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와 나

말러리안의 단상

by 여자말러리안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묻고 싶다.

이걸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설명할 수 없는 막연한 확신말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혹은 예술이든,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결국 이걸 사랑하게 될 것이다' 혹은 '이것과 진하게 엮이게 될 것 같아'라는 이상한 예감이 스며들 때가 있지 않은가?

선택의 영역이 아닌 운명처럼 다가오는 무력함말이다.


내게도 그런 존재가 있는데 그건 바로 말러의 음악이다.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넘어가는 무렵, 당시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이것저것 들어보던 찰나에, 우연히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을 듣게 되었다. '부활'이라는 강렬한 제목을 가진 교향곡이라니 어찌 들어보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당시 인트로를 듣고 크나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지러운 선율들과 오케스트레이션에, 그 당시까지만 해도 베토벤, 모차르트와 같은 음악들만 듣던 나에게 부활이라는 이름에 어마무시한 곡의 인트로에 놀라서 '이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꺼버렸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불호가 아닌, 지금 내가 들을 수 있는 곡은 아니지만, 훗날 내가 이걸 좋아하게 날이 오겠구나, 이 음악을 조금 더 준비가 되었을 때 제대로 들어보고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

언젠가 조금 더 준비가 된 내가, 이 거대한 음악을 다시 마주하게 되리라는 막연한 확신말이다.


그렇게 10년이 지났을까. 나는 결국 말러리안이 되었다.

말러를 이해하기 위해선 아직 더 많은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무언가를 ‘이해했다’는 것은 얼마나 숭고하고, 동시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건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일처럼 끝이 없고, 어쩌면 우리가 ‘이해했다’고 믿는 순간조차 사막 위의 오아시스처럼 덧없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나는 스스로를 말러리안이라 부르지만, 그의 음악의 절반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사랑 또한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이해하려 애쓴다는 것이고,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일은 억겁의 시간과 내적 수련을 쏟아도 여전히 닿기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이해하려 애쓰는 우리의 가련한 모습과 과정 자체가 사랑의 본질이 아닐까.


말러의 교향곡을 듣고 있으면 우리의 인생과 닮아있음을 느낀다. 물론 모든 그의 교향곡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음악에는 어딘가 어둡고, 어지러운 세상사와 감정들의 복잡함이 녹아있다.

삶의 이러함과 저러함을 모두 품고, 인간 존재의 부조리를 음악 안에 담아낸 듯하다.

매일 아침 고통스럽게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의 모습, 사랑싸움을 하는 연인들의 모습, 혹은 세상에 상처받고도 묵묵히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모든 정경들이 말러의 음악에는 있다.

마치 '인생은 원래 그런 법이야. 그래도, 살아가야 하지 않겠니?'라는 우아한 위로처럼 들리기도 한다.

쇼펜하우어를 사랑했던 말러답게, 그의 음악에는 염세가 스며있지만, 언제나 구원의 빛이 있다.

끝없는 절망과 심연 속에 시작된 음악은 결국 다시 일어서는 인간의 의지와 구원으로 마무리된다.

말러의 음악은 대게 슬픔과 고통으로 시작해, 결국 삶으로 끝난다.


나는 특히 말러 교향곡 제5번을 출퇴근 시간에 자주 듣는다.
길이도 길고, 감정의 폭도 넓은 이 음악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기에 묘하게 어울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러의 음악들은 길이가 길기 때문에, 음악이 끝날 때쯤 나는 직장에 도착해 있다. 출퇴근에 3시간 넘게 걸리는 필자)


무겁게 길을 나서는 아침, 아직 잠이 덜 깬 도시와 나의 절망적인 마음은 1악장의 장송 행진과 맞닿아 있다.

그 음울하고 장대한 서두 속에서 나는 스스로의 피로와 출근하기 싫은 못된 마음과 싸운다.

지하철의 혼잡함과 복잡한 생각들이 뒤섞이는 시간은 2악장의 혼란스러운 리듬과 겹친다.

나는 2악장을 가장 좋아한다. 1악장의 허무한 피치카토로 끝이 난 뒤, 2악장의 어지러운 선율들을 사랑한다.


그러다 어느새 3악장에 이르면, 길 위의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을 느낀다.

그리고 마침내 4악장, 아다지에토. 이 느리고 따스한 사랑의 세레나데는 출근길의 끝이 다가왔음을 예견한다.
고통과 혼란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그 음악은 마치 “이 하루도 잘 버텨낼 수 있을 거야”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이 순간이 오면 나는 안다. 직장에 거의 다 왔다는 징조이자, 오늘도 다시 하루가 시작된다는 신호라는 것을.

알마에 대한 사랑을 거쳐, 마지막 악장에는 삶의 환희로 변모하는 말러의, 아니 인간의 여정을 그린다.

절망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이어지고, 결국 삶으로 귀결되는 이 음악을,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쩌면 10년 전, 나는 그때는 몰랐지만, 삶이란 본디 고통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0대 초반의 나는 알베르 카뮈나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 문학을 좋아했다. 그들의 문장 속에서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부조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만났다.
어쩌면 나는 그때부터 이미, <시지프 신화> 속, 낭떠러지로 계속 떨어지는 돌을 밀어 올리는 인간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삶의 부조리를 느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말러의 음악이 내 마음에 들어온 것은 어쩌면 운명, 필연이었다. 아직 느껴본 적은 없지만, 마치 기혼자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나, 이 사람과 결혼할 것 같아’ 와 같은 감정.


이상하게 끌리고,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 마음 한구석에 샘솟는 그런 존재가 여러분들에게도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무리한다.


도이치 그라모폰사의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베를린필하모닉의 말러 5번 연주를 추천한다. 긴 길이의 곡임에도 긴장과 이완 유려한 음악표현과 섬세한 프레이징이 전혀 지루하지 않고 말러 5번의 입문 연주로 추천하는 바이다.

5번이 어렵고 4악장 아다지에토만으로 먼저 느껴보고 싶다면 아바도의 스승인 한스 스와로브스키와 비엔나 심포니의 연주의 아다지에토를 들어보기를 추천한다. 나에게 이 연주는 다른 아다지에토보다 우아하게 느껴지며 무엇보다 풍성한 사랑의 감정을 담고 있다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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