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총균쇠보다 힘이 세다
2025년의 한국은 돈의 풍경이 가장 빠르게 변하는 나라 중 하나다. 주식시장은 사상 최고점을 경신했고, 코인 시장은 다시 불타오르고 있다. 코스피는 4,000선을 넘나들며, 개인투자자 비중이 전체 거래의 70%를 차지한다.
이제 돈은 은행 창구가 아니라 손끝에서 움직인다. 모바일 트레이딩 앱과 간편결제, 가상지갑이 금융의 전면에 섰다. 돈은 더 이상 ‘금속’이나 ‘지폐’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호와 데이터, 그리고 신뢰의 코드로 바뀌었다. 데이비드 맥윌리엄스의 『머니 : 인류의 역사』는 이 변화의 본질을 꿰뚫는다. 그는 돈이 단순한 교환 수단이 아니라 문명의 구조를 바꾼 ‘신뢰의 기술’이라고 말한다.
그의 서술은 거대하면서도 구체적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 회계에서 시작해, 그리스의 주화, 로마의 은화, 네덜란드의 주식회사, 그리고 오늘날의 디지털 머니로 이어진다. 인간은 서로를 완전히 믿지 못했기에, 대신 믿을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다. 그것이 돈이었다. 그러나 돈은 단순한 도구에 그치지 않았다. 저자는 말한다. “돈은 우리를 바꾼다.” 돈의 형태가 바뀔 때마다 인간의 관계, 제도, 기술, 심리 또한 함께 변했다.
오늘의 한국은 그 ‘변화의 실험실’이다. AI, 반도체, 2차전지, 우주산업 같은 핵심 분야는 실제 성과와 기술력이 뒷받침되어 있다. 삼성전자는 AI 서버용 메모리 판매로 사상 최대 실적을 냈고, SK하이닉스는 고대역폭 메모리 시장을 선점했다. LG에너지솔루션과 포스코퓨처엠은 글로벌 전기차 공급망의 중심에 섰으며, 한화그룹의 우주 관련 기업들도 발사체 계약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의 주식시장은 실적 기반 위에 서 있지만, 동시에 서사의 온도에 따라 움직인다. ‘AI가 세상을 바꾼다’, ‘한국이 우주를 향한다’는 문장은 기술을 넘어 신념이 된다. 신뢰가 기술로, 기술이 이야기로 변하는 과정에서 돈은 다시 한 번 상상력의 산물이 된다.
맥윌리엄스는 말한다. “돈은 신뢰가 있는 곳으로 흘러간다.” 오늘의 한국에서 신뢰는 제도가 아니라 기술에, 그리고 기술을 매개한 이야기로 옮겨가고 있다. 사람들은 중앙은행보다 기업의 기술 비전을 믿고, 정부 정책보다 시장의 자생력을 신뢰한다. 그러나 신뢰의 축이 한쪽으로 쏠리면 균열이 생긴다. 로마 제국이 은화의 함량을 줄이다 신뢰를 잃은 것처럼, 지금의 한국도 돈은 넘치지만 제도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있다.
이 틈을 메우는 것이 암호화폐다. 과거엔 투기로 여겨졌던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이 이제는 제도권의 대체 신뢰로 자리 잡았다. 젊은 세대뿐 아니라 중년층까지 “탈중앙화”와 “코드의 투명성”을 새로운 윤리로 받아들인다. 맥윌리엄스가 “신뢰를 코드화하려는 시도”라 부른 현상은 한국에서 가장 빠르게 현실이 되었다. 개인은 은행을 통하지 않고 전 세계로 송금하며, 블록체인은 회계장부이자 사회계약의 새로운 형태로 작동한다.
그러나 저자는 경고한다. 돈이 현실에서 서사로 전이될 때, 버블은 시작된다고. 튤립 버블, 남해회사, 1929년 대공황, 2008년 금융위기 — 모두 돈이 이야기로 변한 순간이었다. 오늘의 한국 시장은 그 역사를 비켜가지 않는다. 기술의 성취가 확실함에도, 그 위에 덧씌워진 ‘기대의 프리미엄’이 지나치면 현실은 다시 흔들린다. 돈은 인간의 상상력을 먹고 자란다. 상상력이 실적을 압도하는 순간, 시장은 신뢰의 경계를 잃는다.
그럼에도 이 책은 돈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돈을 협력의 언어, 문명을 유지하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으로 본다. 돈은 탐욕의 결과가 아니라 상상력과 신뢰의 결정체다. 인류는 돈을 바꾸며 스스로를 바꿔왔고, 오늘의 한국은 그 진화의 최전선에 서 있다. 주식과 코인, 원화와 토큰, 은행과 모바일 앱은 이제 같은 체계의 다른 얼굴이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휴대폰 그 자체가 은행이 되고 충전금이 화폐가 될 거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 이렇듯 돈의 진화는 인류의 진화처럼 끊임없이 놀라움을 선사한다.” 이 문장은 오늘의 한국을 완벽히 설명한다. 휴대폰은 이미 은행이 되었고, 카카오페이·토스의 잔액은 실물 화폐와 다르지 않다. 송금은 실시간이고 결제는 얼굴 인식으로 끝난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 일상이 되었다.
『머니 : 인류의 역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돈이 바뀔 때, 인간은 어떻게 변하는가. 그리고 지금의 한국은 그 답을 매일 실시간으로 써 내려가고 있다. 신뢰가 제도에서 기술로, 기술에서 개인으로 옮겨가는 순간, 돈은 더 빠르고 가벼워지지만, 그만큼 우리의 신뢰도 불안정해진다. 돈의 진화는 분명 놀라움을 선사하지만, 그 놀라움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돈은 총균쇠보다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