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피안의 성1
4.피안의 성1
삼한사온이라는 겨울 날씨가 적확하게 맞는 삼한의 어느 날, 방에 웅크리고 있던 미영은 원장실로 불려 갔다.
"미영아! 너 이제 고등학교도 졸업했으니 나가서 자립해야 한단다……."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새삼스러운 것도 없었으나, 막상 나가야 할 때를 맞이하니 뜨악하기만 했다.
"미영아, 여그서 동생하고 살고 있그라이! . 허믄 너그 엄마가 돈 벌어서 데불러 올 거니께 알긋자 ?"
이장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보육원에 들어온 뒤, 네 살짜리의 일곱 살짜리 보호자 미영은 살뜰하게 동생을 돌보며 원생들로부터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돌아와 보니 동생은 보이지 않았고, 돈 많은 사장님이 공부시켜 주려고 데려갔다며 크면 다시 돌아올 거라는 말을 원장에게 들었다. 미영은 엄마가 오면 동생을 잃어버렸다고 혼날 것 같아, 엄마가 오기 전에 동생이 먼저 돌아와야 한다는 쓸데없는 생각에 걸핏하면 울곤 했다. 동생이 다시 올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순진무구한 미영은 원장의 말에 따라 훌쩍 자란 이날까지 동생이 오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동생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고, 이제 자신도 보육원을 나가야 할 때가 되었지만, 그런저런 생각들이 쉬 보육원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열아홉 살 여자아이의 자립은 만만한 게 아니란 걸, 먼저 나간 원생들을 보며 느꼈기에 독립이 망설여졌다. 그러나 버틴다고 나가지 말라고 할 원장도 아니었고, 규정을 따르자니 두려움이 앞서고 딱히 이렇다 할 대책 없이 방에서 뒹구는 날들이었다. 또 엄동설한도 몸과 마음을 보육원에 더욱 얽매이게 했다.
새벽부터 내린 눈이 아침이 되자 함박눈으로 변했다.
"미영아! 너 취직자리 못 구했으면 언니랑 일해보지 않을래?"
늦은 밤 몰래 새겨놓고 간 세 살 위 언니의 눈발자국들이 감쪽같이 사라질 즈음, 잠에서 깬 미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당장 보육원을 나가야 했기에 언니의 제안에 귀가 솔깃하긴 했으나 마음은 우왕좌왕이다. 원생들의 뒷말에 의하면 언니는 건달과 동거하며 낙태를 하기도 했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경찰서에도 수시로 드나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저런 연유로 삶의 방편을 모색하지 못한 채 덧없는 날들이 계속됐고, 보육원 밥은 자금자금 모래가 씹히는 듯했다. 원장의 채근도 늘어갔다. 결국, 여러 날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언니, 딱 일 년만 해도 될까?"
일 년이라고 못 박은 것은 다방 레지라는 직업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와 비례해 돈벌이가 괜찮다는 말도 들었기 때문이다. 사회 초년생으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첫걸음이지만,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자기 합리화로 일 년을 가소롭게 여겼다. 일 년만 악착같이 벌면 고향에 가서 기반을 잡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보육원에서 자랐지만, 해변으로 떠밀려 오는 조개 쭉정이처럼 마지못해 찾는 고향은 아니고 싶었다.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미영은 원장에게 부탁하여 알아낸 고향 집에 엄마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하여 갔을 때, 여전히 부재중인 엄마 소식을 들었다. 이장 할아버지도, 또 다른 동네 어른들도 미영 엄마의 부재에 언급을 회피했다. 미영이 일곱 살 때까지 살았던 집은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고, 벌레들의 안식처가 되어 있었다. 미영이 슬며시 집안에 발을 디디자 느닷없는 인적에 놀란 쥐들이 꽁무니를 빼느라 소란스럽다. 집안 높은 곳 구석구석에는 기하학적인 올가미를 쳐놓고, 나는 것들이 걸려들길 바라는 거미들의 본새가 동생을 기다리는 미영의 모습처럼 하염없었다.
