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rlockian Way of Thinking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은 셜록 홈스 전집 가운데 ‘보이지 않는 공포’를 다뤘다는 점에서 독특한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세명의 피해자는 모두 죽음의 경고장인 ‘오렌지 씨앗’이 든 봉투를 받은 직후 의문의 죽음을 맞지만, 범인의 정체나 범행 방식이 끝까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또 홈즈가 철저한 분석과 논리로 범인의 정체를 파악했음에도 자연의 우연한 사고로 인해 법의 심판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결말로 독자에게 일종의 무력감과 동시에 현실적인 씁쓸함을 안겨준다. 사건은 해결됐지만 정의는 실현되지 않았다는 이 독특한 구조는, 추리소설의 통쾌한 마무리 공식을 깨뜨리며 오히려 더 큰 여운을 남긴다.
이 작품은 셜록 홈스 시리즈 중 드물게 국제적 비밀 조직(K.K.K., 쿠 클럭스 클랜)을 소재로 삼아, 19세기말 영국 독자들에게 새로운 ‘글로벌 범죄’의 이미지를 각인한 작품이기도 하다.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주의 단체가 영국 본토까지 범죄의 손길을 뻗치는 설정은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다. 이는 탐정소설이 단순히 '영국 런던의 거리'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국제 정치와 범죄가 얽힌 복합적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홈즈는 이 사건에서 ‘시간 차 추리(time lag deduction)’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한다. 미국에서 발생한 과거의 사건과 영국에서 벌어진 현재의 사건 사이의 시간적 간격 속에 공통된 패턴을 읽어내고, 보이지 않는 범인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방식이다. 이는 가설-연역법의 변형된 형태로 볼 수 있으며, 홈즈의 추리 기법이 얼마나 유연하고 창의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결국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은 논리적 추론이 끝까지 승리하지 못하는 보기 드문 예외적 작품임에도, 바로 그 점에서 오히려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셜록 홈스 시리즈가 단순한 ‘해결’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불완전한 진실’과 ‘세상의 불합리함’까지 담아낼 수 있는 그릇임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불길한 씨앗의 도착
1887년 9월 말, 셜록 홈스와 왓슨 앞에 한 청년이 찾아온다. 이름은 존 오펜쇼(John Openshaw). 그는 놀라움과 공포가 뒤섞인 얼굴로 자신의 가족에게 벌어진 기묘한 사건을 들려준다. 발단은 그가 아직 어린아이였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의 삼촌 엘리아스 오펜쇼(Elias Openshaw)는 미국에서 돌아와 잉글랜드 남부의 한적한 마을 호샴(Horsham)에 정착한다. 그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군에 가담했던 인물로, 돌아와서는 은둔에 가까운 삶을 살며 외부와의 접촉을 꺼렸다.
그의 생활은 철저히 통제되어 있었다. 별장에서 혼자 지내며 하인을 시켜 신문만 받아보던 그가, 1883년 3월 10일 인도 퐁디셰리(Pondicherry, 현재는 공식적으로 푸두체리(Puducherry)로 바뀌었음 -- 편집자)에서 온 정체불명의 편지를 받는다. 편지 봉투 안에는 하찮아 보이는 오렌지 씨앗 다섯 개가 들어 있었고, 겉봉엔 단지 "K.K.K."라는 세 글자만 적혀 있었다.
엘리아스는 이 편지를 받고 충격에 빠진 듯한 모습을 보였고, 그날 이후 유서까지 작성해 놓은 채 한층 더 경계심을 드러내며 생활했다. 그리고 결국 7주 뒤인 5월 2일 밤, 정원의 녹새 거품이 떠 있는 작은 연못에 엎어져 숨진 채 발견된다.
