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그 섬에 웃는 상괭이가 산다

4. 피안의 성

by 소안

속히 성구의 손아귀를 빠져나가야 온전히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미영을 이용하리라 마음먹게 했다. 몸과 마음이 온통 폐허가 된 마당이라 무슨 짓을 해서든지 남루한 현실에서 벗어 나리라 생각했다.

미영이 다방에 온 지 삼 개월째였다. 일도 능숙해졌고 돈 모으는 재미에 여우라 불리며 잔망을 떨던 미영은 그렇게 성구의 먹잇감이 되었다.

"성구 씨 미영이하고 다방에서 한잔했는데 미영이가 취해 쓰러졌어."


노리고 있던 먹잇감을 마다할 늑대는 없었다. 계획대로 자신에게 달라붙은 기생충을 미영에게 떠넘기려는 의도는 기대치를 벗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기둥서방을 자처하며 몇 년 동안 착취해 갔던 돈도 챙길 수 있으니 이것이 금상첨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담배꽁초를 손가락으로 튕겨낸 자영이 성구의 병실로 들어간다. 온몸이 붕대에 감긴 건달이 눈만 빼꼼히 드러내고 자영에게 무어라 입을 꼬무락거렸다. 자영은 성구의 입에 귀를 바싹대고 말을 낚아채려 애쓴다..


"그년 도망 못 가게 잡고 있어 치로 끝나면 죽여버릴 거니까!"

"미영이 경찰에 잡혀갔어!"

이 말을 들은 건달은 또 뭐라고 입을 씰룩거렸다.

"뭐라고 미영이 경찰서에 잡혀갔다고? "

자신의 강간 사실이 드러나면 받아야 할 돈도 못 받고 일이 허사로 돌아간다는 것을 자영은 알고 있었다.


"이미영 씨,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지 말고 말을 하세요. 겁낼 거 없어요! "

오스스 떨고 있기만 할 뿐 도통 말을 하지 않는 미영에게 경찰이 물 잔을 건넨다.

조사하는 경찰의 말투에 미영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대하는 애틋함이 가득했다. 박성구의 신원 조회에서 수많은 전과가 드러났고 건달 생활 하는 박성구가 미영에게 몹쓸 짓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그런 경찰의 다독임에도 미영은 말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행위에 사람이 죽었고 살인자가 되어 평생 감옥살이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질려있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도 그럴 것이 주는 모이나 쪼아 먹고 물 한 모금 물고 하늘 한번 올려대며 구구구…. 또 모이 한번 쪼고 물 한 모금 몰고 하늘 올려다보며 구구구…. 이렇듯 닭장 속 닭처럼 틀 안의 삶을 살았던 미영이 경찰서에 잡혀온 것은 천지가 개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곱 살에 보육원에 들어가서 착한 아이의 표본으로 살아온 미영에겐 경찰서에 온 것만으로도 공포 그 자체이다.


"그 사람 죽었나요?"

"예? 죽다니. 박성구 말인가요? 아 그래서 이렇게 겁을 내는구먼. 죽은 줄 알고, 염려 말아요 그 정도로 사람이 쉽게 죽지 않으니까 심한 화상을 입기는 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어요!"

죽지 않았다는 경찰의 말에 미영의 얼굴엔 저승 문턱에서 도망해 온 것처럼 안도하는 빛이 역력했다. 죽지는 않았다니 상태가 어떤지 물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죽지 않았다는 말에 이번에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죽은 줄 알고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었거늘 죽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억울함에 말문이 트여 자판을 두드리는 경찰의 손을 바쁘게 했다."


"박성구 그놈이 몰래 들어와 자는 저를…….'

그랬다. 미영은 자신을 겁탈했던 법인을 찾고자 다방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용의 선상에 올려놓고 추정해 봤다. 하지만 목소리만으로 단정 짓기엔 확실치 않아. 전전긍긍하던 차 자영의 동거남 이름이 성구라는 것을 자영의 입을 통해 들었다.


"성구 씨 그 돈 받으면 나도 좀 줄 거지?"


