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아빠가 있잖아

이 괴물 나오기만 해봐

by 준희최

어떤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다른 시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공감이 닿을 때

그 두려움은 시간을 건너 같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다른 시간 같은 모습의

너와 나,

나와 너


우리




눈이 번쩍하더니, 뺨이 따갑고 뜨거워졌다.

열 살이던 나는 휘청거리며 거의 쓰러질 뻔했다.


“왜 집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어!

방마다 불은 다 켜놓고!

TV는 왜 이렇게 크게 틀어놨어!”


나는 얼얼한 뺨을 문지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의 손이 또 올라올까 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시간은 아버지가 돌아올 때가 아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집에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워

여차하면 도망치려고 현관문을 열어두었고,

스멀스멀 살아나는 방 모서리의 그림자를

TV 소리로 지우고 있었다.


아버지의 눈에 그 풍경은

제멋대로인 아들의 ‘엉망진창’이었겠지만,

열 살 아이에게 그것은

공포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그 간극을 설명할 언어는 내게 없었다.


아버지는 말을 잃은 내 귀를 거칠게 잡아 현관으로 던지듯 밀었다.

“차에 타!”


가게에 동생을 데리고 다니던 아버지가

직원들과 회식 중 문득 내가 떠올라

잠시 들른 것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눈에 예상치 못한 통제 불능의 집은

아이의 깊은 두려움보다 쉽게 눈에 띄었을 것이다.


식당에 앉아 있어도

고기는 모래알처럼 삼켜지지 않았다.

부어오른 뺨보다 더 아팠던 건,

아버지 옆에서 웃고 있는 동생과

나를 흘끔거리는 어른들의 시선이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내 곁에 따라 누운 엄마가 머릴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그랬어. 아빠가 화나셨잖아.

집에 나쁜 사람이라도 오면 어떡해.

전기세도 아깝고….”


나는 웅크린 채 속으로만 대답했다.

‘집에 혼자 있는 거 너무 무서워.

나도 동생처럼, 엄마 아빠랑 같이 있고 싶어.’


베개가 축축하게 젖어갔다.

나를 토닥이던 엄마의 손길 속에서도,

내 편에서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나의 보통의 날이 지났다.




이제 여덟 살인 둘째는 유독 겁이 많다.


며칠 전 밤,

온 가족이 안방에 모여 책을 읽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아빠, 물 마시러 같이 가요.”


정수기까지는 불과 열 걸음.

칠흑 같은 어둠도 아니었고,

거실에는 희미한 등도 켜져 있었다.

피곤한 몸을 일으키려니 귀찮음에 한숨부터 나왔다.


늘 하던대로 거실 불을 켜주고,

문 앞에 서서 중얼거렸다.

'얼른하고 들어가. 1학년 형님인데 아직도 아기처럼..'


그 말이 거의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무렵,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아이


나는 저 뒷모습을 알고 있다.


이불을 말아쥐고 돌아누웠던,

작고 여린 어깨가 떠올랐다.


‘그래도 난 무섭단 말이야.’


말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삼켜야 했던 그 밤의 뒷모습.

배고프고 축축하고, 서러웠던 열 살의 아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딸아이의 뒤에 섰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과장된 몸짓으로 속삭였다.


“걱정 마. 아빠가 뒤를 지켜준다. 헙! 헙!”


딸아이는 어둠 속에서 작은 소리로 깔깔거리느라

물을 반은 마시고, 반은 흘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반은 따스한 웃음을 짓고

반은 쓸쓸한 눈물을 삼켰다.

웃음과 눈물이 목구멍에서 부딪혔다.




아이를 재우고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어둠 속에서 축축하게 젖어갔던 열 살의 베개와,

내 장난에 깔깔거리던 여덟 살 딸아이의 웃음소리가 겹쳐졌다.


그제야 알았다.

시간이 나를 만든 게 아니라,

나를 돌아보려는 마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걸.


그 마음으로 과거의 나를 안아주었을 때,

나는 내 아이의 두려움 앞에

등을 내어줄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

내 손으로 얹은

따뜻한 기억 하나가 남을 뿐이다.


그 밤, 나는 딸아이의 손을 잡고

수십 년 전 울고 있던 나에게로 걸어가

젖은 뺨을 닦아주고

조용히, 그의 곁에 누웠다.






작가의 말


어린 시절의 두려움은,

시간이 해결해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말할 수 없었던 감정이

부끄러움이라는 이름으로 내 안에 숨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을 꺼내어 안아주었을 때,

나는 내 아이의 어둠 앞에서도

다정한 어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과거의 내가 간절히 바라던 것은

더 단단해지라는 꾸지람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밤,

“괜찮아, 내가 옆에 있어.”

그렇게 말해줄 단 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나는 이제,

그 아이가 그토록 기다렸던

그 사람이 되려 합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서 있는 지금이야말로

내가 찾아 헤매던 두 번째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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