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원균
二十三日戊申 陰而不雨 朝右水伯來見 食後元水 使來 順天光陽加德防踏亦來 早朝 所非浦 永登臥梁等來見 元水使 則其爲兇險 無狀 兇險無狀 崔天寶自陽花下來 細傳唐兵之奇 兼傳調度御史簡與公事 卽日夜還 歸
1593년 2월 23일
날씨는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아침엔 우수사가 찾아왔다.
점심을 먹은 뒤엔 원수사(원균)가 찾아왔다.
순천, 광양, 가덕을 맡은 방어 책임자들도 함께 왔다.
이른 아침엔 소비포(어느 지역 이름) 쪽에서,
그리고 영등포 만호와 와량이라는 사람들도 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원수사(원균)라는 자는 정말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는 짓이 너무 위험하고,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 장군은 이 사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냄)
그 뒤에 최천보가 양화라는 지역에서 내려왔다.
그는 명나라 병사들에 대해 아주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리고 조정에서 온 관리(조도어사)가 전한 중요한 공문도 함께 전해주었다.
그날 밤, 그는 다시 돌아갔다.
二十四日己酉 晴 曉牙溫簡及家書幷修送 朝發行 到永登前洋 雨勢大作 勢不能直抵 回棹而 還漆川梁 雨止 與右水伯李令公順天․加里浦․成珍島 蕩花穩話 初更造船器俱入送事 牌字及興陽 關字成送 粮九十升 貿雌髥而送
1593년 2월 24일
날씨는 맑았다.
새벽에 온양과 아산에 보낼 편지, 그리고 집에 보낼 편지를 함께 써서 보냈다.
아침에 출발해 영등포 앞바다까지 나아갔으나
갑자기 큰 비가 쏟아져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배를 돌려 칠천량으로 되돌아왔다.
도착하자 비가 멎었다.
그곳에서 우수사 이영공(이억기)과 함께
순천, 가리포, 진도에서 온 사람들과 만나 배를 띄우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되기 시작할 무렵,
새로 만들 배에 필요한 부속품들과 장비들이 도착했다.
흥양관에 보낼 공문도 써 보냈다.
쌀 아홉 말도 함께 도착했고,
암컷 염소 한 마리와 가죽을 물물교환하여 보내주었다.
二十八日癸丑 晴且無風 曉發 到加德 則熊川之賊擁縮 略無出抗之計 我船直向金海江下端禿沙伊項 而右 部報變 則諸船張帆直指 回擁小島 則慶尙水使軍官 及加德僉使伺候船幷二隻 出沒島嶼 其情態荒唐 故縛來送于嶺南水使 則水使大怒 其本意皆在送軍官 搜得漁採人首故也 初更 豚兒苒來 宿于沙火郞
1593년 2월 28일
날씨는 맑고,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새벽 일찍 배를 띄워 가덕으로 향했다.
가덕에 도착하니 웅천의 왜적들은 움츠린 채 숨어 있기만 했고,
싸울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김해강 하류 끝, 지금의 부산 녹산동 독사리목까지 곧장 나아갔다.
그런데 그때,
우측 부대에서 급히 변고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모든 배들이 갑자기 돛을 달고, 혼란스레 작은 섬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눈앞의 적보다 더 놀라운 광경이었다.
무슨 일인지 확인해보니,
경상우수사 소속의 군관들과 가덕 첨사가
각각 배 두 척씩을 몰고 섬 사이를 숨어 오가다
아군을 놀라게 한 것이었다.
전장 한가운데서 아군이 아군을 놀라게 하는 일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태도는 너무도 무책임하고 어처구니없어서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군율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나는 곧장 그들을 붙잡아 영남수사 원균에게 보냈다.
그러자 원균이 크게 분노했다.
하지만 그 분노는, 진심으로 군율이 무너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든 행동이 바로 자신이 지시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인 내가, 그의 뜻을 가로막고 문제 삼았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알고 보니, 원균은 군관들을 섬 사이로 보내
어부들이 건져낸 왜적의 머리를 수색하라고 시켰던 것이다.
실적을 위해 백성까지 동원하는 그 무리한 작전을
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밤이 깊을 무렵, 아들 염이 찾아왔다.
나는 그날 밤을 사화랑에서 묵으며 복잡한 마음을 달랬다.
전쟁의 현장에서는 오직 승리만이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전쟁을 치르는 군대 안에서도 사람들의 욕망과 정치적인 갈등이 얽혀 있습니다.
원균은 조선 수군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던 장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언제나 큰 고민거리가 있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던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너무나 큰 명성을 얻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여러 차례 해전에서 승리하고 백성들의 신망을 얻은 이순신에 비해,
원균은 상대적으로 전투 성과가 부족하다는 압박감과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전쟁에서 세운 공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적의 머리 숫자였습니다.
적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바쳐야만, 명확한 증거로 인정받아 공을 세우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은 전쟁터의 군인들을 전투의 승리 자체보다
적의 머리 수집에 집착하게 만드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원균 역시 그런 함정에 빠졌습니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공을 세워야 했고, 심지어는 어부나 백성들이 건져낸 왜군의 머리를 억지로 끌어모으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런 원균의 행동을 이순신은 결코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이순신에게 전쟁은 백성을 지키는 숭고한 책임이자, 군의 질서와 원칙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원균의 행동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도를 넘은 일이었습니다.
1593년 2월 28일, 원균의 군관들이 작은 섬들 사이에 숨어서 사람들을 끌어모아 머리 숫자를 채우려던 일을 이순신 장군이 엄격히 제지하고, 관련자들을 체포하여 원균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이에 원균은 크게 화를 냈습니다. 원균이 화를 낸 이유는 단지 자신의 부하가 혼이 나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 지시한 일을 이순신이 직접적으로 방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날의 사건은 단순한 군율 위반 문제가 아니라, 전쟁 속에서의 정직과 권력, 명예와 원칙 사이에서 벌어진 장수들의 충돌이었습니다. 원균이 이순신에게 화를 낸 이유는 결국 ‘적의 머리 숫자’라는 표면적인 공로 뒤에 숨겨진 그의 불안과 욕망, 그리고 권력을 향한 집착 때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