뒤란에는 허리까지 올라온 잡초들이 무성했고 장독대 위에는 깨진 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미영이 그중 온전한 독의 뚜껑을 열자 케케 묵어 말라비틀어지고, 물질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것이 세월 저쪽에서 엄마와 함께 존재했음을 알게 했다. 또 다른 독에서는 검은 간장이 일렁이며 햇살을 들이더니 눈을 시울케 했다. 문득 곰삭은 기억 한 자락이 의식을 비집고 돋아났다.
자고 일어났을 땐 이부자리에 흠뻑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미영은 살며시 방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다행히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미영은 재빨리 축축한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가 이 장독에 숨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해묵은 간장 같은 기억이 사실적 경험에서 나온 건지, 또는 고향 집 등속으로부터 유년의 삶이 어렴풋이 보인 환상인지 유추해 보았지만, 환상이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선명한 그림에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기억 한 자락에 엉겨 붙어 시나브로 부풀어갔다. 그렇게 방학 때마다 찾아갔던 고향에 미영은 삶의 방향을 고착시켰다. 그리고 보육원을 떠나야 할 때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니, 몸만 가져갈 수는 없었다. 심산한 몰골로 돌아간다면 고향 사람들조차 자신을 천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언니에 대한 무성한 뒷말들을 무시한 것이다. 고향에서 의지할 수 있는 만큼만 벌어 가계를 다시 열고 소박하게 살 부푼 꿈에 젖어 딱 일 년만 참고 견디리라 마음먹었던 터였다. 고작 요정도의 목표가 부품 꿈에 속한다면 타인의 조소를 받겠지만, 미영으로서는 고아라는 자신의 처지가 왁자지껄한 세상에 주눅 들었고, 엄마가 그리운 애절함이 귀향의 목표를 소박한 꿈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양아! 부동산에 커피 네 잔 배달이다….”
미영이 탄 스쿠터가 앵앵거리며 쏜살같이 내뺀다. 보육원을 나온 지 삼 개월째, 미영은 다방 일이 재미있기까지 했다. 다방 레지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도 슬그머니 달아났다, 염려했던 몹쓸 손길도 뻗쳐오지 않았다. 나이 많은 손님들이 예쁘다며 엉덩이를 한 번 철썩 치는 게 고작이었다. 그것 또한 대가가 있었는데, 그 소소함은 전혀 소소하지 않았다. 종일 쉴 새 없는 움직임에 다방, 셔터가 내려질 즘이면 몸이 파김치가 됐지만, 이에 상응하는 벌이는 다방 일을 일 년에서 몇 개월은 빼도 될 것 같았다.
"오늘 하루가 또 갔네! 오늘은 얼마를 벌었나 볼까?"
청소를 마치고 다방에 딸린 방에 들어온 미영이 주머니마다 쑤셔 넣은 지폐를 꺼내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장판을 들추어 납작 엎드려 있는 통장을 일으켜 한 장 한 장 넘겨보다 여백이 얼마 남지 않음에 가슴에 품고 행복해한다. 고향 섬 집이 눈에 아른거린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몰려가면 모래밭에 조가비 몇 덩그러니 남아 멀어져 가는 파도 소리에 애달파하는 고즈넉한 겨울 바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제아무리 대지를 녹일 듯해도, 넘실대는 파도에 몸을 맡기면 바다가 여름을 잡아먹는 곳. 그런 모든 것을 떠올리기만 해도 희열이 일었다.
하지만 겨우 삼 개월의 사회생활에서 세상을 얕잡아 본 미영의 건방짐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 세상은 역시 성인으로서 첫해를 사는 미영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자가 다가옴에도 풀을 뜯느라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슴이 미영이 모습이었다. 미영은 다시 통장을 장판 아래 누이고, 솜뭉치가 된 자신의 몸도 뉘었다.
잠이 들었다 깬 것은 잠결에 다방 셔터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 소리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힘 있게 오르내리는 소리가 아닌, 드러내길 주저하는 비겁한 소리였다. 미영의 잠귀가 그 소리를 낚아챘다.
"셔터 소리 같은데 내가 걸지를 않았나?"
