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세 번째날은 '이제 나도 좀 안다'는 자신감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틀 정도 돌아다녀 보니 어떻게 지하철을 타야 맨하탄으로 나갈 수 있는지, 주변 카페는 어디가 맛있는지를 알고, 실체없는 두려움 없이 지하철을 탈 수 있게 되자 현지인이라도 된 양 의기양양해졌다. 그 의기양양한 아침은 또 다른 로망이었던 센트럴 파크에서의 아침 러닝으로 이어졌다. 거대한 도시에서 유일하게 조용한 시간인 이른 아침, 맑은 공기를 들이쉬고 싶었다. 게다가 러닝이라니! 정말 뉴욕에 사는 사람이나 아침 일찍부터 뜀박질을 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곤히 자고 있을 때, 따뜻하면서도 가볍게 입고 길을 나섰다. 전날 미리 찾아둔 센트럴 파크 러닝 코스로 향하는 길, 짐을 맡길 수 있는 곳을 찾아냈다. 내 마음 속 미국은 아직도 미지와 무질서, 혼돈의 나라였기에, 공원 한 구석에 가방이며 겉옷을 내버려두고 머리 잘린 닭처럼 뛰어다닐 수는 없었다.
인터넷으로 찾은 그곳은 웬 세탁소였다. 약간의 돈을 내고 옷과 가방을 맡기는 나를 보며 주인 아저씨는 약간은 의아한 기색이었다. 나중에 보니 이런 서비스는 거대한 캐리어 등을 아침부터 오후까지 맡기는 게 대부분이기에, 딱 1시간 뒤려고 가방과 코트를 맡기는 내가 조금은 궁금했을지도. 또, 막상 공원에 가보니 정말 아무도 없어서, 모르긴 몰라도 뭐든 그냥 어딘가 풀숲에 던져뒀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센트럴 파크에 갔다. 가는 길에는 브로드웨이 표지판을 마주치고 점점 들뜨기 시작했다. 브로드웨이가 뉴욕에서 유일하게 대각선으로 난 길이라고 한다! 하긴 돌아다닐 때 어쩜 이렇게 '블록'으로 도시가 짜여졌지! 하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뭔가 예술과 공연을 표상하는 길이 도시의 유일한 대각선 길이라는게 의미있게 다가왔다. 딱딱한 대도시에서 제도에 순응하기보다 개성과 예술을 추구하는 것만 같아서.
내가 러닝을 한 곳은 재클린 케네디 레저보이어였다. 한 바퀴를 도니 딱 2.5키로정도 되는 적당한 호수였고, 푸른 호수와 주변 나무가 어우러져 경관도 예쁠 터였다. 그렇지만 세상 일은 언제나 나의 기대를 저버린다고 했던가. 물을 검은색에 가까웠고, 하늘도 짙은 회색에 가까운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기대했던 수목은 전혀 싱싱하지도, 푸르지도 않았다.
그렇다.
이렇게 생긴 칙칙한 호수를 뛰었던 것이다.
이제보니 나름의 쌀쌀하고 축축한 뉴욕의 겨울 감성이 가득하기는 하다. 안개도 조금 끼고, 살짝 추워보이는 것이 세계 최대의 도시이자 모두가 걸음을 서두르는 그곳의 광경으로 적절해 보인다. 바쁜 도시인이 된 기분이 나쁘진 않았을지도. 그치만 내가 생각한 센트럴 파크 러닝과는 거리가 멀었다.
겨울이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조금 걸어 조금 더 센트럴 파크스러운 곳으로 더 깊이 들어가니 잔디가 아주 푸르고 싱싱하게 나를 놀리고 있었다.
이걸 보면 한겨울에도 센트럴 파크의 잔디가 크게 나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게 바로 내가 기대했던 센트럴 파크 러닝이었다.
만약 겨울에 센트럴 파크를 찾아 조깅을 할 예정이라면, 회색으로 빛나는 칙칙한 호수는 거들떠도 보지 말고 잔디 사이를 누비기를. 그렇지만 러닝은 즐거웠다. 현지인들은 모두 파란 잔디를 밟으며 뜀바질을 하는 모양인지, 나와 함께 뛰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현지인 사이에 끼어 있는 기분을 만끽할 수도 없었고, 날씨는 꾸물거렸으며 슬슬 배가 고파졌지만. 그렇지만 재밌었다. 2% 모자란 현지인 감성을 행복하게 만끽했다.