그가 범인이란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욕심을 채우고 난 뒤 뒤 주방에서 물을 마시려고 달그락거리며 통화를 하는데 그 목소리에 성구라는 이름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나 성군데…"

조사를 지켜보던 보호자 신분으로 온 원장은 얼른 자리를 벗어났으면 하는 눈치였다. 성인이 된 아이들을 내쫓기만 했지. 취직은 했는지 범죄에 빠져 사는 건 아닌지 관심을 안 가졌고 미영이 올바르지 못한 생활을 하는 걸 알면서도 제지하지 않은 도의적 책임이 있다는 걸 원장은 느끼고 있었다. 치욕을 겪었던 상황을 설명하는 미영의 얼굴이 부끄러움에 붉어졌다.


"박성구도 조사해서 성폭행 사실이 드러나면 강력하게 처벌할 것이니 오늘은 일단 돌아가고 박성구 치료 끝나고 나면 다시 부를 수 있으니 그때 꼭 와야 합니다."

경찰서를 나오는 미영의 걸음걸이가 버거워 보인다. 경찰서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계단에 쪼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경찰 무리의 소란함이 울음을 멈추게 한다. 어디로 갈까 생각해 봤지만 갈 곳이 없었다. 다방으로 돌아가도 쫓겨날 게 당연했고 보육원으로 간다는 건 더욱 안될 일이었다. 보지 않았던가. 경찰 조사 때 보인 원장의 싸늘한 태도를,. 귀찮은 일이 생겼다는 듯 못 내 못마땅해하던 모습을,


해거름 녘 비척비척 걷던 미영이 다리 난간을 잡고 섰다. 등 뒤 분주한 자동차들의 촉박한 경적들 그것들과 어울리지 않는 요요한 강물. 고독하리만치 쓸쓸한 수면에는 하루의 끝에 매달린 잔광이 조각나 반짝인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모습이겠으나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속할 수 없는 미영은 뚫어져라 강물만 쏘아본다. "엄마……"

한 움큼 설움이 쏟아져 나와 강물 표면에 흩어진다. 미영은 엄마를 부르며 절규했다. 갈 곳이 없는 미영의 눈에 문득 난간에 붙어있는 문구가 들어왔다.


"당신의 목숨은 소중합니다. 한 번 더 생각해 보세요"

미영의 마음을 읽은 듯 선명하고 붉은 글씨가 외려 난간을 넘고 싶은 욕망을 불러왔다. 이 문구를 붙인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난간에 서야 할 만큼. 처절한 적이 있었느냐고, 죽고 싶었던 심정이 달랑 이 글자 몇으로, 돌려질 것이라 생각했냐고, 강물에 뛰어들고 싶었던 사람들이 이 문구를 보고 돌아갔을까 궁금했다. 난간을 잡고 오도카니 서 있는 미영의 모습에 지나는 자동차들이 멈칫거렸다. 하지만 그뿐 이내 급하게 사라진다. 미영의 시선은 멀리 휘황한 세상을 좇는다. 저렇게 많은 불빛 중에 자기를 위한 빛이 하나도 없음이 서러웠으리라. 강물의 표면에서 흐느적거리는 세상의 빛이 미영의 혼을 앗아갈 것처럼 일렁이고 있다. 시나브로 밤이 난숙 해질 즈음 바람이 출몰해 강물을 흔들어 댔다. 물에 빠진 가로등 불빛도 춤을 춘다 그 모습이 죄인의 목을 겨냥한 망나니의 칼춤처럼 섬찟하다. 심하게 흔들리는 머리칼처럼 가슴도 요동쳐와 삶과 죽음의 경계가 강물 위에 둥둥 떠다닌다. 미영은 상반신을 다리 난간 밖으로 내밀었다. 한쪽 다리마저 난간을 넘고 있었다, 순간 고막을 찢을듯한 경적이 울렸다. 미영이 기겁하여 털썩 자리에 주저앉는다. 저만치 앞에 가서 멈춘 화물차는 한동안 차들의 통행을 방해하더니 슬그머니 사라진다. 어이가 없었다. 죽음도 두렵지 않았던 마음에 더 큰 놀랄 일이 생기다니, 미영의 죽음이 또 실패로 끝났다.


미영은 고등학교 때 갔던 고향에서도 죽음의 충동을 느꼈었다. 이장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난 뒤였다


"너그 엄마는 바람나서 야반도주했다."