잠깐 생각에 잠겨봤으나 온종일 끈적한 손길에 시달린 몸뚱이가 잠을 재촉했기 때문에 생각이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영업이 끝나고 자영 언니가 주는 술을 마지못해 받아먹은 것도 한몫했다. 설마 하는 안이함을 껴안고 다시 잠이 들었다 깼을 때는 귀만 열리지 않았다. 기겁하며 용수철에서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몸은 바윗덩이에 눌린 듯 옴짝달싹하지 못했고, 일으킨 것은 놀란 정신뿐이었다. 속옷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자 장본인은 미영의 발버둥에도 아랑곳없이 맹렬하게 욕심을 채울 뿐이었다. 장본인의 참지 못하고 뿜어대는 거친 숨소리가 흥분이 극에 달했음을 들키게 했다. 미영의 안간힘은 조족지혈이었다. 이윽고 아랫도리에 뻐근함을 느꼈고, 장본인이 까닭 모르지 않는 괴성을 지르고 몸에서 떨어져 나간 뒤 암흑 속에서 목소리를 드러냈다.
"오늘일 아무한테도 알리지 마라. 소문나면 죽여버린다."
죽여버린다는 말이 섬찟했다. 일어나고자 했으나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뻐근하여 버겁기만 했다. 일어나길 포기하고 정신을 추슬러 보는데, 아랫도리의 욱신거림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서서히 몸도 깨어나고 나갔던 정신도 돌아올 무렵, 악몽을 꾼 것이길 바라며 전등을 켰다. 이부자리에는 사실적 묘사가 선명했다. 자고 일어났을 때 이부자리에 그려진 오줌 자국. 그 유년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이부자리에 낭자한 혈흔에서 그때처럼 무서움이 몰려왔다. 유년의 그 날엔 엄마의 닦달이 무서워 감독대에 숨었었는데, 이제 어디에 숨어야 할까? 이젠 몸집이 너무 커져 숨을 장독대도 없는데, 쏟아져 나오는 눈물이 지하 다방을 가득 메웠다.
일곱 살 때 보육원에 들어갔을 때부터 미영은 원생들의 본보기였다. 다른 원생들이 말썽을 피우거나 성적이 떨어졌을 때는 여지없이 원장의 입에서 미영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모범생 딱지를 이마에 붙이고 다니는 미영은 원생들에게 미움의 대상이었다. 원장은 이러한 미영을 보며 모두 미영이만 같으면 이 짓도 해 먹을 만하다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런 미영이 성인이 되어 보육원을 나와야 했지만, 성인이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고 몸만 성인일 뿐, 정신은 여전히 보육원 원생에 머물러 있었다. 그 철없음이 다방이라는 정체성이 모호한 곳에 있으면서도 손님들 앞에 엉덩이를 허락하는 잔망스러움을 보였다. 성년과 미성년 사이에서 묘하게 발산하는 부푼 육체는 남자들의 본능을 자극했고, 미영은 결국 강제로 짓밟히고 말았다.
미영이 벽에 기대앉아 끊이지 않는 눈물을 어쩌지 못한다. 머릿속에는 발설하면 죽어버린다는 목소리가 윙윙거렸다. 날이 밝고 서쪽으로 길게 누워있던 그림자들이 짧아질 즈음, 자동차들 소음이 지하 다방으로 굴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 들을 따라 빛도 들어와 지하 조명에 대적한다. 터줏대감 격인 지하 불빛은 낯빛의 침입을 막으려 안간힘을 쓴다. 파리하게 바랬던 얼굴에 핏기가 돌아온 미영은 아비규환의 흔적을 모두 지웠다. 그리고 곰곰이 목소리를 추적해 간다. 그런데 죽여버리겠다는 목소리는 귀에 박혀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부동산 김 사장의 목소리는 걸걸했고, 이삿짐센터 박 사장의 목소리는 간드러졌다. 하나하나 죽여버린다는 말에 꿰맞춰 보지만 비슷한 목소리는 없었다. 분명히 다방 사정을 잘 아는 놈일 텐데 그 목소리의 꼬리를 잡을 수 없었다. 다방으로 내려오는 셔터가 잠기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본다. 전날 밤 영업이 끝나고 자영 언니와 그의 남자친구와 늦게까지 수다를 떨었고, 자영 언니가 권한 술도 몇 잔 마신 것까지가 기억의 분량이었다.
