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 이후의 삶에 대하여
카뮈는 말했다.
진정으로 심각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자살이다.
그는 부조리한 세계와 화해할 수 없는 인간 사이의 간극 앞에서, 자살은 인간을 지워버리는 선택이며, 종교적 믿음이나 초월적 희망은 세상을 지워버리는 선택이라고 보았다. 의미 없는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을 살아가는 태도, 그 성실한 지속 자체가 반항이며 이것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답이라고 말했다.
나는 자살도, 종교적 믿음도 오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추구하는 것은 삶의 허무함을 온몸으로 맞닥뜨리며 작은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매일을 성실히 살아가는 반항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내가 마지막으로 내리는 선택이 자살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과, 종교를 믿기에는 내 안의 의구심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 뿐이다.
예전에 독서 모임에서 ‘이방인’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세상의 가장 큰 부조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나왔을 때, 나를 제외하고 모두 ‘죽음’이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과학의 압도적 발전이 곧 이 명제를 뒤집을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그렇다.) 나는 늘 죽음을 염두한다. 그렇기에 삶이 소중하다.
죽은 뒤 원자의 형태로 이 우주의 일부로 돌아간다는 사실만이 비교적 명확하기에, 내게 자아를 지닌 채 세상을 온몸으로 느끼고 사유할 수 있는 길어야 이 100년 남짓의 시간이 다시 주워질지 모르겠다. 설령 그런 기회가 다시 온다 해도, 그것은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아닐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나는 내가 애틋해진다.
나 역시 허무함에 자주 압도되는 사람이고, 자살을 떠올렸던 순간도 셀 수 없이 많다. 내게 가장 큰 부조리는 희망이었다. 희망이 좌절될 때, 그것이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반복될 때, 최선을 다해도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나 자신을 마주할 때, 버거운 나의 모습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절감할 때, 나는 자살을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세계의 요구가 아니라—여기서 말하는 세계는 인간 사회가 아니다—내가 스스로에게 강요한 모습이었다. 이래야만 한다는 기준, 도달하지 못하면 실패자가 된다는 강박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내가 언제 행복을 느끼는지, 무엇에 취약하고, 그것은 곧 나의 어떤 장점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나를 어떠한 특징과 작동 원리를 가진 몸체처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온전히 세상을 감각으로 느끼는 ‘나’가 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비로소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였다.
여전히 삶은 허무하고, 외로움은 지독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감정에 저항하며 허우적거리지 않으려 한다. 그저 온몸에 힘을 빼고, 그 흐름에 나를 맡긴다.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은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것 역시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의미 없는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나에게 더 이상 삶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저 살아 있음 자체를 조건으로, 오늘을 살아내는 일. 지금의 나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