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의 대학축전 서곡과 비극적 서곡
1880년 여름, 오스트리아 포르트슈하흐 호숫가 한 별장에서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두 서곡이 탄생한다.
하나는 <대학축전 서곡(Akademische Festouvertüre)> , 또 하나는 <비극적 서곡(Tragische Ouvertüre)>.
대학축전 서곡은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브레슬라우 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브람스가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작곡한 서곡으로, 학생가요의 선율과 특유의 지적이고 대위법적인 구성미가 느껴지는 서곡이다. 전체적으로 밝고 경쾌하며, 브람스 작품 중에서도 드물게 장난기와 유머가 살아있는 곡으로 마치 햇살이 교정 위로 와르르 쏟아지는 듯한 생동감과 대학시절로 되돌아간 것만 같은 향수도 느껴진다.
그와 반대로 제목부터 어둠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비극적 서곡이 있다. 이곡 또한 대학축전 서곡과 같은 시기에 작곡이 되었으며, 어떠한 특정한 비극적 사건이나 인물을 염두하고 작곡한 곡은 아니지만
괴테의 파우스트를 위한 부수음악을 작곡하라는 의뢰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 그리고 1872년에 출판된 니체의 작품을 브람스가 읽고 인간 삶에 대한 비극을 음악으로 옮기지 않았을까라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참고: Indianapolis symphony orhcestra 인디애나폴리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2016., 마리안 윌리엄스 토비아스).
또 브람스는 그 당시에 개인적으로 슬픈 일들이 겹쳐졌다고 한다. 클라라 슈만의 아들 펠릭스의 죽음과 포이어바흐의 사망, 또 오랜 친구 요아힘과의 관계악화 등이 겹치면서 브람스 개인에게도 우울한 감정들의 잔재가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이 작품은 어떤 프로그램적 서사보다는, 인간 내면에 깃든 인류보편적인 비극의 감정을 담아낸 음악적 수기로 접근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개인의 슬픔보다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마주하는 근원적인 고독함과 숙명의 기록처럼 말이다.
나는 전자의 서곡보다는 후자의 것을 더 좋아한다. 어째서인지 밝은 조성의 곡보다는 단조의 서늘하고도 우울한 곡들을 사랑한다. 나뿐 아니라 주위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대부분 동조하는 듯하다. 우리는 왜 늘 비극에 더 끌릴까? 고대 그리스 비극이 수천 년이 지나도록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멀리 볼 필요 없이 드라마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죽을병에 걸린 주인공과 이루어질 수 없는 세기의 사랑처럼 말이다.
'브람스의 대학축전 서곡보다 비극적 서곡이 끌리는 이유는 왜일까?'라는 질문에서 점차 나는 '인간은 왜 비극에 끌릴까?'라는 더 근원적인 물음으로 옮겨갔다.
기쁨과 행복이라는 감정은 도취시켜 그 순간이 영원할 것만 같은 환상을 준다.
하지만 슬픔에 빠진 인간은 그 속에서 비로소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슬픔은 인간을 외부 세계로부터 분리시켜, 나만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내면의 호수로 깊이 침잠하게 만든다.
비극적인 감정을 마주한다는 것은 자기 내면의 가장 깊은 핵을 만날 수 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감정에서 더 나아가 비극적 예술은 우리가 실제로 겪지 않은 고통조차 공감의 힘으로 전이시켜, 그 시간들을 살아가게 만든다. 비극을 담은 예술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우리는 어느새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절망과 고독을 살아가게 된다. 브람스의 <비극적 서곡> 이 나에게 주는 감동 역시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비극적 선율을 강인하고 견고한 브람스만의 형식미로 감싸 안아, 오히려 고요한 품격으로 슬픔조차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듯하다. 어쩌면 나는 이 곡을 통해 비극경험하지만 종국에는 이겨내는 인간의 존엄을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베를린 필의 연주를 추천한다!
비극적 선율을 우아하게 표현하면서도 브람스의 굵직한 느낌을 아주 잘 살리는 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