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무작정 일본 출장

나는 왜 직업수집가가 되었는가

by 방구석 관찰자

가족이라면, 관심사가 비슷하기 마련이다. 만약에 관심사가 전혀 다르거나, 혹은 가족의 관심사에 주의를 기울일 의지가 없다면, 대화가 얼마나 지속될까 예상해 보라. 3분을 넘기기 힘들 것이다.


나는 원래가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고 좇으며, 관심이 충족되면 금세 질려버리는 타입이다. 이 부분은 어떤 때는 장점이 되고, 어떤 때는 단점이 되는데, 내 흥미가 지속되는 시간이 적은 것은 인생을 걸쳐서 진지하게 고쳐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자녀들과 공유하고 있는 관심사는 몇 가지가 있는데, 이번에 얘기할 관심사는 일본 캐릭터 IP( Intelecual Property, 지적 재산권) 중 한 캐릭터에 대한 것이다. IP는 흔히 원작이 있는 게임·애니메이션·문화 콘텐츠를 미디어 믹스할 때 그 권리를 나타낸다. 둘째는 일본의 한 만화 캐릭터(이하 C로 지칭)에 빠져있었는데, 일본에 가족 여행을 갈 때마다, 우리는 팝업스토어를 먼저 고려해서 여행지를 정했고, 1인 1개 한정 제품을 사기 위해 가족 수만큼 줄을 서고, 둘째가 지시한 물품들을 사야 했다. 둘째는 그 상품들을 담기 위한 캐리어를 별도로 들고 갔으며, 돌아올 때는 캐리어가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한국에 돌아오면 자신이 소유할 물품들을 먼저 선별하고, 중복되는 물품들은 중고거래 시장에 2배의 가격으로 내놓았다. 그럼에도 그 물품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유명 연예인(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도 있었다. 둘째는 우리 가정의 '거상 김만덕'이었으며, 우리도 자연스럽게 캐릭터 C에 빠져들었다.


C는 만화가 원작이고, 현실을 풍자한 느낌도 있지만, 워낙 스토리텔링이 유니크한 면이 있어서, 나도 좋아하게 되었다. 길거리에서 C를 가방에 달랑달랑 매단 젊은이들을 보면 반가울 만큼, 둘째의 덕질에 동화되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정말 보기 드물게 팝업스토어가 열리는데, 갈 때마다 나는 불만이 가득했다. 덕질을 오래 하다 보니, 팝업스토어에 참여하는 인원을 뽑는 티켓팅서부터, 스토어 장소, 현장 요원들의 응대, 제품의 다양성 등등에 대한 눈이 점점 높아져갔다. 나라면 이렇게 안 할 텐데, 이건 좀 바꿔서 해볼 텐데, 하는 마음들이 들었다. 정말 C라는 캐릭터에 애정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불편감이었다.


여느 때처럼, 집에서 뒹굴거리며 하릴없이 백수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는 취미생활인 '공상'에 빠졌다. 내가 C를 수입한다면 어떤 식으로 스토어를 운영할까? 아예 정식 판권을 가지고 플래그쉽 스토어를 운영한다면 어디에 할까? C덕후들을 위해 어떤 서비스가 가능할까? 이전에 쓴 마스크수출입 때처럼, 나는 생각과 동시에 움직이는 경향이 있어서, 인터넷에 C의 IP를 가지고 있는 일본 회사를 검색했다. C는 본래 만화가가 창조한 만화 캐릭터여서, 그 권리는 모두 만화가에게 있겠지만, 캐릭터의 상품화에 관한 권리는 어딘가에 맡겼을 터라, 일단은 그 일본회사를 찾았다. 나는 한국 내 판권을 가지고 있는 회사도 검색으로 찾아냈다. 만화에 관련해서는 한 회사가 국내에서 원탑이라, 당연히 거기서 C의 IP도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C에 대한 애정이 있다면, 이렇게 운영하지는 않았을 거란 원망이 있었다. 나는 그 회사가 갖고 있던 한국 내 판권도 뺏을 기세였다.


일본 회사의 이메일주소를 알아낸 뒤, 약 1주일에 걸쳐서 사업구상을 했다. PPT로 우리 회사 연혁, 기존 C관련 사업의 문제점, 앞으로 펼칠 사업 계획서, 심지어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고 싶은 상점 위치까지 15페이지에 걸쳐서 깔끔하게 작성했다. 그리고 역시 구글을 이용해 메일을 썼다.