잇단 비극
삼촌이 죽고 난 뒤, 재산은 존의 아버지 조셉 오펜쇼(Joseph Openshaw)에게로 넘어간다. 그는 1884년 초부터 자신의 형이 물려준 호샴의 별장에서 거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다시, 1885년 1월 4일 아침 스코틀랜드 던디(Dundee)에서 온 똑같은 봉투에 담긴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이 배달된다. 이윽고 포츠다운 힐(Portsdown Hill) 요새의 지휘관으로 있던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간 조셉도 편지를 받은 지 5일째 되는 날 시체로 발견된다.
그 일대에 흔한 깊은 백악 갱(석회암의 일종인 백악을 채굴하기 위해 파놓은 깊고 가파른 채석장 형태의 갱도나 구덩이 -- 편집자) 속으로 추락해 사망한 모습에 경찰은 사고사로 처리한다. 하지만 존은 의문을 거둘 수 없다.
부친의 죽음 이후 모든 정황을 수상하게 여긴 그는 어디로 가든 위험은 마찬가지일 거라고 확신하고 계속 그곳에서 머문다. 그러나 2년 8개월 동안 아무 일도 없던 그에게 전날 아침 마침내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이 담긴 편지가 도착한다. 발신지는 런던 동부 지구이며, 봉투엔 "K.K.K."라는 기호가 선명히 적혀 있다. 이제 그는 이 괴이한 위협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며, 반드시 실체가 있는 악의적 조직의 소행이라 확신하게 된다. 그렇게 그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셜록 홈스를 찾아온다.
예고된 결말
홈스는 조심스럽게 사건의 실마리를 따라간다. 그는 오펜쇼 가문에 다가온 이 정체불명의 공포가 단순한 협박이나 불행한 우연이 아니라, 명백한 의도를 가진 누군가의 지속적인 계획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상에 다가서려 하지만,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
결국 의뢰를 맡은 다음 날 아침, 존 오펜스마저 전날 밤 워털루 다리(Waterloo Bridge)에서 템즈(Thames) 강에 빠져 사망했다는 사실을 신문 기사로 알게 된다. 경찰은 단순 실족사로 결론 내리지만, 홈스는 그것이 마지막 경고에 따라 실행된 계획적 살인임을 확신한다.
이 사건은 홈스의 수많은 의뢰 중에서도 가장 서늘한 여운을 남긴 사건으로 남는다. 범인의 정체는 알아내지만, 법의 심판은 끝내 그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정의는 추적되었지만, 실현되진 못한 채 남은 셈이다.
홈스는 가족의 잇단 비극, 그리고 그 시작점이 된 삼촌 엘리아스 오펜쇼의 은둔 생활 등 존이 들려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왓슨과 함께 전체 상황을 차근차근 검토하기 시작한다.
엘리아스의 도피 ― 두려움에서 비롯된 귀국
엘리아스는 미국 남부에서 유복하게 살던 은퇴 군인이었다. 그런데 왜 풍요로운 미국의 생활을 뒤로하고, 외롭고 음습한 영국의 시골로 돌아왔을까? 홈즈는 말한다. “플로리다의 매혹적인 기후를 영국 시골의 적막함과 맞바꿀 리가 없지. 그는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두려워했기 때문일 거야.”
여기서 홈스는 엘리아스가 도피성 귀국을 했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의 이후에 관찰된 행동 ― 극단적인 은둔과 경계 ― 이 그 가설로부터의 예측과 논리적으로 일치하는지를 검증해 들어가는 가설-연역법을 사용했다.
세 통의 편지 ― 죽음을 예고하는 항로
이어 홈스와 왓슨은 오펜쇼 가족이 받은 편지들의 발송지에 주목한다. 첫 번 째는 인도 퐁디셰리, 두 번 째는 스코틀랜드 던디, 마지막은 동런던(East London). 이를 보고 왓슨은 단박에 “세 곳 모두 항구 도시라는 것. 그리고 편지를 쓴 사람들이 배에 타고 있었다”라고 공통점을 짚어낸다.
이 과정에서 왓슨이 사용한 추론 방법은 귀납법이다. 세 개의 개별적 사건에서 공통된 패턴(항구 도시 발송)을 도출해, 하나의 일반 법칙(발신자는 배를 타고 이동한다는 것)을 세워낸다.
