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의 사계 중 <12월>, <1월>
곧 연말이 다가온다.
그 말은 즉, 크리스마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참 특별하게 다가오는데, 이 다섯 글자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고 낭만적이다.
새해가 오기 전, 한 해를 정리하고 돌아보는 작은 유예기간 같기도 하고, 잠시 숨을 고를 수 있게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 쉼표를 적어주는 듯하기 때문이 아닐까. 또 연말 분위기를 내는 데에는 캐롤 만 한 것이 없다. 공기가 조금만 차가워져도 사람들은 캐롤 부터 찾는다. 그래서 그런지 캐롤은 11월부터 미리 듣는 게 '국룰'처럼 되어버렸다. 오늘 나만의 캐롤, 클래식계의 캐롤을 소개하려 한다. 바로 차이콥스키의 사계(The Seasons), Op. 37a 중
<12월: 크리스마스(December: Christmas)>와 <1월: 난롯가에서(January: At the Fireside>다.
서양 음악에서 계절을, 더는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은 조금씩 달라져왔다.
고대와 중세에는 자연이 신비로운, 신적인 존재였다면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며 자연은 인간의 감정과 연결되었고 특히 18세기에는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이념으로 비발디, 하이든 같은 작곡가들이 자연을 주제로 작곡하게 된다. 19세기가 되면서 자연은 더 이상한 단순한 풍경이 아닌, 인간의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 즉 정서의 배경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차이코프스키의 사계는 이러한 시선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는 작품으로, 열두 달의 풍경 속에 계절의 변화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는 인간의 감정까지 민감하게 포착해 낸다.
작곡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러시아의 대표적 작곡가인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는 시골 광산촌에서, 광산에서 일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게 된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차이코프스키 역시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를 원했기에 법률학교에 진학하다 후에 법무부에서 근무를 하였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잠재울 수 없어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된다.
사계 op.37a는 1년 12개월을 그 달에 맞는 시를 선택하여 그 시의 성격을 음으로 나타낸 것이다. 짧은 곡으로,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고 환상적으로 소박하고 감성적으로 작곡되어, 차이코프스키가 슈만으로부터 강렬한 영향을 받았음을 말해준다. 1875년 12월, 페테르부르크에서 N. 베르나르드라는 사람에 의한 음악잡지 <누우벨리스트>가 발간되었는데, 매월 1곡씩 그 달에 어울리는 시를 선택하여, 이를 묘사하는 피아노 소품을 발표한 곡이다. 12곡은 자연의 모습 묘사뿐만 아니라, 자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자연을 묘사한 곡, 자연에 비친 마음까지 그려내고 있다.
[참고] Tchaikovsky의 피아노 작품 <The Seasons op.37a>에 관한 분석 연구 (2010년 2월) 신라대학교 대학원 음악학과 윤은정
사계절을 다룬 작품들은 많지만, 차이코프스키의 사계는 비발디나 하이든의 그것과는 다른 특별함이 있다.
비발디의 사계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외부 세계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의 사계는 변화하는 계절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비춘다. 예를 들어 겨울의 차가운 공기나 눈보다는 그 계절이 자아내는 따뜻함, 고독, 회상과 같은 정서들이 먼저 떠오른다.
December: Christmas
12월: 크리스마스
러시아의 겨울은 유난히 길고 혹독하다.
하지만 그런 차이코프스키라도 크리스마스라는 존재는 그에게도 특별하고 유독 따뜻함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곡은 가벼운 왈츠로 시작한다. 눈발이 성근 조명을 따라 흩날리고, 두꺼운 목도리를 둘둘 두른 사람들이 모인 시장 골목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성탄'의 설렘을 품고 러시아 특유의 정서, 슬라브적 색채가 느껴지기도 한다. 12월은 주코프스키에 의한 시에 의해 쓰였다고 한다. 이 곡의 구조는 크게 A-B-연결구-A-Coda로, 초반부에는 2도씩 천천히 상승하는 우아한 선율과 그 뒤에 장난스러운 하행선율의 대조가 재미지다. 곡의 마무리 부분을 뜻하는 코다(coda)에서는 맨 처음 등장했던 멜로디를 다시금 등장시키고 피아노(p)로 차분하게 마무리하는데, 이는 환한 조명들이 꺼지고,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그리듯 차분하게 마무리된다. 섬세하고 내향적인 차이코프스키에게 기쁨 뒤 찾아오는 쓸쓸함과 공허함은 누구보다 익숙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January: By the Fireside
1월: 난롯가에서
날씨가 추워지면 이상하게 집이 더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에게라면, 단연 이 곡을 추천하고 싶다.
내향인들은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원래 밖을 좋아하던 나조차도 요즘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귤을 까먹는 겨울이 더 반갑다. 흥미롭게도 비발디와 차이코프스키도 같은 생각이었던 같다. 비발디 역시 겨울 2악장에 난롯가에 앉아있는 모습을 그렸고, 차이코프스키 역시 마찬가지이다. 1월은 푸슈킨(Pushkin)의 시에 의한 곡이다. 구조는 A-B-A-Coda로 역시 단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으로 이어지는 명확한 형식미를 이어받은 듯한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차이코프스키는 그 당시 발라키레프와 같은 국민악파와 달리 정규 유럽식 음악교육을 받은 작곡가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Coda(코다)로 마무리되는 구성은 고전주의 형식 교육을 받은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첫 시작은 매서운 추위인 밖과 다르게 따뜻하고 안락한 분위기의 난롯가 앞의 모습을 묘사하며 시작된다.
Moderato semplice ma espressivo로 고요하게 열리는데,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음형진행은 마치 난롯불이 ’ 타닥타닥‘ 규칙적으로,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타오르는 모습을 묘사하는 듯하다.
이어지는 화성에서는 차이코프스키 특유의 섬세한 화성사용이 나타나는데, 원래라면 더 강한 긴장감을 향해 나아갈 법한 자리에, 예상치 못한 전개로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게 만든다. 이는 마치 난롯불이 활활 타오르다가도 물을 한 줌 끼얹은 듯 , 잔잔하게 가라앉는다. 그다음은 Meno mosso(보다 느리게), leggierissimo로, 하행하는 아르페지오는 난롯불 앞에서 하염없이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과 닮아있다. 혹은 서리 낀 창문에서 물방울 하나가 또르르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도 든다.
"작년 나는 어떤 해를 보냈으며, 올해는 어떤 해를 보내게 될까?"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는 음악,
<1월:난롯가에서>는 바로 그런 종류의 음악이다.
연말은 설렘과 쓸쓸함, 반짝임과 고요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계절이다.
누군가에게는 반짝이는 트리처럼 설레는 시간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화려한 거리의 불빛도, 고요한 난롯가의 시간도 모두 겨울의 모습이다.
각자의 크리스마스 혹은 연말은 어떤 모습인가?
어떠한 모습이든, 그것 또한 겨울이다.
나는 아쉬케나지(Vladimir Ashkenazy)의 연주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의 굵직하고 단단한 터치가 차이코프스키의 농밀한 정서를 자연스럽게 끌어올린다. 아쉬케나지의 음악은 감정이 단계적으로 깊어지는 과정을 탁월하게 조율한다. 미세한 정서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쌓아 올리고 결국에는 하나의 점으로 응집하여 이끌어내는데, 그렇기에 아쉬케나지의 해석은 그래서 언제나 믿음직하다. 그의 차이코프스키를 듣고 있으면, 마치 한 해의 계절들을 온전히 살아낸 듯한 녹진한 감정의 잔해들이 부유하듯 여운을 쉽게 걷어 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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