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그 섬에 웃는 상괭이가 산다

3. 미늘의 유혹

by 소안


3.미늘의 유혹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모달산 자락 웃개마을,

게단을 오르는 소희의 걸음이 버거워 보인다.

“다녀왔습니다!...”

소희를 맞은 것은 처마에 매달린 삼십 촉 백열등이었다. 어둑어둑 해 질 무렵, 귀가를 알리는 소희의 목소리는 공허하기만 하다. 소희의 귀가는 늘 이랬다. 사람들이 온통 팔팔 올림픽에 빠져 열광에 들끓고 있지만, 소희에게는 관심 없는 남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면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소희는 열광이 아닌 고달픈 열아홉 살을 살고 있다. "다녀왔습니다"라는 소희의 알림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 묵묵부답인 이유는 아버지는 또 어디선가 취해 있을 테고, 어머니도 식당 구정물에 손을 담그고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집으로 달음질치게 했던 허기의 감각마저 사치임을 느낀 소희의 얼굴에 설움이 눈물길을 만든다.

처마에 매달린 백열등을 올려다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소희의 모습이 애처롭다. 그런데도 그 모습에서 고혹적인 자태가 보이는 것은 한낱 교복을 입었음에도 여인의 향기가 물씬 풍겨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 볼륨을 살린 하얀 세일러복 상의 아래 플레어스커트, 그리고 발목을 살짝 덮은 앵클릿에 발등이 드러나는 검은 구두, 책가방을 잡은 두 손을 무릎 앞에 가지런히 두고 고개를 치켜든 얼굴에 흐르는 눈물은 아름다웠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한바탕 시원함에 인색하여 소희의 머리칼만 살짝 들었다 놓는다.

"소희야!"

영민은 다음 말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아!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소희에게 처음 느껴보는 가슴 울림이었다. 겨우 열아홉 살 고등학교 졸업반 영민이 사랑을 느낀 순간이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던 소희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영민의 존재를 느끼고 얼른 고개를 돌려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여, 영민아! 언제 왔어?"

"네 동생들 우리 집에 있어. 저녁 먹고 공부하고 있으니까 너도 가자!"

"난 괜찮으니까 동생들 보내줘! 고마워, 매번…."

소희가 미소로 화답하며 마루로 올라서자 영민은 쑥스러운지 한마디 하곤 줄달음을 쳤다….

"소희야, 너 오늘 무척 예쁘더라?"

영민의 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사는 소희에게 영민은 각별했다. 소희가 초등학교 때 이사 온 뒤부터 때론 오누이 같이, 때론 절친한 친구 사이로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함께였다. 학교 교재가 없거나 필요한 게 있을 때는 늘 영민이 챙겨주며 가족 같은 끈끈한 우정으로 친구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어쩌면 우정이 아닌 그 위의 감정이었기에 친구들의 시기와 질투는 당연한지도 모를 일이다. 소희의 눈물에서 묘한 감정의 울렁임을 느꼈던 영민은 그 감정이 사랑으로 승화되어 시간 위에 첩첩이 쌓여갔다. 하지만 처음 사랑이 거의 그렇듯 이들이라고 특별하지 않았다. 이들의 사랑 또한 장마를 앞둔 냇가의 뜨거운 돌멩이 같은 유한한 것이었다. 소희를 못마땅하게 여긴 영민 부모님의 자식 걱정이 이들의 사랑을 위기에 빠뜨리게 했다. 영민의 일본 유학이 결정되자 소희는 죽지 떨어진 모양으로 조릿조릿한 날들을 보냈다. 음악다방의 대형 스피커가 지고이네르바이즌을 쏟아 낸다. 고막을 찢을 듯 강렬하게 세상의 모든 슬픔을 대변하는 것처럼 절규한다. 어깨를 들썩이던 소희가 입을 앙다물더니 냉소적 태도를 보였다.

"영민아! 나에게 부담 갖지 마! 우리는 어차피 안 어울려. 난 대학도 어림없고, 이제 취직해서 돈 벌어야 해!"