다 커서 나타난 미영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더니 보육원에 보내야 했던 정당함은 늘어놓으며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며 미안하다는 말도 했다. 동생의 안부를 묻는 말에 다른 곳으로 갔다는 미영의 대답을 듣고 꺼이꺼이 목 놓아 울기도 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미영은 이장 할아버지의 말이 미안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일곱 살 이전의 희미한 기억 속 엄마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섬 집 마루에 올라서는 순간 아버지의 술주정이 기억 속에서 빠져나왔다. 술 취해 마루에 넉장거리하고 할머니를 향해 넋두리를 늘어놓았던 게 어렴풋이 그려졌다. 그때 잠에서 깼을 때 엄마가 보이지 않아 엄마를 불렀을 때였다.


"어머니! 짐승도 제 새끼는 안 버리는디 못된 것이 저것들을 두고 야반도주했단 게요…! 저것들 어찌 키운다요…?

그때 희미하게 떠오른 기억들이 이장 할아버지의 말에 신빙성을 부여하게 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죽고 싶었다. 보육원을 나와야 할 시기는 다가오는데, 뭘 하고 살아야 할지 정립되지 않은 삶의 방향에 고향 섬에서 오히려 삶의 의지가 꺾였었다. 그때는 강물이 아닌 방파제에서 바다를 무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에는 검푸른 바다가 거대한 물거품을 일으키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방파제에 부딪힌 물기둥은 미영을 삼켜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키보다 몇 배 높이 솟았다. 그러함에도 죽고만 싶었던 미영은 바다가 그러거나 말거나 오도카니 서서 파도에 대적했다. 마침맞게 사람 하나 없고 죽기에 딱 좋았다. 슬픔이 의식을 비집고 들어와 눈물을 쏟게 했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려던 찰나였다. 죽고 싶었던 미영에겐 다행이라 해야 할지, 어마어마한 파도가 미영을 덮쳤다. 미영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다로 끌려 들어갔다. 하지만 발아래에 아무것도 디뎌지지 않는 상황이 의식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죽고 싶다는 생각에 파도에 맞섰던 미영. 하지만 파도의 희생양이 되자 의식이 죽지를 파닥거리게 했다.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휘저었다. 방파제가 눈앞에서 멀어졌으나 갯바위는 가까이 있었다. 미영은 갈매기의 비행처럼 우아하게 바다를 지배해 갔다. 느닷없이 나타난 상괭이 가족이 미영을 인도하듯 갯바위를 향해 유영했다. 바다는 미영을 삼키기가 버거웠는지 슬그머니 뱉어냈다. 갯바위를 향한 미영의 자맥질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 아닌 삶을 즐기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갯바위를 붙잡은 미영은 발아래 숨 죽어가는 바다를 바라보며 엄마를 부르며 오열했다. 섬 아이들에게 수영은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놀이였기에 바다는 미영을 삼키지 못했다 어쩌면 자발적인 목숨의 단절이란 걸 알기에 거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미영은 생각했다. 다음에 죽고 싶을 때는 물에 빠져 죽을 생각은 하지 말고 확실하게 죽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화물차의 경적 소리에 몸을 거둬들인 미영이 자살 방지 문구를 쳐다보며 다리를 떠난다. 미영은 죽음과 두 번째 이별했다.


"누구시죠?"


귀티가 물씬 풍기는 중년 여자가 뱁새눈을 뜨고 물었다.


"여기 나올 사람 대신 나왔어요! 물론 그 사람이 보냈고요. 다쳐서 병원에 입원 중이라."

"그걸 어떻게 믿나요?"


뱁새눈 여자가 자영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자영은 전화를 걸어 여자에게 건넸다. 한참 동안 통화를 하고 난 뒤 여자는 상황을 수긍하고 펜을 내민다. 각서를 쓴 자영이 지장을 찍어 여자에게 건넸다. 여자는 자영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봤듯이 각서도 위아래로 꼼꼼히 들여다본다. 각서라는 뻔한 단어의 조합을 글씨 한 자 한 자 되새김질하는 듯했다. 명품인 것 같은 토트백에 각서를 넣은 여자가 종이백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순서가 그러하듯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주저한다, 자영이 백에서 봉투를 꺼내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자는 봉투 속 사진과 필름을 허공에 비춰보더니 일언반구 없이 촘촘히 사라졌다. 여자가 사라지자 자영도 부랴부랴 다방을 뛰쳐나갔다. 하이힐 소리가 경쾌하다. 터미널에 도착한 자영이 매표소 창구에 지폐를 들이민다.