순간, 그 목소리가 떠올려졌다.
"자영 언니?"
남자의 목소리를 추적하면서 자영을 떠올린 건 그녀의 동거남 목소리에서 죽어버린다는 말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쥐 풀방구리 드나들듯 다방에 와서 수다를 떨며 자신을 음흉한 눈길로 쳐다보던 그놈이었다. 진정되어 가던 마음이 다시 떨려온다. 나직한 어투로 뱉었던 죽여버린다는 말이 또 들려왔다.
놈이 누구이던가, 사람을 칼로 찌르고 교도소에도 갔다 왔고 이 구역 깡패로 그 누구도 상종하지 않는 인간말종이 아니던가. 미상불 이 일을 누군가에게 발설한다면 그놈의 엄포처럼 정말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신 앞에 펼쳐진 길이 온통 진흙탕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음습한 터널로 들어가는 건 아닐까, 터널 안에서 삶의 발목을 잡히는 건 아닐까.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자신의 환영이 보이는 듯했다. 이런 생각이 기우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음을 예견하는 건 보육원에서 먼저 나간 네 살 위 언니가 자영의 실체를 알려준다며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자영이 걔 술집에 팔려 간 거, 그 깡패가 빚 갚아주고 데려온 거야! 그래서 다방에 일하면서 그놈 뒤치다꺼리하는 것이고, 버는 족족 그놈이 몽땅 뺏어간다더라….”
하면서 덧붙인 말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너 자영이 절대 만나지 마, 절대….”
이 또한 헛소문이라고 여기고 가치 절하했다.
"미영아! 다방이라고 나쁜 곳만은 아냐! 열심히 일하면 돈도 빨리 벌 수 있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기도 했다. 모든 건 본인 하기 나름이지, 환경이 삶을 망가트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그 언니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들었으며, 다방 레지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이라고 일축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경솔했음을 자인하기 시작했다. 생각이 골똘해지자 그 언니의 말에 신빙성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다방에 온 지 삼 개월이 지났음에도 월급을 받아본 적이 없음이 더욱 그러했다.
"넌 아직 어려서 돈 관리가 어려울 거야! 네 월급은 차곡차곡 모아서 일 년 뒤에 목돈으로 줄 테니 일이나 열심히 일이나 해!"
"그래 얘! 너 마담 언니 잘 만난 거야. 그만둘 때 큰돈 만들어 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때 미영은 자영 언니와 마담의 말에 고마움을 느껴 눈물까지 글썽였다.
계단에 머물렀던 햇살이 다방 깊숙한 곳까지 침범해 조명 일부를 제압했다. 지하 다방 위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군상들의 소음도 다방으로 밀려들어 온다. 미영은 어떻게 해야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 그동안 못 받았던 월급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을 정리하며 종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불한당에게 겁탈을 당했다는 사실이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죽어버릴 거야!."
눈물을 닦아내며 내뱉은 말이 장본인의 죽여버리겠다는 말보다 더 서슬 퍼렇다.
"미영아! 너 왜 그러고 앉아있니? 어머, 너 우니?"
자영이 출근하여 미영의 모습을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 다방 그만둘래. 그동안 일한 월급 좀 받아줘!"
"그만두라니 왜? 무슨 일 있었어? 미영아! 오늘은 일단 일하고, 이따 마담 언니에게 말해볼게, "
모든 일은 순리에 따라야 무탈하게 해결될 거라는 생각이 들자 미영은 주섬주섬 눈물 위에 화장품을 덧칠했다. 일하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분노와 허망함이 뒤범벅되어 혼란스러웠다. 단골손님들의 과잉 친절에도 냉소적이고 무덤덤하게 굴어 이들을 머쓱하게 했다. 이불 위에 잔인하게 붉은, 선명한 잔영이 끊이지 않아 모든 손님이 잠재적 장본인으로 느껴졌다. 북적였던 다방에 한가함이 찾아오자 미영은 구석 자리에 새들새들한 몸을 묻었다. 이 모습을 본 자영이 슬그머니 옆에 와서 앉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척 위로를 했다.