"아니야, 방학 때마다 들어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 졸업할 때까지만 참자. 네가 대학 못 가는 건 내게 아무 문제가 안 돼. 그냥 넌 내 옆에서 소희로만 있어 주면 돼. 편지 자주 할게…."

다방을 나와 공원에 앉은 이들의 눈물을 장맛비가 씻겨준다.

"사랑해 소희야…! "

영민은 소희를 격렬하게 껴안고 입맞춤했다. 첫사랑의 키스를 이별이 불러왔다.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쳐 얼굴을 맞댄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헝클어 놓았다. 영민이 떠난 뒤 소희는 곰 삭이듯 앓아누웠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연애질이나 하고 이거야 원…."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있는 소희를 본 김 씨가 투덜거리며 방을 나간다….

"에고 저 왠수, 애비 노릇도 못 하면서 말하는 꼬락서니 하곤, 허구한 날 노름에 싸움질에 인간 노릇 못 하는 걸 서방이라고 한 지붕 아래 사니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얼른 죽어야 이 꼴 저 꼴 안 보지…."

부서져라 문을 닫고 나가는 김 씨의 뒤통수에 어머니가 지청구를 날렸다. 이 광경에 소희의 두 동생은 눈만 껌뻑이며 어머니의 눈치를 살핀다….

"너도 정신 차려! 영민이가 유학 갔다 오면 너를 거들떠보기나 할 것 같으냐? 얼른 취직해서 네 앞가림하고 살 생각해 이것아!"

어머니의 쓴소리에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려 베갯잇을 적신다….

"아니야! 영민이는 절대 안 변해 절대…."

그러나 엄마의 말은 틀림없었다. 영민이 일본으로 떠나고 첫 방학을 맞았지만, 소희는 영민을 볼 수 없었다. 편지 자주 하겠다는 약속도 공언이 되었고 소희의 존재는 잊은 것 같았다. 결국, 소희도 영민에게 여자친구가 생겨 자신을 잊은 것으로 생각했다. 사랑 나부랭이에 머리 싸맬 여유가 없는 소희도 돈 버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즈음 지병으로 쓰러진 어머니로 인해 허리가 꺾일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몸과 마음이 단단히 여문 소희는 사랑은 한낱 지나는 소나기일 뿐 흠뻑 젖었다면 말리면 그뿐이라 생각하며 영민을 잊어갔다.

"소희가 시집을 간다네?"

"걔가 몇 살인데 시집을 가요?"

영민은 숟가락을 놓칠 뻔했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무수히 많은 편지를 보냈거늘 답장 한번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소희로 인해 대학 첫 학년을 엉망으로 보낸 영민이 방학을 맞아 집에 와 들은 소희 소식은 충격이었다.

"사거리에서 소희 누나 만났는데 그때 형 소식 묻던데, 다른 사람과 결혼해?"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밥이나 먹어!"

어머니 김 여사의 호통에 영식은 형의 눈치를 슬금슬금 본다….

"소희 언제 만났냐?"

식사를 마친 영민은 동생과 마주 앉았다.

"한 달 정도 됐어. 어판장 사무실에서 일하나 봐. 그런데 머리도 길렀고 얼굴도 마른 듯해서 단번에 못 알아봤어. 형 소식 물어서 일본에서 학교 잘 다닌다고 했고."

"그리고 또 다른 말은 없었고?"

"별말은 안 하고 그냥 시큰둥하던데……."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여짓 대기만 하던 영식은 체념한 듯 형 편에 섰다. 실은 엄마가 매일 우체통 감시하면서 소희 누나에게 온 편지 모두 찢어버렸어!"

영민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부아가 치밀어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수없이 편지를 썼어도 답장 한 번 받지 못하게 한 어머니의 행위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갑자기 소희가 그리워진다. 일 년 치 그리움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소희 얘기를 애 앞에서 하면 어떡해요? 맘 잡고 공부하고 있는데….

"

"난 아직 그 아이와 연락하고 지내나 해서 확실하게 정리하라고 일부러 했지."

"그런데 그 소리는 어디서 들었어요?"

"소희가 어판장 사무실에 다니잖아? 그런데 이 씨가 깔깔대며 나이 많은 사람한테 팔려 간다나 뭐라나…. 도통 뭔 말인지 모르겠더군. 아무튼, 영민이 방학 끝나고 돌아갈 때까지 감시 잘해."

