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시간

침묵의 유산

by 준희최

말 한마디에 풀어지는 아이의 마음.

평생을 침묵으로 사랑을 증명한 한 사람.


나는 그 숭고한 침묵의 유산을 가슴에 품고

이제야 비로소

그녀가 건너지 못한 강을 건너가려 한다.




큰아이에게 화를 냈다.

작은 실수 하나에 감정이 욱해서 소리를 질렀고,

아이는 울음을 꾹 참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아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아빠, 그래도 그렇게 화내면 안 될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아빠가 잘못했어. 미안해.”


아이는 금세 환한 얼굴로 내 품에 안긴다.

그 순간, 이상할 만큼 깊은 안정감이 밀려왔다.


단순히 화해해서가 아니었다.

‘말로 하는 사과’와 ‘말로 하는 용서’.

이 당연한 풍경이 내게는 왜 이토록 낯설고도 충만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 질문 끝에,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조용히 떠올랐다.

—— 말이 없었던, 어머니와의 익숙한 이별 순간들.




“네, 들어가 볼게요.”


오랜만에 들른 본가.

현관문을 나서려는 나를, 어머니가 황급히 따라나오신다.

미리 챙겨두신 검은 비닐봉지 여러 개를 내 손에 꼭 쥐여주신다.


“가져가, 가져가.”


혹시라도 아버지가 보시고 “또 뭘 들려보내냐”고 호통치실까 봐,

우리의 작별은 늘 이렇게 은밀하고도 부산스럽다.

사실, 이 상황이 늘 답답했다.

이렇게 마음 졸이며 주실 바엔,

차라리 안 받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주는 일’이 어머니가 가진 몇 안 되는 사랑의 방식이라는 걸.


“아유, 고마워요. 엄마.”

억지로라도 웃으며 받아든다.

그러려니 하면서,

참 오랫동안 나와 어머니는 이런 식으로 살아왔다.


우리의 관계 속에서

사과나 용서, 혹은 사랑한다는 말은

소리내어 존재한 적이 거의 없었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양장점에서 일하셨다.

맞은편 중국집 아들이던 아버지를 그때 만났단다.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통에 너무 무서워서 도망도 못 가고,

꼼짝없이 결혼까지 하셨다는 이야기.

그렇게 시작된 그녀의 시간은,

내가 아는 한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단칸방, 사글세, 늘 쪼들리는 살림살이.

분유 살 돈이 없어 갓난아기였던 나에게 미숫가루를 타서 먹였다는 말에,

나는 엉뚱하게도 "그래서 내가 수학을 못했나?" 싶었던 적도 있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자주 울었다.

맞아서, 지쳐서, 이유 없이 슬퍼서.

그녀의 삶은 그만큼 위태로웠다.


아버지가 없는 밤이면,

엄마는 거실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울며 기도했다.

몸을 흔들며 신에게 무언가를 간절히 속삭이는 모습.

그 소리는, 아이였던 내게는

엄마의 마음이 어딘가로 떠나버리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더 싫었다.

엄마가 우는 것이, 그냥 싫었다.




어머니의 최선은 늘 말이 아닌, 다른 형태로 도착했다.

냉장고 안 꾹꾹 눌러 담긴 반찬통으로,

식탁 위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로,

가장자리까지 반듯하게 개켜진 속옷과 수건으로.


나는 엄마를 불쌍하다고 여겼다.

그 연약함이 답답했고,

아버지에게 맞서지 못하는 침묵이 원망스러웠다.


중학생이 되어 다른 집은 우리 집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그 모든 분노와 혼란은 결국 가장 만만한 대상인 엄마에게 쏟아졌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아무 죄도 없었다.

그저, 혼자서 너무 많은 걸 감당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

아버지의 눈을 피해 검은 봉지를 건네주던 어머니의 눈빛 속에서

나는 전혀 다른 것을 보았다.

그건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자식 손에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낸 용기였다.

어머니는 그렇게, 평생을

두려움보다 더 큰 사랑으로

매 순간의 작은 전투를 묵묵히 이겨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오랜 침묵은 회피가 아니라, 버티는 힘이었다.

내가 ‘불쌍함’이라 부르던 그 모든 시간은

사실 숭고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 숭고한 사랑이 왜 그토록 오래 침묵해야만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심장이 내려앉는다.

쿵, 소리를 내며 깊은 에 큰 진동을 일으킨다.

아, 엄마...




방으로 돌아오니, 아이가 기다리고 있다.


“아빠, 이거 할머니가 싸준 거야?”

"응 할머니... 아빠의 엄마가 우리 먹으라고 싸주신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검은 봉지에서 과일을 꺼낸다.

어느새 우리 부엌 한편에는

어머니의 시간들이 다시 차곡차곡 쌓여간다.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를 극복하는 것이

내 삶의 과제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절반의 진실이었다.


이제는 안다.

내가 정말 마주해야 했던 건, 어머니의 침묵이었다.

그녀가 물려준 위대한 사랑을 가슴에 품는 것,

그리고 동시에 그녀가 끝내 건너지 못했던 침묵의 강을

내가 대신 건너는 것.


말없이 견디고,

말없이 사랑했던

그녀의 모든 시간이

결국 내 두 번째 삶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음을—

그리고, 지금 내가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 이유였음을.


내가 받아든 검은 봉지 안에는,

말없이 건네진,

그러나 세상 무엇보다 강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작가의 말


나는 내내 마음 한편이 무거웠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그리고 그 깊은 침묵을

몇 줄의 글로 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조차

오만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유산을 안고 살아갑니다.

어떤 유산은 상처로 남고,

어떤 유산은

침묵으로 남습니다.


나의 두 번째 삶은 이제

그 모든 유산을 끌어안고,

나만의 언어로 사랑을 다시 써 내려가는 여정이 되었습니다.


아직은 서툴고, 자주 길을 잃습니다.


문득 궁금해집니다.

당신의 사전에는,

사랑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단어로 쓰여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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