"연포행 제일 빠른 거 주쇼이…. 오메 먼 사투리가 나온다냐? "


일곱 살 무렵 버려진 곳이 연포의 어느 교회였다고 보육원 원장에게 들었다. 하여 연포가 고향이겠거니 하고 연포행을 결심한 자영. 어릴 적 잠깐이나마 연포의 세월이 묻어서일까.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유년 시절 언어에 회귀본능일 테다.


"고향으로 돌아가니까 절도 사투리가 나오는 구만."

중얼대는 소리에 눅눅한 애잔함이 묻어있다. 좋은 남자 만나 아이들 낳고 알콩달콩 살고 싶었던 희망은 결코 과한 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극히 평범한 희망이었기에 자신에게도 합당할 것 같았다. 그런데 사회라는 옷에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 그 꼴이 사나워졌다. 그 탓에 평범하게 살고자 했던 삶마저 그야말로 꿈이 되어버렸고 자업자득이라고 했으나 자업 속에 들어있는 억척이 너무 억울해 어떻게 하면 현실에서 탈피할 수 있을까, 온갖 술수를 부렸다.

"그래 봐야 한계 안에서의 술수는 성구의 올가미만 두텁게 했다."


갑충으로 변신한 그레고르 잠자가 자영이었다. 사람으로 변신하여 자유를 찾으려는 원숭이 피터의 모습이기도 했다. 변신으로 자유와 소소한 꿈을 찾으려는 그 몸짓은 처절했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세상과 성구에게 달려들며 작은 구멍이라도 찾으려 혈안이 돼 있었다. 덕분인지 비록 올바르지 못한 방법이지만 비루한 삶에서 빠져나왔고, 자영은 평범한 삶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며 슬며시 미소 짓는다. 성구가 처한 상황에 짜릿함을 느꼈을 테다. 버스 유리창에 놈이 황당해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붕대에 싸인 얼굴은 울그락불그락하겠지? 미라 같은 몸으로 침대에 붙어있지 못하고 일어났다 누웠다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할 것이고, 벽시계만 주구장창 올려다볼 거야. 연신 욕지거리를 해대는 통에 병실 사람들은 불안해할 것이고. "이 쌍년이 내 돈 들고 튄 거야! 이년 잡히기만 하면 죽어버린다". 이러며 팔딱팔딱 뛰겠지."


자영의 생각처럼 성구는 병실에서 절망에 빠져 있다.

자영의 영혼까지 탈탈 털어 자신의 삶을 건사했던 것에 보기 좋게 복수를 당한 셈이었다.

성구의 낯빛이 깊어가는 밤하늘처럼 먹빛이 되어간다. 병원비와 조직폭력배들에게 갚아야 하는 노름빚 등이 태산 같은 걱정으로 가슴을 짓누른다….



"이미영 씨! 특수폭행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됐습니다."

억울함을 토로해 봐도 소용없었다. 성구가 미영을 강간했다는 증거보다 미영의 자발적 허용에 의한 성관계라는 증거가 더 차고 넘쳤다. 그 증거 속에는 자영의 진술에 의한 매춘행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구에 대한 미영의 폭력은 화대를 지급하지 않은 앙갚음으로 최종 결론이 났다. 판사 앞에서 울고불고 하소연해 봤지만, 미영의 행위는 범죄의 중대성을 봐서 실형이 불가피하다는 판결을 바꾸는 데 별 소용이 되지 않았다. 유일한 보호자였던 원장도 등을 돌렸다. 보육원의 희망이고 원생들의 본보기라며 그토록 살뜰하더니, 성인이 되어 나간 뒤의 일이라며 사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달랑 정상참작 요지의 탄원서 한 장 제출해 준 게 전부였다. 성공하면 잊지 말아야 한다며. 엄마를 자처하며 아양을 떨더니, 파국을 맞은 미영에게 돌아올 게 없음을 느꼈으리라. 어릴 적부터 싹수가 옳은 방향으로 노랗던 미영을 지켜보며 성공할 것 같아 자상했던 마음이 화로 변질한 탓이기도 했을 터였다.

성인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여린 스무 살 미영의 삶에 침투한 운명은 미영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장난질 친다.


새벽의 농밀한 안개는 이십 년 같은 이 년을 지워버리려는 듯 세상을 삼켜버렸다. 미영의 얼굴엔 안개비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촉촉이 젖어 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구부정한 모습의 걸음걸이는 싸늘한 새벽의 나플거리는 옷차림 때문만은 아니다. 한기에 아기를 보호하고자 꼭 품었기 때문이다. 일 년의 수감 생활에 치가 떨린 미영이 빠르게 육중한 철문에서 떨어졌다.