"걱정 안 해도 될 거예요. 소희가 시집간다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부모님 말씀처럼 사실 그랬다. 소희가 변했다고 생각하고 존재를 덜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만행을 안 순간 속히 오해를 풀고 싶었다. 소희의 결혼 얘기 또한 믿을 수 없는 공허로 방안에 떠돈다. 당장에 보고 싶었다. 그런데 영민이 오기 전에 집을 비우라는 어머니의 횡포에 쫓겨난 소희 가족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 애만 태우고 있다. 날이 밝자 영민은 소희가 일하고 있다는 어판장으로 달려갔다.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힐끗힐끗 사무실을 훔쳐보지만 단박에 눈에 띄는 소희 모습은 없었다. 연거푸 피워대는 담뱃불이 더위를 더욱 부추긴다….

"여기가 아닌가? 영식이가 분명히 여기라고 했는데, 그럼 저 파마머리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다시 한번 안을 기웃거리던 그때였다. 소희의 저의를 들고 나온 동료가 영민을 불렀다. 그리곤 만날 생각이 없다는 말과 함께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는 냉정함도 덧붙였다. 퇴근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불과 일 년이 지났을 뿐인데 소희는 많이 변해 있었다. 파마머리에 화장한 얼굴, 잘록한 허리선이 드러나는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소희는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유학 떠나기 전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영민은 걸음걸음마다 살랑거리는 소희의 치맛자락을 보며 뒤를 따라가다 울컥 비애를 느낀다. 이십 촉 백열등에 비친 소희의 눈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희 또한 아무 말 없이 뒤에서 걷고 있는 영민에게 반가움의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참아내며 점점 영민과의 거리를 늘렸다. 그러더니 걸음을 늦추며 영민이 말을 걸어오길 바랐다. 유정한 이별을 생각했으나 다시 시작될 것 같은 첫사랑의 환희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고개를 가로젓는다. 관념의 유희에 젖어 있을 시기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병원비와 동생들의 학비가 모가지를 비트는 듯했기 때문이다. 가슴은 다시 뜨거워지려 하지만 머리가 차갑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명령 내린다. 바다에 떨어진 눈처럼 짧고 미숙한 사랑은 흔적 없이 지워버리고 가슴을 초기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에 이성을 주입했다.

"그냥 가야 해."

소희는 돌연 뜀박질을 했다. 불볕더위 속이었지만 시원함이 담뿍 밴 바람이 원피스 자락을 펄럭인다. 소희가 사라진 길 저편에 시선을 고정한 영민의 모습이 애처롭다.


"오랜만이야, 상아야!"

"방학이라 들어왔구나?"

"소희가 나를 안 만나려고 하는데 무슨 일 있는지 넌 알고 있을 것 같아서..."

"너 소희 소식 모르는구나? 나도 황당해서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결혼한다나 봐!"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었어.?"

아버지의 말이 거짓일 거라고 생각했던 영민은 숟가락을 놓칠 뻔했던 것처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제 스무 살인데 결혼한다는 건 필시 사연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상아야! 넌 소희와 가장 친하니 뭔가 알 것 같은데 얘기 좀 해줘."

"나도 몰라! 자세히는, 소희에게 직접 물어봐!"

"소희가 나를 안 만나주는 거 알잖아. 그러지 말고 무슨 일이 있는지 말해줘!"

"너희를 이미 끝난 사이인데 뭘 알려고 그래? 알면 또 어떡하겠다는 것이고.."

"아니야, 소희가 오해하고 있는 거야! 일본에서 소희에게 쓴 편지를 어머니가 다 찢어버려서 내가 변한 줄 아는 거야!"

"그랬구나... 소희가 네 연락을 얼마나 많이 기다렸는데, 너 변했다고 많이 울었어. 실은 소희 아버지가 강제로 결혼시키는 거야! 말이 결혼이지 식도 안 올리고 남자네 집에 들어가 살 건가 봐!"

"강제로? 그리고 종점 이발소 하는 남자에게 간다는 게 사실이야?"

