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실혼과 재정의된 관계

by 라온재


미국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혼인이라는 제도가 가족의 기본 단위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 사회는 다양한 삶의 방식과 가족 형태를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변모해왔다. 특히 황혼기 이후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전통적 결혼 대신 사실혼 또는 계약 동거 형태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결혼을 꺼리는 수준이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를 재정의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제도적인 유연함과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있다. 미국의 많은 주에서는 법적으로 혼인하지 않았더라도 일정 기간 함께 살고 공동의 삶을 영위한 커플을 common-law marriage(사실혼)로 인정해준다. 물론 이 제도는 주마다 다르게 적용되며, 일부 주에서는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폐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법이 아닌 사회적 인식과 실천이 사람들의 관계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년기에 접어든 미국인들 중 많은 이들은 더 이상 법적 결혼을 통해 관계를 묶지 않는다. 이들은 배우자 사망, 이혼, 또는 평생 미혼 등의 이유로 새로운 동반자를 찾는 경우가 많지만, 재혼보다는 파트너십이나 동반자 관계로 남기를 선호한다. 이유는 다양하다. 재혼할 경우 전 배우자와의 연금이나 사회보장 혜택이 끊길 수 있고, 자녀들과의 상속 문제나 가족 갈등도 불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서류상 부부가 되지 않더라도 서로를 인생의 동반자로 받아들이고, 정서적 지지와 실질적인 삶의 협력을 나눈다. 어떤 커플은 공동으로 생활비를 분담하고, 서로의 건강을 챙기며, 일상 속에서 동반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서로를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과 제도가 규정짓는 관계가 아닌, 서로의 동의와 존중 위에 쌓은 관계라는 점에서 오히려 더 견고해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혼 관계를 실질적으로 지지하는 한 가지 방법은 바로 파트너십 계약서(partnership agreement)이다. 이는 공동 생활의 조건, 비용 분담, 의료 결정, 사망 시 권리 등을 미리 합의하고 문서화한 것으로, 법적 보호를 보완해준다. 미국에서는 이런 문서를 전문적으로 작성해주는 변호사도 많고, 노년 동거를 위한 샘플 계약서도 다양하게 제공된다.


또한, Advance Healthcare Directive(의료 지시서)나 Durable Power of Attorney(대리권 위임장) 등의 문서를 통해, 비혼 관계에서도 병원 치료나 위급 상황에서의 법적 권한을 부여할 수 있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하지 않더라도, 계약과 서류를 통해 사실상 가족과 같은 권리와 의무를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법률과 제도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유를 실현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미국 사회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황혼의 계약 동거는 이러한 철학의 실천 중 하나다. 함께 살되, 각자의 삶을 존중하며, 미래의 가능성을 계약으로 조율하는 삶. 그것은 미국 사회가 점점 더 인정하고 존중하는 새로운 가족의 형태다.




keyword
이전 15화사생활의 존중과 갈등의 최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