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 씨의 만물상점#4
어서 오세요, 성수 씨의 만물상점입니다.
오늘 진열장에서 꺼내볼 물건은, 먼지가 뽀얗게 쌓인 낡은 앨범 속에 숨겨져 있던, 저의 국민학교 시절 이야기입니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섰고, 그래서 때로는 엉뚱했지만, 누구보다 진심이었던 그 시절. 지금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는, 저와 제 친구들의 조금은 기특했던 추억 하나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자, 그럼 저와 함께 시간 여행을 떠나보실까요?
국민학교 5학년 겨울이었습니다. TV에서는 불우이웃 돕기 생방송이 한창이었지요. 방송국 앞에 길게 늘어선 줄, 성금을 내고 아나운서와 인터뷰하는 사람들. 그 장면이 어린 제 눈에는 너무나 멋져 보였습니다. 남을 돕는다는 뿌듯함과, 혹시 TV에 나올지도 모른다는 설렘. 이보다 재미있는 일이 또 있을까 싶었지요.
저는 당장 동네 친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얘들아, 우리도 성금 모아서 방송국 가자!"
"우리 용돈으로는 너무 작지 않아?"
"그럼 모금함 만들어서 동네 돌면 되지!"
"진짜? 우리도 TV 나와?"
우리 셋은 당장 박카스 박스를 주워다가 정성스럽게 모금함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납니다. 국민학생 아이들이 모금함을 들고 동네를 누비는 모습이 얼마나 엉뚱하고 기특하게 보였을까요.
하지만 그 시절의 동네는 따뜻했습니다. 누구 하나 이상한 눈으로 보는 이 없이, 어른들은 저희의 작은 용기를 기꺼이 응원해 주셨지요. 부모님들이 가장 먼저 지갑을 여셨고, 동네 친구들과 어르신들이 쌈짓돈을 털어 동전을 넣어주셨습니다.
정확한 금액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난히 동전이 많아 묵직했던 그 모금함의 무게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희는 그 동전들을 은행에 가져가 지폐로 바꾸고, 하얀 봉투에 고이 담았지요. 어린 마음에도, 우리가 정말 대단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결전의 날, 저희는 가장 예쁜 옷으로 차려입었습니다. TV에 나오려면 눈에 띄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친구 어머님께서 보호자로 함께 가주셨지요.
여의도 방송국 앞. 줄은 생각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80년대 중반, 모두가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이웃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았습니다.
저희는 잔뜩 긴장한 채 인터뷰 멘트를 속으로 되뇌며 순서를 기다렸습니다. 앞사람들이 하나둘 아나운서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지요. 우리 차례는 언제쯤 올까. 옷 깃을 만지작거리다가, 친구와 눈이 마주치면 긴장한 표정으로 웃었습니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습니다. 하얀 봉투를 조심스럽게 건넸지요. 하지만 아나운서의 마이크는 저희를 비껴갔습니다. TV 출연의 꿈은 그렇게, 싱겁게 끝나버렸습니다.
이상하게도, 실망감은 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속에는 그 어떤 인터뷰보다 더 값진 것이 남아 있었지요. 저희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계획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마침내 그것을 해냈다는 벅찬 감격. 우리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착한 일'을 했다는 뿌듯함이었습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스쳐가는 겨울 풍경을 보며 저는 혼자 웃었습니다. 옆자리 친구들도 피곤한 얼굴로 웃고 있었지요. 그날 우리 셋의 얼굴은, TV 속 그 어떤 주인공보다도 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을 겁니다.
여러분은 어린 시절, 엉뚱하지만 재미있는 추억이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