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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건넨 작은 위로

위로가 필요할 때

by 김성수

2023년 12월, 나는 몸담았던 직장에서 그리 유쾌하지 못한 방식으로 떠나야 했다. 깊이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복잡한 조직의 문제, 더 나아가서는 보이지 않는 정치적 문제까지 얽혀 있었던 일이었다. 언젠가 이 이야기도 찬찬히 풀어낼 날이 오리라 생각한다.


퇴사 후, 홀가분한 마음 한편으로는 깊은 상실감과 약간의 배신감, 그리고 사람에 대한 불신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를 깊은 수렁으로 끌어당기는 듯했다.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더 이상 활자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분명 눈은 글자를 좇고 있었지만, 마치 글자들이 붕붕 허공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좀처럼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든 흩어진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억지로 책장을 넘겨보았지만, 그것은 그저 무의미한 눈의 움직임일 뿐이었다.


그렇게 활자책은 더 이상 내게 어떤 의미도 주지 못했을 때, 나는 우연히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책에는 활자라곤 단 하나도 없는, 온전히 그림만으로 이루어진 그림책이었다. 그저 그림책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을 뿐인데, 굳어 있던 내 마음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이 감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글자 한 자 없는데도, 그림이 마치 살아있는 이야기처럼 내게 말을 걸어오며 읽히기 시작했다. 섬세하게 표현된 스웨터 그림을 볼 때면, 마치 내가 그 스웨터를 한 땀 한 땀 짜 내려가듯 눈으로 그 결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 문양이 어찌나 정교하고 아름다운지, 문양 하나만 한참을 바라보고 있어도 전혀 지겹지가 않았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천천히 넘길 때마다, 나는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을 조용히 눈에 담았고, 마음으로 읽었다.


그렇게 그림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느새 깊은 위로를 받고 있었다. 혹여 마음이 너무 어려워 더 이상 빼곡한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림책을 펼쳐보라고 권하고 싶다.




추천 책 - 송기두 작가님 <어쩌면 문 너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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