"나왔냐? 고생했다."

혹시…. 하며 두려움에 쌓여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던 미영 앞에 역시 불량해 보이는 사내가 불쑥 나타나 희번덕거렸다. 얼굴 한쪽이 달처럼 보였고, 소매를 걷어 올려 드러난 팔은 다리미로 펴주고 쉬운 충돌을 일으켰다. 상의 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쳐 드러난 목과 가슴도 그 모습이다. 걸음을 막고 선 성구를 본 미영은 숨을 할딱거리며 공포에 떨고 있다. 아이를 꼭 안고 서서 발만 내려다본다. 샌들 밖으로 기어 나온 발가락들이 안개비에 젖어 있었다. 죽여버린다는 말이 뇌성처럼 귀에서 아우성친다. 꼼짝 못 하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게 추워서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성구가 미영이 떨고 있는 이유를 아는 건지 아니면 양심이란 게 가슴을 파고들었는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튕기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은 미영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 발톱의 까칠함이 불편을 느끼게 했다. 교도소에서 발톱을 언제 깎았는지 많이도 길어 있었다. 당장 잘라버리고 싶은 욕구가 솟아났다. 잘라버려야 할 건 발톱뿐이 아니라 성구도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증오심이 가슴에 불을 질렀다.


"야, 이 개새끼야. 누명 쓰고 감방살이한 것도 억울한데 새끼까지 낳게 했으니 어쩔래?


미영의 느닷없는 악다구니에 웃고 있던 성구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러지 말고 일단 차에 타라. 아기도 춥겠다."

교도소에는 미영이 갔었거늘, 성구가 개과천선을 한 것인지 미영의 험한 말도 일소에 부치고 자상한 태도를 보였다.


"이 새끼야 강간해서 낳은 아기니까 네가 키우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해!"

욕지거리를 쏟아낸 미영이 자동차 안으로 아기를 던지듯 내려놓더니 쏜살같이 안갯속으로 들어간다.


"미영아, 그게 아니고…. 미영아…!"


차 속의 아기와 뛰어가는 미영을 번갈아 바라보는 성구의 얼굴에 당혹한 빛이 역력하다. 미영은 죽어라 냅다 뛰었다. 금방 쫓아와 머리채라도 잡아챌 것 같아 온 힘을 다해 성구로부터 멀어졌다. 시내로 들어오자 안개는 한 꺼풀 벗겨졌고, 소도시의 하루를 가끔 지나다니는 택시들이 열고 있었다.

차도까지 내려서 다급하게 손을 흔들어대는 미영 앞에 택시가 미끄러지듯 멈춘다. 그러나 이내 황급히 내뺀다. 몰골이 미친년을 방불케 했을 터였기에 미영이 타기 전에 꽁무니를 내 뺏을 것이다.

당황한 미영은 뛰어온 곳을 힐끗 쳐다보곤 재빨리 골목 안으로 뛰어가 몸을 숨겼다. 저만치 교도소 입구 샛길 쪽에서 성구의 자동차가 대로로 들어서더니 길 가장자리를 탐색하듯 느리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한참 동안 어깨를 웅크리고 숨어있던 미영이 빼꼼히 도로를 바라본다. 성구의 자동차는 보이지 않았다.

미영은 긴장에서 풀려나 털썩 쪼그려 앉았다. 문득 발바닥에 알싸함을 느꼈다. 가죽 몇 가닥으로 발을 지배하고 있던 샌들 한 짝이 어디에서 벗겨졌는지 오롯이 맨발이었다. 그 발바닥을 유리 조각이 찢고 들어와 낭자한 혈흔을 뽑아낸다….

이 년 전 교도소에 가기 전에도 그랬듯이, 교도소에서 나왔어도 여전히 갈 곳이 없었다. 그런데도 여명이 터오는 도시를 쩔뚝거리며 걸었다. 자욱했던 안개는 도시를 벗어나 멀리 보이는 산모롱이에 걸려 오도 가도 못 하고 있었다. 부산하게 새벽을 걷는 사람들은 미영이 다가오자 한 걸음 비켜나 돌아보며 혀를 찬다.