지하 다방에 이미자가 와서 구슬피 운다. 이어 주현미가 와서 사랑 타령을 하고 송대관이 합세해 인생무상을 부르짖으며 신나 하더니, 이번엔 누가 오는지 다방으로 내려오는 휘파람 소리가 농밀하다. 구슬픈 사랑에 인생무상은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휘파람은 성큼성큼 걸어가 구석 자리에서 끊어졌다. 자영이 물컵을 들고 쪼르르 다가가 휘파람 옆에 앉아 희희낙락거린다. 그 모습을 본 미영은 소름이 전신을 에워싸는 공포를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영은 이 건달을 향한 죽여버리고 싶은 증오가 끓었는데, 막상 험상궂은 얼굴을 보니 고양이 앞의 생쥐 꼴이다. 미영은 방으로 들어가 오싹하게 떨고 있기만 했다. 그가 미영을 보며 또 죽여버린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신고하면 죽여버릴 거야…."
자영과 대화하며 한 말이었지만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미영을 쳐다보고 한 말이었기에 오싹함을 느낀 것이다.
"겁나서 신고 못 해! 그런데 성구 씨, 그 돈 받으면 나도 좀 줄 거지?"
그때 마담이 부르는 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배달하라는 말에도 선뜻 방에서 나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야! 뭐 하고 있니? 배달 가라니까…."
어쩔 수 없이 미영은 방에서 나가 슬그머니 건달을 바라본다. 건달과 눈이 마주치자 건달이 이빨을 이죽거렸다. 그 모습에 분노는 사라지고 겁에 질려 다리가 후들거렸다. 미영은 건달의 시선을 외면하고 커피 쟁반을 들고 다방 계단을 뛰어오른다. 힐 소리가 손님들의 고막을 찢는 듯했다. 배달하면서도 미영의 머릿속엔 건달 생각으로 가득했다. 눈앞에 그놈이 보이지 않자 두려움이 다시 증오로 변했다. 부동산 앞에 도착했지만, 스쿠터에서 내리는 걸 마다하고 곰곰이 생각에 골몰해진다. 그러더니 스쿠터를 돌려 다방으로 향했다. 커질 대로 커진 증오가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미영은 스쿠터에서 급하게 내려 다방으로 뛰어 내려갔다. 스쿠터가 맥없이 옆으로 쓰러진다. 다방 주방에는 찻잔을 소독하는 물이 설설 끓고 있었다. 미영의 앙다문 입속엔 이빨이 맞물려 으드득 갈리고 있었다. 끓는 물 속에서 찻잔을 모두 건져낸 미영은 큰 양푼을 들고 건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양푼의 뜨거움을 손이 느꼈으나 증오가 더 뜨거웠기에 이를 느낄 수 없었다.
"미영아! 이리 와 앉아…. 악…! 엄마!."
앉으라는 자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영은 끓는 물을 건달에게 끼얹었다. 그 옆에서 수다를 떨던 자영은 엄마도 없으면서 엄마를 부르며 비명을 질렀다. 미영은 아수라장 속에서도 엄마를 부르는 자영의 비명에 뭉클했다. 미영도 엄마를 다급하게 불렀던 적이 있었다. 유년 시절이었을 게다 여섯 살이었는지 일곱 살이었는지 그때도 지금처럼 아직은 봄인 것도 같았고 어느새 여름인 것도 같은 계절의 틈바구니에서 꽃들도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계절 어느 날 미영이 잠에서 깼을 때 엄마는 없었고 배꼽 함몰이 유난히 깊은 동생만 넉장거리로 잠들어 있었다. 엄마가 없음에 이내 불안감을 느낀 미영이 엄마를 불렀다. 마루에서는 할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엔 여명이 움트기 시작했고 집 앞 포구의 배틀이 출어를 서두르며 이른 아침의 고요를 깨트리고 있을 때였다.
”아이고…. 이 매정한 것이 어린것들을 두고……. 이것들을 어찌 키우라고….“
그때 꺼이꺼이 울며 쏟아내는 할머니 말이 무슨 뜻인 몰랐다. 날이 밝지도 않았는데 엄마가 집에 없는 것은 포구에 나가 돈을 벌고 있기 때문으로 알았다. 그런 데 이어 들려오는 아버지의 고함에 덜컥 겁이 났다. 그것은 아버지의 큰 소리 때문이 아니라 그 소리에 들어있는 엄마의 도망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간 것이 무서워 자영처럼 엄마를 불렀었다.
