아니라 여러 악기의 소규모 그룹(concertion)과 그들을 받쳐주는 큰 합주단(ripieno)이 존재하고 서로 주고받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즉 독주자 vs 오케스트라의 경쟁이 아닌 하나의 유기적인 대화를 중심으로 한 협연 구조이다. 유명한 것으로는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randenburg Concertos)이 있다.


헝가리 출신인 버르토크는 민속음악 수집에 평생을 바쳤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리듬과 선율, 언어의 억양을 자신의 음악 속에 녹여냈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에는 늘 헝가리의 흙냄새와 민속적 활력이 배어 있다.

그는 교육자이자 이론자로서 음악 안에 균형과 대칭성을 탐구했고, 황금비와 피보나치수열과 같은 수학적 비율을 사용해 음악 속에 보이지 않는 구조미를 부여했다. 그렇기에 이 곡은 처음 들으면 다소 난해하게 느껴진다. 나 역시 그랬다. 처음 이 작품을 접한 것은 베를린 필하모닉과 야쿠프 흐루샤(Jakub Hrůša)의 연주였다.

귀에 남는 선율이 없고, 낯설고 복잡하게 얽힌 리듬과 음향이 처음에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각 악기군의 솔리스트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처럼 호흡하기 시작하는 순간,
비로소 이 음악의 전체적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4악장에서 들려오는 헝가리풍 선율은 잠시 귀를 쉬게 해주는 숨결 같았고, 이어지는 5악장은 다시 1악장과 대칭을 이루며 불안과 생명력이 뒤섞인 폭발적인 에너지로 귀를 사로잡았다.


1악장(Introduzione. Andante non troppo – Allegro vivace)은 한 악기군이 선율을 제시하면 다른 악기들이 차례대로 따라 들어오는 푸가(Fuga)로 시작된다.

차분한 서두는 앞으로 전개될 폭발의 에너지를 숨긴 채,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천연덕스럽게 흐른다.

그러다 그 고요함은 불꽃으로 잉태된다.


2악장(Giuoco delle coppie. Allegretto scherzando), 짝들의 놀이, 약간 빠르게 장난스럽게 혹은 짝을 이룬 악기들의 유희라는 뜻이다. 표제에서도 나타나듯, 일종의 악기들의 음색 퍼레이드와 같은 느낌을 준다. 작은북(스네어 드럼)으로 시작해, 다시 작은북으로 끝이 난다. 장난스럽고도 조심스레 들어오는 그 리듬 위로 다른 악기들이 하나둘 치고 들어오며 긴장을 쌓아 올린다. 어딘가 말러의 음향이 느껴지기도 했다.
행진곡 같으면서도 삐걱거리는 왈츠처럼 말이다. 악기들이 서로 장난을 걸듯 짧게 주고받는 유머러스한 대화 끝에 다시 작은북 혼자 남아 조용히 문을 닫는다. 버르토크의 계산된 유머와 구조적 대칭성이 다시 한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3악장은 (Elegia. Andante non troppo)는 이탈리아어로 ‘비가(悲歌)’를 뜻한다. 슬픔과 그리움, 혹은 추모의 감정을 담아내는 서정적인 악장이다. 이 음악은 버르토크가 전쟁과 나치즘에 굴복한 조국 헝가리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던 시절의 정서와 깊이 닮아 있다. 메켈레가 아티스트 토크에서 언급했듯, 이 악장에는 고국을 향한 버르토크의 향수가 담겨 있다. 그리움의 정조 속에 내면의 긴장과 회한이 교차하며, 그 모습은 어딘가 말러의 음악과도 닮아 있었다. 개인적 상실을 통해 인간 전체의 슬픔을 노래하는 방식이 닮아 있었던 것이다.


4악장 (Intermezzo interrotto)은 ‘방해받은 간주곡’이라는 이름처럼, 이 악장은 평온한 선율 속에 끊임없는 개입과 교란이 스며 있다. 5악장(Finale. Pesante – Presto) 은 그나마 귀에 편안한 민요풍 선율이 귀를 트이게 해 주지만 그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못하고 5악장 피날레를 향해 달려 나간다. 5악장 피날레(Finale)에는 메켈레의 에너지와 RCO의 사운드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금관은 빈틈없는 일체감을 이루며 완벽한 합을 보여줬고, 그 위로는 벨벳처럼 부드럽고, 융처럼 은은한 엔젤링이 깃든 RCO만의 현악사운드가 펼쳐졌다. 반짝이는 목관이 그 위를 스치고, 타악이 불꽃을 더하자 마치 정교하게 직조된 암스테르담의 건축물 한 채가 눈앞에서 완성되는 듯했다. 그 견고하고 유기적인 사운드에 나는 순간 몸을 뒤로 움찔할 만큼 압도되었다.


합창석 한가운데 앉아 있던 나는, 마치 그가 나를 향해 지휘하고 있는 듯한, 오케스트라 단원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플루트를 전공했던 탓에, 솔리스트들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릴 때 얼마나 긴장과 집중 속에 있는지 잘 안다. 그런데 메켈레는 그 순간마다 따뜻한 눈빛과 부드러운 손짓으로 그들의 긴장을 자연스럽게 풀어주었다. 그의 지휘에는 음악에 대한 신뢰와 진심이 있었다. 왜 그가 이른 나이에 그 자리에 앉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금세 알 수 있었다. 특히 그는 지휘대 위에서 손끝으로 ‘2, 1’을 표시하며 단원들에게 사인을 주는 모습, 그 세심한 제스처 하나하나에서 단원들을 향한 배려와 존중이 느껴졌다.

아티스트 토크에서 이야기한 대로, 그에게 음악은 ‘연결(communication)’이자 ‘대화(dialogue)’였다.
그 철학은 무대 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단원들과 시선을 나누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음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5악장 마지막 음이 사라지자, 터져 나오는 “브라보!" 함성과 함께 폭발적인 박수가 쏟아졌다.

앙코르곡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Éljen a Magyar! (헝가리 만세) Schnell-Polka, Op.332>.

1869년 슈트라우스 2세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하며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분위기 속에 헝가리 민족적 자긍심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곡으로, 활기찬 민속리듬과 춤곡의 정서를 담고 있다.

이는 버르토크에게 바치는 경의이자, 그가 평생 그리워했던 고향 헝가리에 대한 '음악적 귀향(歸鄕)'처럼 들린다. 끝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버르토크에게 건네는 따뜻한 음악적 인사이자 헌정이 아니었을까.

말로만 듣던 ‘왕립의 품격’, 베아트릭스 여왕이 수여한 ‘왕립(Royal)’의 이름, 그리고 지금도 네덜란드 왕비가 후원하는 오케스트라의 전통이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세월과 품위가 빚어낸 소리임을 실감했다.

클라우스 메켈레는 '젊은' 지휘자라는 말로는 설명될 수 없다. 그의 내면은 나이로 환원할 수 없는 깊이와 동료 음악가들을 향한 존중과 경외가 담겨 있었다. 그날 무대에서 내가 본 것은 "젊은 거장”(young maestro), “차세대 지휘계의 스타”(rising star in conducting)가 아닌 음악을 사랑하는 한 핀란드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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