머리는 안개비에 산발이 됐고, 새벽에 어울리지 않는 잠자리 날개 같은 옷차림, 피를 흘리는 맨발.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의 젊은 여자와 괜한 접촉을 했다간 버거운 일을 당할까 염려가 되었을 터였다. 성구에게 아기를 떠넘기고 미친 듯 도망쳐온 미영은 현금 인출기 앞에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딱 일 년 벌이의 금액이 잔액으로 찍혀있으니, 왜 아니 그럴 텐가. 미영은 누군가 실수했을 것이라 생각에 입금자를 확인하곤 입이 벌어졌다. 자영이라는 이름과 전화번호 앞에 놀라움과 두려움에 쩔쩔맨다.


"무슨 꿍꿍이일까?"

교도소에 면회 온 성구에게 자영의 만행을 들었기에, 또 어떤 모함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무섭기만 했다. 신고할까 생각도 했지만, 전화번호를 적은 건 연락을 하라는 암시인 것 같아 미친년 몰골로 전화 부스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어느 집 쓰레기통 속에서 마침맞은 슬리퍼라도 주워 신고 있다는 거였다.

자영이 미영의 통장에 딱 일 년 벌이의 금액을 입금한 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양심적인 행동이었다. 성구가 받을 돈을 가로채 연포로 내려온 자영은 분식집 가게를 열고도 여유가 생기자 미영이 생각났다. 자신 때문에 교도소에 갇히고, 교도소에서 성구의 아이까지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심한 자책감이 들기도 했다. 밉든 곱든 보육원에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으며 자랐기에 자신의 만행에 괴로워했다. 그리하여 죄를 조금이나마 만회하고자 남은 금액을 모두 입금한 것이었다. 미영이 교도소에서 나오면 갈 데가 없으리라는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미안해. 미영아, 너에게 큰 죄를 지었어. 그 돈은 미안해서 사과하는 뜻으로 주는 것이니 받아줘!"

"나 이 돈 받았다가 또 무슨 꼴 당할지 무서워 안 받을래."

"걱정하지 마! 그 돈은 성구에게 뺏은 것이야. 너도 받을 자격 있어. 걱정하지 말고 받아, 너도 필요하잖아!"

다음 날 미영은 한층 멋을 부리며 고향 섬으로 가는 객선에 올랐다. 고등학교 와서 죽으려고 했던 이후 삼 년 만에 찾은 고향 섬에서 미영은 섬사람들의 자자한 칭찬에 휩싸였다.


"워매!, 미영이가 인자 어른이 다 됐뿌꾸마. 그랴 여도 인자 유명해 져뿌러 살만허다. 여가 상괭이 섬이 되어 놀러 오는 사람도 많으니까 점방 조금 손보고 꾸려나가면 밥은 묶고 살거이다."


미영 남매를 보육원에 데려갔던 이장 아저씨는 노인이 되어 귀향을 반겼다. 동네 사람들도 자신들의 야박함을 자책하는지 눈물까지 그렁그렁했다.


"에그 불쌍한 것, 보육원에서 컸어도 어찌 이리 반듯할꼬. 언젠가는 제 어머니와 동생이 올 거라며 고향을 들어오다니 기특하구먼."….


고향 사람들은 미영의 맵싸했던 육지의 삶을 알 리가 없었다. 고향 섬으로 들어온 미영은 부지런하게 삶의 터전을 가꾸며 바쁜 일상을 보냈다. 섬은 미영에게 피안의 세상이었다. 폐가나 다름없었던 집은 사람 사는 온기를 품게 되었고, 세월 너머의 기억을 뽀얗게 쌓아두고 있던 구멍가게도 도시의 그것처럼 변했다.

편의점이라고 하기엔 그 이름이 민망했지만, 대영 편의점이라고 쓰인 간판이 추녀를 도두 보이게 했다. 하지만 가게의 변신에 선택받지 못한 것들이 있었으니, 그것들은 키 높은 선반 위의 물건들이었다. 언제 선반 위에 올라앉았는지 모를 대병 소주 세 병, 할머니와 엄마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물건들에 미영은 계속 가게의 터줏대감 자격을 부여했다. 최신 철재 진열대와 대적하고 있는 때가 절은 나무 선반 위 물건들을 닦으며 미영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삭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여전히 엄마의 도망은 거짓말 같고, 할머니와 아버지의 얼굴도 해무 속에서 저무는 태양처럼 기억 속 잔영으로 남아있기에 가계를 홀랑 헤집어 놓을 수는 없었으리라. 그것은 그리움과 아쉬움이 뒤엉켜진 미련이었다. 일곱 살에 집을 떠나 성인 꼬리표를 달고 고향에 돌아온 미영은 길고양이들의 안식처였고, 거미들이 점령했던 낡은 집에서 삶의 전환기를 맞았다. 극도로 저주스럽기까지 했던 자영이 고맙게 느껴지는 간사함마저 고마운 날들이었다.