살짝 가벼워진 몸과 붓기 빠진 얼굴로 짐을 찾아 더 맷을 찾아가는 길, 그 유명한 스트랜드 서점을 자만추했다. 뉴욕 필수 코스로 꼽히는 도서관이지만, 특히나 연말 뉴욕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스트랜드 서점에 꼭 가보기를 추천한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너무 예쁘고, 내부도 연말 분위기가 잔뜩 나게 꾸며져 있었다. 밖에서 쇼윈도만 봐도 크리스마스 액자 같은 느낌이 난다.
이런 크리스마스 맞춤 도서도 물론 큐레이팅 되어 있다. 뉴욕 크리스마스 여행 기념품이나 선물을 사기에도 제격이다. 같이 여행 간 사람과 책 선물을 교환해도 좋고, 여행 동안 읽을 책을 한 권 사는 것도 좋아 보인다.
항상 여행 동안 읽을 책을 한 권 사서 여행의 시작과 끝이 책의 그것과 함께 하는 낭만을 그려왔는데, 성공한 적이 없었다. 다음에 미국에 가게 될 일이 있다면 꼭 영어 원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 오고야 말테다. 비행만 15시간이 넘는데, 공항~비행기~여행지에서 조금씩 읽으면 되지 않을까? 여행지가 배경이 되는 책을 읽으면 참 재밌을거 같다.
러닝과 책 구경으로 비운 배는 The Met 앞에 있는 노점상에서 핫도그를 사먹으며 달랬다. 그렇지만 절대, 박물관 앞 푸드트럭에서 무언가를 사먹어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정말 안 된다. 거지발싸개같은 음식 나부랭이를 먹으면서 제대로 된 식당에서 한 끼하는 그런 가격을 내야하니 말이다. 박물관을 나와서도 급한 마음에 다음 목적지로 가기 전에 입에 급하게 넣을 음식을 샀었다. 아무리 그래도 감자와 치킨 나부랭이에 29달러는 말이 안 되는 거다.
아무튼 핫도그는 나쁘지 않았지만 음.. 편의점에서 호스티스 트윙키나 먹었어도 나쁘지 않았을거다 (는 찐득한 합성맛 주제에 6천원) 미국은 슈퍼마켓이 아니면 음식이 다 비싸서 참 뭘 사먹기가 어렵더라. 언제나 간식을 싸서 다니기. 내가 미국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이다. ㅋㅋㅋ
아무튼 말로만 듣던 그 멧 갈라의 현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는 그 박물관에 가니 좋았다. 어떤 중국인 커플이 박물관 정문을 배경으로 화보를 찍어댔다. (박물관 계단에 거의 앉아있는 사람과 집요하리만치 다양한 각도로 사진을 수백장 찍어대는 그 애인을 봤다는 뜻이다.) 유럽 관광객들은 그들을 흉내내며 즐거워했고, 그 커플에게서 비롯된 피로감은 시니컬하고 고약한 유머감각을 가진 관광객들의 재롱으로 인한 불편함에 가려졌다.
그치만 도시가 큰 만큼 많은 사람이 있는걸 어째. 눈을 질끈 감고 지나쳐야 한다.
내가 가본 미술관/박물관 중에 가장 큰 규모였던 매트로폴리탄에서 본 작품들은 따로 글을 써서 그때의 감흥을 되살려 보려고 한다. 간단하게 좋았던 것 몇 개만 넣어보자면
물의 질감을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했을까? 당장이라도 물 비린내가 나고 수면을 일렁이게 한 바람이 내 귓가를 스칠 것만 같다.
역시 고흐의 작품은 마음에 깊이 와닿는 무언가가 있다. 화가의 손길이 그대로 느껴지는 이 작품에 마음이 울렁이는 건 잔뜩 올라간 곡선들의 침범일까. 잔뜩 엉킨 선들은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나무의 생동감의 원천이다.