"맞아! 소희도 죽기보다 가기 싫다며 엄청 많이 고민했어! 너도 알다시피 소희 엄마 병원에 계시잖아! 소희 아버지도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 돈벌이도 안 하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인데 팔려가는 거나 다름없어."

상아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자초지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고생 많았어라. 형님!"

소희 아버지가 징역을 살고 나와 동네 건달과 구멍가게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고생은 무슨? 거기도 사람 사는 세상인데, 자주 들락거리다 보니까 살만하더라."

"이제 뭐 하고 살라요...?"

"글쎄, 뭘 하고 싶어도 돈도 없고 빚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나오니 더 걱정이 많다."

"형수님은 쪼까 괜찮소...?"

"웬걸, 요양원에 있는데 소희가 병원비하고 동생을 공부시키고 있네."

"아따 형님 정신 차리고 인자 식솔 좀 챙기소! 허구한 날 감방에만 들락거리지 말고, "

"노가다라도 하고 싶어도 몸뚱이가 성한 데가 없으니 어쩌겠나? 장사하려 해도 덕석도 없는 맨몸이라 비빌 언덕도 없고, "

"근디 형님! 종점에 이발소 하는 장 씨 알지라? 난쟁이 똥자루만 한 넘 말이라. 그 넘이 장가가고 싶어 환장을 혔는지 오는 손님마다 돈이 솔찬히 들어도 좋은 깨 중매 좀 서 달라고 난리 지랄을 한다는 구만이라."

"그 이발소 나도 가는데, 갸가 돈은 있는가 보네?"

"있다 뿐이것소! 그 이발소 건물이 그놈 꺼지라…. 그놈 애비가 일제 때 왜놈에게 붙어먹어 재산 꽤나 불렸나 봅디요! 그란디 그놈이 노름과 지집질로 모다 말아먹고 달랑 그 건물 하나 남았지라.. 근디, 그 건물도 사거리에 있응께 몇십억은 족히 안 나가겠소…?

"그 친구 가족은 없는가?"

"소문에 애비가 고향에 살고 있다고 하는디, 지놈은 죽었다는 거 보면 무슨 사연이 있지 않겠소?"

소희 아버지가 돈이 많다는 말에 솔깃해서 묻는다.

"색싯감 조건이 있을 텐데, 어떤 여자를 찾는다던가?"

"워매 형님!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무지렁뱅이가 먼 놈의 조건이 있당가요? 치매만 둘렀으면 되제.. 어케 중매라도 설라요? 아니면 소희라도 보낼라고라?"

"글쎄. 어린것이 고생하는데 좋은 자리 있으면 못 보낼 것도 없지…."

"소희는 아직 어리잖소 형님!"

"어리긴 이 사람아! 옛날 같으면 애를 낳아도 몇은 낳았을 나인데…." 소희 아버지 김 씨가 겉으로는 소희의 고생 운운했지만, 돈이 많다는 말에 흑심이 들었을 터였다. 이발소 사내를 사위로 맞아들인다면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하루가 멀다고 건달로부터 노름빚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형님! 허문 나가 주선해 볼까라?"

그 후 소희의 혼인은 급물살을 타고 진행되었다. 영민이 소희를 찾았을 땐 이미 김 씨와 이발소 사내 간에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였고, 때맞춰 집을 비우라는 영민 어머니의 요구도 있었기에 소희 가족은 번듯한 집으로 이사를 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영민의 얼굴은 분노가 치밀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럴 수가! 딸을 돈 때문에 결혼시키다니…."

상아와 헤어진 영민이 이발소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며 부르르 치를 떤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험상궂기까지 한 사내는 사십을 훨씬 넘겼을 법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낄낄거리며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

자신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이발소로 뛰어 들어가 사내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만용을 담배로 삭혔다. 눈앞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이발소 표시등이 영민의 머리를 더욱 어지럽혔다. 색깔들이 뒤섞여 뱅글뱅글 돌아가는 모습이 마치 요지경 속 혼돈의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영민은 이발소로 달려올 때의 의기양양을 잃은 채 풀이 죽은 모습으로 이발소를 벗어난다. 소희를 사랑하는 마음은 차치하더라도 행복한 결혼이 아닐 게 뻔했기에 막고 싶지만, 자신이 나서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이 영민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 한때 비라는 일기예보에 따라 하늘은 비를 뿌렸다. 비를 맞으며 걷고 있는 영민의 뒷모습이 처연하다. 비는 한때가 아니라 종일 내리려는지 점점 거세졌고, 빗소리에 맞춰 영민의 슬픔도 꺽꺽거린다.