길섶 샛노란 금계국과 망초꽃, 바다를 넘어온 후덥지근한 바람. 이러한 자연의 생명이 계절의 극치를 보여준다. 담장을 따라 늘어선 장미도 계절이 깊어질수록 애련하게 또는 잔인하도록 붉어진다. 어쩌면 연인을 잃은 아프로디테의 피눈물이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장미의 붉음에 애련함보다 잔인함보다 슬쩍 농염함을 부여한다면 덜 슬퍼질는지.

가게 앞 백사장에는 성미 급한 사람들의 물놀이가 섬의 한적함을 쫓는다. 미영이 섬에 들어온 지 두 번째 여름이 왔다. 어떡하든 살아지겠지 하고 의욕만 앞세운 귀향은 고향이라고 특별하지 않았다. 그럭저럭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은 가계 수입에 돈보다 심신의 여유라는 억지 이유를 만들어 사는 단조로운 일상이다. 엄마와 동생도 언젠가 고향을 한 번쯤 찾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이 미영을 섬에 머무르게 했을 것이다.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며 하루를 열고, 그 태양이 서쪽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걸 보며 하루를 마감하는 싱거운 섬 생활이지만, 미영은 이것도 퍽 괜찮은 삶이라 여기며 산다.

나른한 섬의 오후, 함지박을 들고 뒤란 텃밭에 들어간 미영의 시선에 나풀거리는 호랑나비의 날갯짓이 들어온다. 나비를 따라 고개를 쳐들자, 나비가 날던 하늘에 갈매기 두 마리가 우아한 비행을 한다. 텃밭에는 상추며 토마토며 고추를 비롯해 온갖 푸성귀들이 싱그럽다.

그중 제일 뼘 가웃 자랐지만 돋보이는 것은 앙증맞은 방울토마토이다. 계절이 푸르뎅뎅한 모습에 머물게 했지만, 속히 빨갛게 여물어 미영의 입안에서 톡 터질 날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상추를 뜯는 손아래 땅강아지가 숨을 곳을 찾아 분주히 움직인다. 발에 밟히는 흙의 감촉이 푹신하여 어릴 적 처음 카스텔라를 한입 베어 물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미영은 텃밭에 앉아 흙장난한다. 한 줌 흙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추억도 덜어진다. 흙을 한 움큼 쥐었다가 펴보니 덩어리가 그리움으로 뭉쳐져 있다. 이것들, 푸르름을 키운 것은 미영이 아니었다. 이것들을 키운 것은 태양과 바람, 비, 그리고 땅강아지였다. 그리고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미영은 기다려주기만 했다. 기다리다 보니 계절은 순환하였고, 바다가 비와 바람을 몰고 와 미영의 삶과 텃밭에 싱그러움을 주었다.

어제 이러한 계절이 떠나면 문풍지 우는 소리가 들릴 테고, 그 소리에 요원한 봄이 그리워질 때, 그럴 땐 또 바다 건너 어디쯤에서 사라졌던 모든 게 돌아오려 꿈틀거리겠지.

미영은 오는 계절마다 기다림을 얹어 세월 속에 바스러져 간다.


해변이 바라보이는 집 앞 평상에 앉은 미영이 손바닥에 큼지막한 상추를 얹고 식은 밥 한 숟가락 올려 입으로 가져간다.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다. 입을 크게 벌린 탓도 있겠지만, 소소한 행복의 만족감에 입이 찢어졌을 수도 있을 터였다.