내 혼란과 엉킨 일상들도 종래에는 예쁘게 어우러져 한 그루의 나무로 자라났으면.
옷감의 광택을 어떰게 이렇게 표현했는지. 손을 대면 주르륵 미끄러질 것만 같은 실크가 정말 생생했다.
기념품 샵이 많아서 고민하다가 결국 엽서랑 마그넷만 샀는데, 이 키링이 1년 뒤에도 아른거렸다. 드가 특별전이라 있었던 키링 같은데 참 예뻤다. 아 사올껄. 기념품에는 돈을 아끼지 말껄.
다시 사려고 퇴장 직후에 급히 올라갔었지만 이 기념품 샵을 다시 찾지 못해서 결국 포기해야만 했다.
좋았던 작품이 참 많았는데, 크리스마스 뉴욕 여행 특별편으로 첨부해서 자세한 글을 써보도록 하겠다. 지금까지도 내 영혼의 양식이 되어주는 미술관이라서, 너무너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매트로폴리탄에 가는 사람에게 하고싶은 단 한 가지 말
= 미술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면 무조건 오전~저녁 전까지는 스케줄을 비워두길!! 생각보다 정말 크다.
그리고 일행과 덤보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와서 급하게 지하철을 타러 갔다. 가는 길에 너무 배가 고파서 트럭에서 감자튀김과 치킨을 주문했다. 가격표도 없던 그 트럭에서 내 카드를 가져가서 긁은 금액은 바로 29불. (미친것)
그러고 받은 이건 과한 양의 제대로 튀기지도 않은 감자튀김과 풀무원은 무슨 대량급식에서도 안 쓸거 같은 쓰레기같은 치킨너겟이었다. 결국 다 못 먹고 쓰레기통행이었다. 절대, 절대 매트로폴리탄 앞 푸드트럭에서 음식을 사먹지 마세요.
아마 근처에 할랄가이즈가 있을텐데, 차라리 그곳으로..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덤보는 사람으로 넘쳐났다. 평소에는 이정도가 아니라고 하는데, 연말 뉴욕은 확실히 사람이 많은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덤보의 꽃은 맨해튼 브릿지 사이로 보이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라고 하는데, 이 날은 날이 흐려서 그런지 아주 희미하게만 볼 수 있었다.
양쪽의 붉은 건물, 클래식한 양식으로 지어진 다리, 좁은 골목과 !뉴욕 분위기!가 합쳐져서 참 멋졌다. 왜 명소가 되었는지 단박에 이해됐다. 시간이 없어서 많이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브루클린 지역은 핫한 소품샵과 카페들로 가득하니까 꼭 둘러봐야 한다. 매트로폴리탄과 브루클린을 하루에 넣으면 안 되다는 뜻이다.
다음에 뉴욕에 가게 되면 브루클린에 숙소를 잡고 잔뜩 돌아다니고 싶다. 그만큼 맨해튼 시내의 딱딱함과 분주함 대신 아기자기함과 무드가 넘치는 곳이다.
바쁘게 이동했던 이유는 바로 브루클린 브릿지!
여기를 꼭 걸어서 건너봐야 했기 때문이다. 브루클린 브릿지를 건너면 브루클린에서 맨해튼 시내 쪽으로 건너갈 수 있는데, 다리에서 보는 시내가 정말 예쁘다! 그래서인지 사람이 정말정말 많았는데, 같이 간 언니 피셜 여름에는 이렇게 많지 않았고, 연말이라서 그런거 같다고 했다. 역시 연말에는 어딜 가나 사람이 많은가보다.
안개가 살짝 껴서 더더 예뻤던 시내 모습.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하나 둘 켜지는 불빛들이 정말 예뻤다.
대도시의 한복판에 있단걸 실감케 해주는 광경이었다.
해질녘에 브루클린 브릿지에 올라가면 좋은 점: 야경까지 보고 올 수 있다.
아경이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반짝반짝했다. 이게 대도시지!! 도시코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브루클린 브릿지에서 야경을 봐야한다. 어지간한 전망대 그 이상으로 아름답고,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더해져서 정말 행복해진다.
저녁은 이탈리안!