'나는 기본적으로 무역을 기본으로 하는 회사야.(이 때는 남편의 회사를 이용했다) 나는 C에 대해 소비자로서 이러이러한 애정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어.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전개되는 C 관련 사업은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어. 나는 C를 이러이러하게 성장시킬 방법이 있는데, 나와 얘기해 볼래? 나는 C를 이용해 전방위적으로 콜라보를 진행할 생각이야. 연락 기다릴게.'


메일을 보내고 이틀 만에, 답장을 받았다. 줌을 이용한 화상회의가 언제 가능하냐는 내용이었다. 마스크 수출입을 처음 성공시켰을 때처럼 기뻤으나, 이번엔 심리적 여유가 있었다.

'나는 줌보다 너희 회사에 직접 방문하고 대화를 나눴으면 해. 언제가 좋을까?'

나는 줌이 싫었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기호다. 어떤 일이든 사람이 직접 대면해서 생기는 온갖 화학적 반응이 진짜라고 생각했다.


회의시간은 예상보다 일찍 잡혔다. 나는 아직도 연락하고 있는 제자들 중, 일본어에 능통한 일본 덕후 제자에게 연락해서 사정을 설명하고 동행을 요청했다. 제자는 마침 일본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이직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고, 나와의 일본 출장에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나는 이런 비즈니스 미팅이 처음이므로, 남편에게도 도움을 요청했고, 우리는 세 명이서 나름 회사의 모습을 꾸리고 일본 도쿄로 당일치기 출장을 갔다.


난생처음 비즈니스 미팅, 거기다가 해외로 직접 가는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설레었다. 영화에서나 보는 비즈니스맨들의 멋진 정장과 컴퓨터 가방, 공항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들, 이런 판타지가 섞여 나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이상하게 떨리거나, 긴장된 마음은 없었다. 나는 C에 대해 몇 시간도 얘기할 수 있었고, 처음 맞닥뜨릴 상황들이 기대되기만 했다. 통역을 담당해 줄 든든한 제자와, 이런 일에는 익숙한 남편까지, 게다가 이번 일의 주도자는 나니까, 남편은 내 회사의 직원이고, 내가 어엿한 우리 회사 대표가 된 것이다.


회사에 도착하자, 그제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회의실로 안내를 받고, 5명인 그쪽 회사인원들과 명함인사를 나누었다. 아! 떨리지만, 기대된다, 가 내 기분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했고, 내가 검색했다고 하니까, 놀라워했다. (그게 놀랄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회의결과를 요약하자면, 내 메일을 담당한 막내 직원과 내가 의사소통의 오류가 있었다. 나는 아예 판권을 내게 달라는 얘기였고(정식 플래그십 스토어를 포함한) 그들은 내가 00 편의점, 00 문구 등 다른 산업 제품과의 콜라보를 문의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들은 한국 담당회사와 오랜 기간 계약을 맺고 있는 관계이고, 한국 회사가 펼치는 사업이 어떻든 간에 자신들은 한국 내 사업에 관해선 관여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여러 가지 다양한 계약 조건들에 대해 열려 있었고, 어떻게든 내가 원하는 방식의 거래를 하고자 했으나, 일본 특유의 기존 거래, 의리의 중시(? )에 밀려 회의는 성과 없이 끝났다. 물론, 꽤 오랫동안 내 회사가 펼칠 수 있는 사업방향에 대해 어필을 했고, 그들도 긍정적으로 보기는 했으나, 기존 계약관계를 저버릴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대답이었다. 나는 후일을 위해, 마지막까지 내 회사의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주고 나왔다. 언제든지, 상황이 바뀌면 우리에게 연락을 달라는 말과 함께.


제자에게 신세를 졌고, 비행기 티켓을 포함한 교통비, PPT를 준비했던 시간들 등이 허사가 되었지만, 나는 그 비용과 노력이 아깝지 않았다. 이런 새로운 도전이 그 자체로 즐거웠고, 어제와는 다른 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캐릭터 IP에 관해 무지하고, 이런 사업은 처음이지만, 그 일의 한가운데로 풍덩 빠져봐야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일단 저질렀고, 열매는 없었지만, 나는 이런 것도 해 본 사람이 되었다. 나는 어쨌든 내가 품은 욕망을 분출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고, 하고 나서도 결과와 상관없이 뿌듯했다. 이런 일에 정통한 사람이 이 글을 보고 '뭐, 이런 미련한 사람이 있나' 해도 어쩔 수 없다. 이게 나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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