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처음에 만나는 벌레
‘프롤로그’는 원래 희곡에서 극이 시작되기 전, 배우나 해설자가 등장해 관객에게 배경이나 주제를 설명하던 부분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이 낱말을 모든 시작의 이름으로 붙이기 시작했다.
‘들어가는 말’이나 ‘서두’라는 순우리말이 있음에도, 사람들은 굳이 프롤로그라 부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더 있어 보이니까.
내용보다 형식이, 진심보다 외관이 우선되는 시대.
프롤로그조차, 허세를 감춘 장식이 되어버렸다.
이 글은 그 ‘프롤로그’라는 허울을 걷어내기 위한,
첫 번째 프롤버그다.
인간의 망막 구조는 대표적인 생물학적 클루지(Kludge) 즉 인간 버그 중 하나다.
진화의 산물이지, 설계의 걸작은 아니야.
“인간의 망막은 구조적으로 ‘거꾸로’ 되어 있다.
빛을 받아들이는 수용체(광수용 세포)가 앞에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망막의 뒤편에 숨겨져 있다고 한다.
그 앞에는 신경섬유와 혈관들이 층층이 놓여 있어, 빛은 우선 이 '방해물'을 통과해야만 수용체에 도달할 수 있다.
왜 이렇게 비효율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을까?
그것은 완벽한 설계가 아닌, 진화의 누더기적 땜질 곧 '클루지'의 결과다.
이게 진화라고?
이 구조는 인간의 시각적 한계를 상징한다
우리는 명백한 오류를 ‘원래 그런 것’이라 여기고 살아가며, 고도로 진화한 인간의 생물학조차도, 오류 위에 적응한 기생물 인 셈이 된다.
우린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때론 멀쩡한 인간의 껍데기 안에
시대착오적인 본능, 비틀린 의도,
지독한 무지와 무감각이 버젓이 살아있는 건 왜지?
그건 유전자의 문제일까, 사회의 산물일까.
아니면, 둘 다를 끌어안고도 살아남은
역설적인 생존의 결과일까, 아니면 장난꾸러기 신의 괴팍한 시험일까.
사람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다.
그저 '적응된 오류'로 굴러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 오류,
그게 바로 인간충이다.
세상이 급변하고 AI가 글을 쓰며(심지어 AI는 심각한 실수를 밥 먹듯 하면서도, 인정을 안 하며 아닌 척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DNA를 편집하고, 화성 이주를 논하더라도
욕망의 불휘 깊은 근저는 변하지 않는다.
지배하고 싶고, 우월하고 싶고,
남보다 위에 서고 싶은 그 본능.
그게 뇌 깊은 곳에 엉겨 붙어
논리와 윤리, 이성을 무력화시킨다.
그래서 인간은, 때로 기생충처럼
타인의 시간, 에너지, 감정을 빨아먹는다.
그래놓고 자신을 피의자의 "의"자만 바꾼 체 “피해자”라 부른다.
‘클루지’라는 말이 있었고 책도 있다.
처음엔 어설픈 땜빵이었다. 비효율적인 조잡한 구조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반복되고 익숙해지면 관행이 되며 반복되어 세대를 이으면 관습이 되고, 그 세대의 조상들이 모두 수명을 다하면 전통이 된다.
“원래 다 그래”가 되고, 심지어 권위가 된다.
인간충은 그 ‘클루지’ 위에 산다.
자신이 버그란 걸 모른 채,
시스템을 장악한 채, 실용주의하는 모든 방식은 역적이나 빨갱이적 진보를 뜻하게 된다.
(사실 빨갱이라고 불리는 공산체제가 가장 보수에 가깝다)
예컨대 정치인. 말을 바꾸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청문회 자리에서 거짓말을 반복하며, 카메라에 눈을 똑바로 맞추고 말한다.
“국민을 위했습니다.”
(어느 나라 국민이었냐)
그의 이마에 박힌 건 신념이 아니라
뻔뻔함이다.
진실이 아니라 생존본능이다.
그는 충이다.
하지만 그냥 충이 아니다.
권력을 먹고 자라는 인간충이다. 이른바 동충하초. 다음 연도 선거를 위해 겨울엔 벌레만도 못한 벌레가 되어 있다가. 선거철인 하절기엔 풀처럼 순정해지는..
회사원도 있다.
창의성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위 로부터 떨어지는 문서 한 줄, 공문 두세 줄이면, 모든 소신을 접는다.
책임지지 않는 리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팔로워.
위계에 길들여진 인간형.
자발적 복종의 바이러스.
그래놓고 아이돌 공연장에서 "프리덤"을 외치는
시스템 안에서 가장 열심히 적응한, 진화한 형태의 기생이다.
어쩌면 인간충은
나와 당신의 안에도 있다.
‘내가 좀 참으면 되지’
‘이 판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지’
그런 자기 설득,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뭔 말이야... 참나 애당초 인간을 돌에 비유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 아냐?
요즘 누가 돌조각을 정으로 때려, 양생 하거나 3D로 뽑지. 그라인더로 갈던가..
그게 바로 시대착오적 감염의 시작이다.
인간충은 숙주를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 감염자일 수 있다.
문제는, 그걸 자각하느냐의 여부다.
1화는 여기서 끝이지만
이건 시작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고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지를,
한 편씩 파헤칠 예정이다.
다음 편에서는
‘유전적 착오와 문화적 전염’이라는 주제로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인간충이 어떻게 번식해 왔는지 본다.
너무 진지하지 않게,
하지만 허투루 넘기지도 않게.
이 연재는,
자기 인식의 부검이겠다. 그냥 난 있는 데로 믿고 살겠다 하시는 분들은 다음 편부터는 안 보시는 게 나을 수 있다. 재미와 호기심충족을 바란다면, 언제든 환영. 구독과 라이킷을 갈구하진 않아요.
믿는 시대는 지났고, 아는 만큼 깨닫는 시대가 도래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