뭔가 기념일이나 연말 모임에는 이탈리안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식당도 괜히 아늑하고 촛불이 있을 것만 같다. 술은 잘 안 마시지만 와인 한 잔 곁들이게 될 것만 같고, 또 그게 연말의 맛을 살려주는 기분(?)
분명 영어같은 걸 보고 있는데 뭔지 알 수가 없어서 약간 당황했다. 서버분들도 억양이 강해서 아, 여기 찐 이탈리안 레스토랑이구나! 하고 즐거웠다.
@Briciola
트러플 뇨끼, 뽈뽀, 봉골레 파스타, 풍기 파스타를 주문했다. 문어가 정말 보들보들했고, 뇨끼도 트러플 향이 듬뿍 나서 맛있었다. 풍기가 정말 맛있었던 기억. 봉골레도 정석의 맛이었다.
여기는 특이하게 긴 공유 테이블에 앉는 구조였는데, 그래서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한가득 테이블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편하지 않고 더 연말의 화기애애함과 풍성함이 느껴졌다.
이제보니 한 병 통채로 올라간 올리브 오일과 발사믹에서 정말 찐 이탈리안 식당이었다는게 다시 느껴진다.
후식은 계획에 없었고,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고 있는 우리였지만 예약해둔 재즈클럽이 1시간 넘게 남아서 티라미수를 주문했다.
별 기대 없이 시킨 티라미수였고, 코코아 파우더를 보아하니 지금 만든 건 아니었다. (사실 숙성된게 더 조화로운 맛이 난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한 입 먹었는데, 정말 맛난 클래식한 티라미수맛 그 자체가 아닌가!
눈이 번쩍 뜨이는 새로운 맛이 나는 식당은 아니었지만, 믿고 먹을 정석의 맛이었다. 뉴욕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추천!
개인적으로 연말 라이브 재즈바는 낭만의 극치라고 생각한다. 여기 오기 얼마 전에 오스틴에서 피터스 라는 라이브 재즈바에 갔는데 정말, 정말 행복했던 기억이 있어서 기대를 아주 많이 하고 갔다. 더군다나 그곳에서 해준게 시나트라 뉴욕 시리즈였어서 뉴욕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더더 커진 것도 있다.
제 시간에 도착했지만 앞에서 줄을 서서 약간 기다려야 했다. 여기는 학생 요금으로 저렴한 가격에 (사실 그래도 비쌌다.) 자리를 예약했다. 테이블은 없었고, 무대에서 가장 먼 바에 앉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들뜨는 일이었다.
빌딩의 꼭대기에 있는 재즈 클럽에서! 연말에 라이브 재즈 공연을 듣다니! 심지어 콰르텟도 아니고 완전 풀세트 공연이었다. (그치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 취향은 콰르텟..)
자릿세를 내긴 했지만 술을 꼭 시켜야 해서 제일 저렴한 와인을 골랐다. 어차피 뭐든 크게 마실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원래는 21달러의 음식을 시켜야 하는게 규칙이지만, 우리는 학생이라서 안 그래도 됐다! 왜냐면 밖에서 먹고 오는게 훨씬 저렴하고,, 여기는 이미 비싸고,, 내 지갑은 한없이 얇았다.
저렴한 와인으로 분위기를 냈지만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오늘 연주한 재즈는 뭔가 내가 익숙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어서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코앞에서 연주되는 음악이 참 좋았다.
창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빌딩 숲도, 크리스마스라고 걸어둔 장식도, 잔뜩 행복해하는 사람들도 모두 좋았다. 작은 바 자리 높은 의자에 앉아 내 발은 땅에 닿지도 않았지만, 대롱거리는 발과 수십층 아래에 있을 지면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내 마음은 들떠있었다.
이렇게 보낸 뉴욕에서의 셋째 날은 참 낭만으로 가득했다. 어딜 가나 사람에 치였고, 관광객이 참 많은 이 도시에서 나만의 장소를 찾은 것도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이 거쳐간 장소들을 답습하는 것만으로도 참 꽉찬 하루였다. 뉴욕은 언제고 참 멋진 도시겠지만, 연말에서 오는 그 흥청한 분위기와 답지않게 따스한 분위기가 참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