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서른여섯 번째 편지를 쓴다.
평화로운 주말 아침,
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니?
너와 함께
아침을 맞이하지 않는다는 게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엄마는 요즘 아침에 눈을 뜨고도
한참을 그대로 누워있는단다.
물론,
감기로 몸에 휴식을 주려는 마음이 첫 번째 이유야.
그리고
더 큰 이유는
마음의 감기를 앓고 있기 때문이지.
3월 2일.
널 기숙사에 데려다주고 오며
엄마도 다시 시작이라고 결심했단다.
온전한 시작이지.
그동안 삶에 여러 번의 시작이 있었단다.
너도 그럴 거야.
대학생활을 시작한 지금이
네 인생의 커다란 새로운 시작일 것이야.
너에게 중요한 첫 시작이 지금인 것이야.
살다보면
시작이 여러 번 오게 된단다.
엄마도 그렇게
여러 번의 시작을 맞으며
살아왔지.
그런데 말이다.
이번에야 말로
정말로 새로운 시작이지 뭐니?
너 또한 네 삶에 여러 번 맞이할 시작 중에서도
이번이 특별한 시작이듯이
엄마에게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특별한 시작을 맞이한 거야.
이젠 정말 혼자야.
혼자로 시작하는 거야.
그동안은 어떻게 되었든
늘 곁에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아.
엄마는 너처럼
엄마의 엄마 곁을 떠나서 혼자 살아본 경험이 없거든.
엄마 곁에 머무르든
아님 그 누구의 곁에 머무르든.
늘 누구와 함께였어.
마지막까지 엄마 곁에 함께 있어 준 건
바로 너이고 말이야.
그런 네가
이젠 진짜 네 인생을 살기 위해
시작의 길을 떠난 거야.
이젠 엄마 차례야.
엄마도 이젠
엄마의 또다른 시작의 길을 떠나야 해.
그래서 큰소리 쳤지.
너에게도 엄마에게도
이 3월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그런데 그거 아니?
시작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리기엔
엄마가 참 많은 삶을 살아왔어.
요즘은 엄마의 삶을 자꾸 반추하게 돼.
과거가 엄마를 끌어당긴다는 건 아니야.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야.
앗, 한 문자에 '것'이 세 번이나!
이건 무엇을 강조하기 위함일까?
다시 돌아와서,
많은 글들에서 이야기를 해.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그것이 자신을 오롯이 살게 하는 것이라고.
요즘 엄마는 이것의 의미를 새기고 있어.
그동안 무언가 하지 않으면
큰일나는 줄 알았잖아?
두려웠어.
불안했고.
이 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세상과의 연결이 끊어질까봐?
사람들이 나를 잊을까봐?
무엇이 불안한 걸까?
혼자가 될까봐?
철저히 혼자가 될까봐?
그것봐.
결국은 두려움도 불안도
엄마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야.
내가 무엇인데?
사람이 태어나 한 세상 살다가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모두에게 똑같은 것인데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우리의 삶인데,
사람들에게 잊혀진다는 것이
사람들과의 연결이 끊긴다는 것이
뭐가 그리 두렵고
뭐가 그리 불안하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평안한 상태
엄마는 지금 그것을 향해 가고 있어.
지금 막 새로움에 들뜬 네게 해줄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렴.
이것은 너에게도 마찬가지야.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지만
그렇다고 타인의 눈치를 보면서 살 필요는 없다는 말이야.
누군가에 어떻게 기억되고 싶어서
꾸미며 살 필요도 없어.
네가 네가 아닌 이가 되어
힘겹게 살 필요가 없다는 말이야.
본연의 너로 돌아가.
네 마음의 소리를 듣고
그 누구도 아닌 네 뜻에 살아라는 말이야.
이것이 세상과의 연결이 끊기는 것이 아니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여기에서 아무것도란
'세상의 잣대에서 해야하는 것'에 대한 '아무것도'란다.
어렵니?
세상에서 말하는
이것은 해야 해.
이렇게 하면 안돼.
라고 규정 짓는 것들에 대한 '아무것도'란다.