시간의 단서 ― 범선이라는 결론에 이르다
홈스는 나아가 각 편지 발송 시점과 사건 발생 시점 사이의 시간 간격을 꼼꼼히 계산한다. 퐁디셰리에서 발송된 첫 번째 편지와 사건 발생 사이엔 7주간의 간격이 있었다. 반면 던디 소인의 두 번째 편지는 도착 나흘 만에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이 시간의 차이를 단순한 우연이 아닌 물리적 현실의 반영이라 본다. “만약 범인이 증기선을 타고 출발했다면, 편지와 거의 비슷한 시점에 도착했을 걸세. 하지만 7주가 경과했네. 나는 그 7주가 편지를 실은 우편선(증기선)과 범인들이 탄 범선 간의 속도 차이를 나타낸다고 생각하네.”
이는 홈스가 가설-연역적 추론을 수행한 결과다. “범인이 편지보다 늦게 도착한 이유는 이동 수단의 속도 차이 때문이다”라는 가설을 세운 뒤, 실제 시간 간격을 바탕으로 그 가설을 검증한다. 그리고 “이건 그럴듯한 설명이 아니라, 가장 타당한 결론이다.”라고 단정한다.
이처럼 그는 우편선의 속도와 범선의 속도 차이, 각 사건의 시간 간격, 항구 도시라는 지리적 특성을 삼각 측량하듯 조합해 범인의 이동 수단과 현재 위치를 좁혀간다.
마지막 경고 ― 시간이 없다
그리고 왓슨에게 말한다. “그러니 자네는 이제 이번 일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갈 것인지, 내가 왜 오펜쇼 청년에게 누누이 조심하라고 강조했는지 알 거야.”존이 받은 편지의 발송지가 동런던이라는 사실은 범인의 위치가 런던 이외의 다른 곳일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할 뿐만 아니라(제거법), 사건이 이미 문 앞까지 와 있다는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조직인가, 이니셜인가: 알파벳 세 글자의 정체
존 오펜쇼가 가져온 세 통의 편지에는 모두 공통된 기호 ‘K.K.K.’가 있었다. 이는 단순히 한 사람 이름의 머리글자이거나 어떤 집단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기호일 수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힘으로는 검시 배심(검시관이 의심스러운 사망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소집하는 보통 시민 12명 정도로 구성된 조직 -- 편집자 주)을 속여 넘길 정도의 솜씨로 두 사람을 해치우는 게 불가능하다. 두 사람이 연이어 사망하고, 그전에 모두 K.K.K.라고 적힌 편지와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을 받았다는 이상한 현상도 설명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홈스는 단독범 가설을 폐기한다(제거법).
이제 조직범죄 가설을 검토할 차례다. 만약 K.K.K.가 특정 조직의 약자라면 다음과 같은 연역적 예측이 가능하다:
• K.K.K.는 폭력적인 목적을 가진 집단일 것이다.
• 이 집단은 조직적 구조와 처벌 방식, 내부 상징체계를 갖고 있을 것이다.
•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해당 조직의 제재 대상이며, 경고의 의미로 오렌지 씨앗을 받았을 것이다.
홈스는 왓슨에게 선반에 있는 미국 백과사전에서 ‘K’ 항목을 찾아달라고 한 다음, 목소리를 낮추고 “자네 혹시… 쿠 클럭스 클랜이라고 들어본 적 없나”라고 묻는다.
그리고 찾아본 백과사전 ‘쿠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항목에는 이러한 내용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소총의 노리쇠를 잡아당길 때 나는 소리를 본뜬 이름인 쿠 클럭스 클랜은 남북전쟁 이후 결성된 비밀 테러 조직으로, 정치적 목적 외에도 흑인 유권자와 반대 의견을 가진 백인들까지 협박, 추방, 살해하는 데 앞장섰으며, 그 표식으로 오렌지 씨앗이나 참나무 가지, 멜론 씨앗을 보낸다. 1869년 이 단체의 활동은 갑자기 중단된다.