"소희야!"

등 뒤의 영민을 본 소희는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

"너 꽤 끈질기다,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꼭 한 번은 봐야 할 것 같아, 또 왔어. 얘기 좀 해!"

다방 안 몇몇 손님들의 속닥거림이 영민의 귀에는 웅성거림으로 들어온다. 허공을 응시하며 말이 없는 소희 앞에 영하의 기온이 맴돈다. 서늘한 침묵이 미안했던지 소희가 먼저 방긋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미소를 짓기는 했으나 빈정거리는 말투이다.

"많이 변했네? 외국 물어 좋긴 좋은가 보다. 게다가 좋은 대학이니 오죽하겠어…? 상아가 너 만났다는 이야기 하더라. 편지 얘기도 들었어. 너의 어머니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는지……"

"미안해, 나도 영식이에게 간단히 얘기 듣고 많이 놀랐어. 그래서 오해를 풀려고 몇 번이나 너를 찾아갔던 것이고….

"나 만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우린 이미 끝났는데,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그리고 내 소식 잘 알고 있을 텐데 만날 이유가 없잖아!"

"그래, 알아! 네가 지금 어떤 상황이라는 거. 그런데 소희야! 너 이제 스무 살이야. 어떡하려고 그런 결정을 내렸어? 아무리 부모님 뜻이라지만, 네 인생도 생각해야지?"

소희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웃고 있다. 쓴웃음이다.

"다시 생각해 봐, 소희야!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리면 안 되는 거야!"

"망가뜨리는 것이라고? 내 결정이 인생을 망치는 것이라고 생각 안 해! 아직 살아보지도 않았고, 그 사람 나이도 많지만, 돈도 많아! 오히려 귀여움을 받으며 살 수도 있어!"

소희의 반박에 영민은 재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이 많은 사람과 결혼하면 안 되는 이유를 댈 수 없었고, 나이가 많다는 게 소희와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는 되지 않을뿐더러 소희 말처럼 오히려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행복하게 산다면 바랄 게 없겠지만, 왠지 네가 팔려가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편치 않아!"

순간 영민은 실언했다고 느꼈지만, 말은 이미 소희의 귀에 꽂힌 뒤였다.

"그만! 주제넘게 말 함부로 하지 마! 나갈게. 또 만날 일 없을 거야. 너도 잘 살길 바랄게!"

영민의 실언에 소희는 버럭버럭하고 나가버렸다. 영민은 눈앞에서 사라지는 소희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아야 했다. 설마 했던 말들이 소희 입에서 적확함으로 드러났음에 망연자실했다. 이 모든 게 자신 탓인 것 같아 자책감까지 느껴졌다. 그런 마음에 악의 소굴에 빠진 소희를 구하려는 기사라도 된 양 잔망을 떨며 동분서주했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결국, 소희의 결혼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지만, 결혼이라 하기에는 민망하기만 했다.

사진을 찍고 혼인신고를 한 후, 이발소 건물 4층에 있는 사내의 집에 들어가 사는 게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의 전부였다. 어쩔 수 없는 영민은 소희의 잔재를 털어내지 못한 채 일본으로 돌아갔다. 소희도 영민이 변하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마음의 동요가 없지는 않았으나, 영민 어머니의 행위에서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바, 영민을 외면해야 했다. 그런저런 생각들이 아직은 여물지 않은 소희의 마음을 파고들어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덥석 미늘 깊은 바늘을 물고 만 것이다.


4. 피안의 성

삼한사온이라는 겨울 날씨가 적확하게 맞는 삼한의 어느 날,

방에 웅크리고 있던 미영은 원장실로 불려 갔다.


이전 05화(장편소설) 2-5 그 섬에 웃는 상괭이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