요즘은 책에 빠져 살고 있어.
알지?
엄마가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책을 읽는 건 의무가 아니야.
밥을 먹듯이
숨을 쉬듯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야.
그런데
이것이 어느날부터인가 의무가 되어버리더구나.
책을 의무로
전투적으로
무언가 해낸다는 성취감으로 읽는 것을 보며
엄마도 그렇게 되어버리더구나.
그러니
점점 책이 싫어졌어.
아쉬운 마음에 조금씩 읽으면서도
썩 좋은 마음은 아니었던 듯해.
요 며칠 책에 빠져 살며 생각했어.
그때 생각나?
엄마가 대안학교 다닐 때 말이야.
한 학기 마무리 마치고
아이들 평가서까지 발송하고 나면 하던 거.
다음 학기 준비 전까지
2주간의 휴가를 엄마 자신에게 주었잖아.
그때 말이야.
우린 도서관에서 각자 읽고 싶은 책을 잔뜩 빌려오지.
가족 회원이라 총 20권까지 빌려올 수 있었어.
엄마는 읽고 싶은 책을 세워놓고
책 속에 빠졌지.
몇 권을 읽고나서 기록하고 싶어지면
그제야 노트에 기록을 했어.
기록이라고 해서 대단한 건 아니야.
표지를 따라 그리기도 하고
표지에 있는 제목만 쓰기도 하고
기억에 남는 문구 쓰고
마무리는 그 책을 읽은 느낌과 기록하는 그 순간을 일기처러 남겼던 것.
그 노트가 쌓여 여러 권이 되었지.
기록도 하지 않은지 얼마나 되었을까?
요즘은 브런치독서노트에
남기고 싶은 문구만 남기고 있어.
또 때론 감상글을 쓰기도 하고.
아무튼
자유롭게 기록하던 것이
어느 형식에 매인다는 느낌이 들어.
서평이든 감상글이든
온라인 상에 글을 쓰는 것이지.
이건 물론 필요하고 좋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며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을 나누는 것이니.
그런데 이 행위가
정말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맞나?
남들 하니깐 따라 하는 건가?
생각하게 돼.
요즘 엄마는 약간 공허함에 빠졌어.
너무 세상을 향해 바라보다 보니
정작 나 자신은 들여다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니 쉽게 흔들려.
원래도 엄마가 좀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긴 해.
감정이 좀..
온전히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나로 서야 한다는 걸 깨달아.
그래야만 흔들림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아.
아니야.
무너져도 돼.
무너져도 다시 일어선다는 걸 아니깐.
어쩌면
무너지지 않으려고 너무 안간힘을 쓰다
지금 허무에 빠진 건지도 몰라.
무슨말인지 어렵니?
아침에 일어나서
퇴근하고 집에 오면
네 방에 대고 인사를 해.
잘잤니?
엄마 다녀왔다.
그러고나면 눈물이 핑~ 돌아.
그걸 외면해.
계속.
조금 더 깊어지면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아 외면 해.
그랬더니
내 마음이 자꾸 힘들어지고 있어.
처음엔 단지
너를 보내고 나서 텅 빈 방에 대한 외로움인가 했거든?
그런데 아니야.
외로움은 하나의 씨앗일 뿐이야.
이 씨앗이 자라
지금 나를 마음의 감기로 빠트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하지만
나쁘지 않아.
아니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
엄마는 요즘 책에 빠지면서
다시 예전의 모습을 돌아보고 있어.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대안학교 선생을 하면서도 행복했던 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불확실하기에 미래가 더 재밌다고 느꼈던 열정이 있었던 것이야.
그때의 엄마도
늘 불안정하고 일기를 쓰고 울고 했지만
그래도 재밌었어. 행복했고.
그건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하는 것이
재밌었기 때문이야.
미래가 보이지 않아 그것이 불안하면서도
그랬기에 더더욱 오늘을 살았던 날들이었어.
너와 함께 하기에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 같아.
넌 엄마에게 언제나 용기를 주는 존재였어.