홈스의 가설이 ‘가설-연역법’을 통해 실제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무자비한 추적의 이유
홈스는 K.K.K.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질문을 이어 간다; “왜 그들이 이 집안을 무자비하게 뒤쫓는가?” 이어 K.K.K.의 활동이 활동이 갑자가 중단되고, 엘리아스 오펜쇼가 미국에서 사라진 시점이 1869년으로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 현상을 가장 설명하는 “엘리아스 대령이 조직에 속해 있었으며, 조직 기반에 위험이 되는 중요한 기록을 갖고 도망쳤을 것”이라는 가설을 채택한다(가추법).
그리고 다음과 같이 연역적으로 예측한다:
• 서류 안에는 조직의 명단이나 활용 내역, 특히 남부의 유력 인사들의 이름이 들어 있을 것이다.
• 조직의 존립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든 서류를 회수해야 했을 것이다.
• 이를 회수하기 위하여 엘리아스 대령뿐 아니라 그의 유산을 이어받은 아버지 조셉과 존까지 제거하려 할 것이다.
실제 존이 홈스에게 보여준 서류의 일부에는 이름과 함께 그 옆에 ‘오렌지 씨앗 발송’ ‘제거’ ‘추방’ 등의 단어가 쓰여 있다. 단순한 서류가 아니라 조직의 은폐된 폭력의 역사가 통째로 드러날 수 있는 치명적인 증거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삼촌과 아버지에 이어 존도 템즈강에 빠져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이렇게 홈스는 가설로부터 예측을 만들고, 현실과 비교해 검증하는 가설-연역법을 활용해 왜 K.K.K가 오펜쇼 집안을 쫓는지 그 전모를 밝혀낸 것이다.
존 오펜스마저 익사체로 발견되자 홈스는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이 무뢰배들을 응징하는 일에서 손을 떼지 않겠다”라고 다짐한 뒤, 직접 수사에 나서 “오펜쇼를 대신해서 복수할” 단서를 찾아낸다.
이 단서를 찾기 위해 홈스는 먼저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운다: “범인들은 미국 선적의 배를 타고 움직일 것이며, 1883년 1월에서 2월 사이에 인도 퐁디셰리 항에 기항했고 1885년 1월경 스코틀랜드 던디항에 기항했다가 최근 런던항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즉시 영국 로이드 선박 등기소의 과거 등기부를 뒤져 1883년 1월에서 2월 사이에 인도 퐁디셰리 항에 기항했던 모든 선박들 가운데 론 스타호에 주목한다. 론 스타란 지명이 런던에서는 사라졌지만 미국의 어느 주의 도시 이름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홈스는 눈앞의 현상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가설을 선택하는 가추법을 이용해 확인한다.
그다음 던디항의 등기부를 찾아보고 론 스타호가 1885년 1월에 거기 기항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다. 그리고 현재 런던항에 정박 중인 선박들을 조사해 론 스타호가 지난주에 앨버트 부두에 도착했음을 알아낸다.
여기서 홈스는 자신이 세운 배 관련 가설이 실제 항만 기록, 조사한 내용과 일치하는지 관찰해 사실로 입증하는 가설-연역법을 활용했다. 홈스는 나아가 그 배의 화물을 운반한 하역 인부에게서 선장이 토박이 미국인 칼훈이라는 사실도 알아낸다.
그러나 홈스는 영국 안에서의 ‘법적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 론 스타호가 이미 미국을 향해 떠났기 때문이다. 이에 홈스는 “그들이 우리에게 한 방식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 도리”라면서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을 작은 봉투에 담아 칼훈 선장에게 보낸다. 미국 경찰에 그와 그의 패거리들이 저지른 범죄의 실상과 증거를 담은 편지도 발송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뒤 대서양 한복판에 ‘L. S.’라는 글자가 새겨진 부서진 선미 조작이 파도에 떠다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자연의 정의’가 실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