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편에 서기로 했다
지난 글에서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후회에 대해 썼다. 하지만 사실 내가 제일, 그리고 오래 후회해 온 일은 따로 있다. 바로 내가 나를 가장 아프게 한다는 사실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기준과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나를 채찍질을 해왔다. 그 점이 제일 후회되면서도, 동시에 아직까지 고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다. 어쩌면 지금도 고쳐야 할 것으로 명명하는 것 자체가 나를 괴롭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심리 상담과 정신과 상담을 받으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분석을 내려놓고 이해하려고 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왜 이럴까’가 아니라 ‘나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구나’라고 바라보라고 하셨다.
하지만 사람의 관성은 참 무섭다. ‘나는 이럴 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구나’에서 멈추지 못하고, 곧바로 ‘나는 왜 이 모양일까’라는 자책으로 미끄러진다. 생각해 보면 참 웃기고도 슬픈 일이다.
이렇게 된 사연을 다시 분석을 해보자면, 나는 사람을 너무 많이 사랑한다. 친구들은 나를 강아지로 비유하곤 한다. 그래서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큰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미움받고 싶지 않은 욕구가 크다.
어릴 때는 그저 내가 마냥 좋아하면 상대도 나를 좋아해 줄 줄 알았다. 하지만 중학교 때 왕따를 겪으며 그 믿음은 산산이 깨졌다. 내가 상대를 좋아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였다. 그것을 깨달은 이후로 나는 사람을 분석하는 습관이 생겼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무엇에 예민하고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나 자신을 조정해 왔다. 그렇게 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일종의 ‘맞춤형 인간’이 되어갔다.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다행히도 나도 나만의 신념과 가치관이 비교적 분명한 사람이고, 그것에 위배되지 않는 선 안에서만 타인을 맞추려 한다.
하지만 아직 그런 ‘선’이 없던 시절의 나는 말 그대로 호구였다. 내 주변에는 나와 진심으로 교감하려는 사람들과,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공존했다. 문제는 그 둘을 구분할 힘이 그때의 나에게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에 급급해 정작 나를 지킬 힘이 없었다.
그 시절 나는 TCI 검사에서 자율성이 2가 나왔다. 상담사 선생님이 ‘나를 지키는 힘이 100명 중 99등’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그 말을 들으며 내가 들었던 생각은 ‘도대체 100등은 어떤 사람일까’였다.
내가 왜 이렇게 나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랐는지를 떠올리면, 어린 시절의 환경이 큰 영향을 미쳤을 거라 생각한다. 감정 기복이 컸던 엄마의 높은 학구열 속에서 눈치를 보며 자랐고, 어떠한 조건을 충족해야만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메시지를 무의식적으로 학습했다. 왕따를 겪었을 당시에도 내 주변 어른들은 나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그저 나를 조금 더 챙겨주는 데 그쳤고, 부모님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고 싶어 하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체육 시간에 혼자 있을까 봐 걱정된 엄마가 몰래 학교에 갔고, 먼발치에서 자유 시간에 혼자 앉아있는 내게 말을 걸어주던 체육 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훔쳤다고 했다. 그 말에 마음이 찢어지긴 했다.
이렇게 돌아보면 참 여러모로 비극이다. 대학을 자퇴하고 방황하다, 여러 이유로 만신창이가 된 채 집으로 돌아왔을 때 처음으로 심리 상담을 받았다. 그때 내가 반복해 온 패턴들의 이유를 과거에서 찾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내 잘못이 아님에도, 이렇게까지 괴로움 속에서 살아야 했다는 사실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밀려왔다. 어떤 과거도 바꿀 수 없는데 이제 와서 어쩌라는 것인지, 깊은 좌절감도 함께 찾아왔다.
하지만, 그 분노와 원망에 머무른 채로는 결국 손해 보는 쪽은 나라는 사실은 자명했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것이 냉정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물론 오랜 시간 습관처럼 굳어진 수많은 자책과 회의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나만은 내 편에 서고 싶다.
지금도 관성처럼 내가 만든 선을 넘어 상대를 더 이해하고 배려하고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때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인가, 지금 내 기분은 어떤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렇게 아주 조금씩, 나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간다.
앞으로 내가 내게 상처가 되지 않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선을 넘은 뒤에야 아픔을 자각하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더 이상 그 사실을 자책으로 덮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려고 한다.
아직 나는 나를 완벽히 지키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더 이상 내가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만큼은, 내 편에 서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