여행도 많이 다니고
추억도 많이 만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시간들이
소중하다.
네가 없는 빈 방에 대한 외로움이
지금의 흔들림을 주는 건 아니야.
오십다섯을 정리할 시간인 거지.
지금은 그럴 때야.
엄마의 삶을 다시 돌아봐야 하는 그런 때.
얼마 전 통화에서 너도 그러더구나.
엄마와 다녔던 여행들.
엄마와 함께 했던 것들이
지금의 너를 만들어준 것 같다고.
기쁘더구나.
그리고 깨달았다.
엄마도 마찬가지라는 걸.
지금 엄마는
엄마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야.
조금 앓고 있지.
자꾸만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들에게 기대하는 자신을 보게 되어서 말이야.
상처 받는 것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았단다.
알고 보니
그건 남들이 준 상처가 아니야.
엄마 혼자 기대하고
그 기대에 응해주지 않으니
혼자 실망하며 아파하는 것이야.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야.
그러니 타인에게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
하지만
타인에게 이끌려다녀서는 답이 없어.
늘 상처 받는 엔딩이 되고 마는 거야.
그래서야.
그래서 엄마는 요즘
타인에게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자신으로 오롯이 살기 위해
알을 깨고 있는 중이야.
혼자서도 잘 사는 사람이
타인과도 잘 사는 거란다.
오십다섯,
이 나이까지 엄마는
지금의 너처럼 혼자 살아본 기억도 없구나.
너무 의지하고 살았던 거야.
엄마의 엄마에게
함께 하는 그 누구에게.
너에게.
혼자서도 잘 살아내기 위해
스스로 서기 위해
지금의 시간은 필요하다고 생각해.
네 말처럼,
걱정하지마.
네가
힘든 네 상황을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말했지?
엄마, 걱정하지 마.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게 좋야.
엄마에게 말할 수 있어서 좋아.
나 잘 할 거야.
잘 해나갈 수 있어.
엄마, 고마워.
들어줘서.
그러니 걱정하지 마. 알았지?
너도 마찬가지다.
이 글을 읽을 지 알 수 없지만
읽게 되더라도 걱정하지 마렴.
엄마 또한 잘 해나갈 거니깐.
오십다섯에
처음으로 맞는 혼자이기에
이제 남은 생을 살기 위한 진통을
지금 겪고 있는 것이니깐.
꼭 필요한 진통이라고 생각한다.
진통 끝에 네가 태어났듯이
이 진통 끝에는 새로운 엄마가 태어날 거야.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타인에게 이끌려다니지 않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어떤 사람으로
어떤 모습으로
얼마가 될지 모를 남은 생을 살 것인지
고맙다. 아들아,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줘서.
엄마 또한 네게 말할 수 있어서 좋구나.
네게 이렇게 말하고나니
엄마의 지금 마음이 정리가 되는 것 같아.
고맙다.
엄마를 살아 있게 해준 너의 작은 손.
이젠 엄마보다 더 커버린 손.
두 손 꼭 잡고 걷던 길들을
손 꼭 잡고 걷던 날들을
우리 잘 간직하자.
힘들 때마다
그 손의 온기를
그 손의 힘을 느끼며
우리 다시 일어서자.
지금처럼
흔들리고 힘들더라도
우린 알지 않지?
너도 엄마도
우린 힘이 있어.
다시 일어설 힘이.
삶을 사랑하며 자신을 믿으면 돼.
평화로운 주말 오전.
남은 시간은 무엇을 할 거니?
엄마는 청소를 좀 할까 해.
미루었던 베란다랑 엄마방 서랍장 위 정리도 하고.
사랑하는 내새끼.
오늘도 우리 잘 살아볼까?
^^*
2026년 3월 14일.
아침 11시 12분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났네?
밥은 잘 먹었는지 묻고 싶지만
묻지 않을게.
밥은 잘 챙겨먹어라고 또 말하고 싶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을게.
너도
엄마도
우린 스스로 해내는 힘이 있어.
그걸 믿어.
안녕 내새끼
예쁜 내새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