지하 다방이 순간 혼란에 빠졌다. 건달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꾸라졌고 자영도 팔딱팔딱 뛰며 오두방정을 떤다. 자신의 행위에도 분을 삭이지 못한 미영이 땅바닥에 뒹구는 건달에게 다가가 욕을 해댄다..
"야! 이 개새끼야 그 짓거리는 저지르고 태연하게 여기와? 이 짐승만도 못한 새끼야 죽어 이 개새끼야."
이성을 잃은 미영이 들고 있던 양푼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뒹구는 건달을 사정없어 내리쳤다.
"언니. 이 개새끼가 밤에 몰래 들어와 나를 강간했어!"
양푼을 던져버린 미영이 바닥에 퍼질러 앉아 통곡한다. 자영은 놀란 척했지만, 속으로는 웃고 있었다. 가식적인 표정으로 미영을 위로했다. 손님들만 뜻밖의 구경거리에 재밌어한다. 숨이 넘어갈 듯한 비명을 지르는 구급차 소리가 다방 계단을 내려온다. 성구가 119에 실려 간 뒤 자영은 담뱃불을 붙이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자신의 계획대로 어긋남이 없이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일이 잘되려니 꿩 먹고 알 먹게 생겼네? 저 쓰레기에게서 벗어나고 돈도 챙기게 생겼으니…. 미영이에겐 미안하지만, 그것도 제 팔 자인데 어쩌겠어. 그러니까 착하고 공부 잘해야 소용없어"
학교에서 핀잔 전화가 올 때마다 원장은 미영을 본받으라며 자영을 혼냈다. 그런 원장에게 혼찌검을 당할 때마다 자영은 원장보다 미영을 더 미워했다. 빨리 어른이 되어 보육원을 나가 돈 많이 벌어 행복은 착한 순 성적순이 아니라는 걸 몸소 보여주리라 각오했다. 성인이 되어 보육원을 나온 자영은 윤리의식과 도덕적 평가 따위는 배척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으로 살았다.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다. 그 덕에 보육원을 나온 지 이년 만에 적잖은 돈을 모았고 연일 흥얼거리며 옷 가게 자리를 구하러 다녔다. 그러나 반반한 얼굴과 나이까지 앳된 자영을 세상이 가만 놔둘 리 없었다. 가게 하나 차릴 돈을 벌 때까지만 무슨 짓을 해서든 악착같이 돈을 벌자 생각했고 가게를 차릴 정도의 여건이 되었으나 그릇된 무슨 짓이 발목을 잡았다. 무슨 짓을 하며 돈을 버는 동안 인면수심의 인간들이 자영의 주위에 산적해 있었고 박성구도 그중 한 명이었다. 미영을 강제로 겁탈한 것처럼 자영도 그렇고 당했고 그 무슨 짓을 하며 사는 게 법의 보호 아래 있지 않았기에 자영은 여전히 지금까지 그 무슨 짓에 얽매여 살아야 했다….
성구의 목구멍으로 넘겨진 옷 가게처럼 희망도 날아가 버리고 타락한 삶으로 전락한 것이다. 성구라는 목줄에 묶여 사육당하는 삶을 사는 동안 수없이 놈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했었고 월급을 몽땅 빼앗아 갈 때면 바득바득 대들며 차라리 죽이라고 얼굴을 들이밀어도 보았다. 그런데 도망치는 족족 잡혀 왔고 대들 때마다 정말 죽이려고 목을 조여 오는 통에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 적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던 중에 미영이 보육원을 나와야 한다는 소식을 들은 자영은 귀가 번쩍했고 머릿속이 분주해졌다. 속히 성구의 손아귀를 빠져나가야 온전히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미영을 이용하리라 마음먹게 했다. 몸과 마음이 온통 폐허가 된 마당이라 무슨 짓을 해서든지 남루한 현실에서 벗어 나리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