저녁 식사를 끝낸 미영이 커피잔을 들고 해변을 바라본다.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는 저녁의 권태를 쫓기에 좋았다. 무릎을 고추 세워 턱을 괴고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싱거운 일상 중 제일 짭조름한 양념 같은 시간이다. 미영의 눈동자에 비친 바다는 선홍빛이었고 호수처럼 얌전했다 해변에는 또래 청년 여남은 명이 빙 둘러앉아 손뼉을 치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원을 그리고 앉은 무리 가운데 타 오르는 모닥불은 선홍빛 바다를 더욱 붉게 했다. 새빨간 태양 노을을 품은 바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게다가 계절 같은 푸르름 섬을 장식하고 잇는 모든 건 정열이었다 이를 넌지시 바라보던 미영은 이젤을 들고 나와 펼쳤다 캔버스에 물감을 덧칠하며 미소를 지었으나 늦가을 이파리 떨군 빈 가지처럼 쓸쓸함을 숨길수는 없었다 저들처럼 아름다운 청춘이거늘 서리서리 얽힌 삶에 비루함을 느꼈기 때문일 테다. 울지 않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파울 클레처럼, 미영도 그림을 그리며 외로움과 슬픔을 삭혔다.

섬에 두 번째 노을 잔치가 벌어졌다. 서쪽에서 발버둥 치던 석양이 사라지자 모닥불이 바다를 붉게 물들였다. 청춘 남녀의 노랫소리가 파도 소리를 위협한다.


"미영아! 어두운디 여서 뭣한다냐 ?"

"네! 할아버지, 시원해서 나와 있어요!"

"그냐…. 너그 집은 고칠 거 읍냐? 저 대학생들이 봉사 활동 왔는디 집에 고장 난 거 고쳐준다고 허니께 손 볼 거 있나 찾아보거라."


노인이 미영을 보며 애잔한 듯 이르더니 어둠으로 들어간다. 아닌 게 아니라 비만 오면 가계에 물통을 받쳐놔야 하는 게 불편하긴 했다. 가계를 꾸미는데 자영이 준 돈이 다 들어갔기에 지붕을 새로 얹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모닥불은 더욱 맹렬히 타올라 불티를 사방으로 날렸다. 그 모습이 마치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불꽃놀이 같아 그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어둠이 깊어짐에도 아랑곳없는 미영은 평상에 앉아 그들의 낭만을 부러워한다. 촘촘한 별들도 일조했다. 미영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별을 올려다본다. 그 순간 애면글면 쌓아 올린 심신의 위안이 외로움으로 되살아나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삶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삶은 오욕으로 점철되어 해변의 저들처럼 낭만도 누리지 못하는 부생이 되었으니, 어찌 또래 청춘들의 즐거움이 부럽지 않을 텐가. 젊으나 늙으나 섬에 오는 사람은 번뇌 몇쯤 뭍에 두고 올 것이다. 그런 사람들 너나 할 것 없이 섬 분위기에 심취하여 섬 처녀를 부러워했다. 그럴 때마다 미영의 속은 뒤집혔다. 쇄락한 마음도 어둑해지며 도시의 삶이 점점 그리워지곤 했다.

해변의 왁자지껄이 기세등등하게 파도 소리를 집어삼키는 이런 날은 미영 또한 심홍의 어둠 속으로 빠져 숨이 막힐 듯했다.

그들의 빙 둘러앉은 동그라미에 이빨이 빠졌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한 사람이 미영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청년은 술과 과자 봉지를 들고 카드를 내밀었다.


"죄송헌디 여근 섬이라 카드가 안 되지라..?"

"아, 그래요. 그런데 현금이 없는데 어쩌죠?"

"그럼 섬에 봉사 오신 분들이니까 저도 봉사하는 뜻으로 그냥 드릴게요!"

미영은 사투리가 창피했는지 표준말로 응대했다.

"그래도 될까요? 그럼 감사합니다."

모닥불에 얼굴이 익은 것일까. 모닥불이 빠진 바다에 세수를 한 걸까. 빨간 청년의 얼굴이 술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밤바다의 낭만에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고 미영은 생각했다. 검은 봉지를 들고 가계를 나갔던 청년이 다시 들어와 쭈뼛거린다..


"저 내일 집에 고칠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그러더니 봉지를 들어 보이곤 바삐 무리를 향해 뛰어간다. 공짜로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으리라. 청년이 나가자 미영은 낙수를 받기 위해 받쳐놓은 물통을 바라본다….


"고려 달라 그럴까?"

해변의 모닥불은 기세가 한풀 꺾여 키가 반이나 줄어들었다. 그들의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가끔 주사 섞인 고함만 파도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살아 움직여 미영의 눈에 보이는 건 그들뿐이었다. 쏟아질 것 같았던 별도 간헐적인 파도 소리도 섬을 표현했던 모든 것들의 기세가 팔 할쯤 꺾인 것 같았다. 급변한 섬 날씨가 대기 중에 촉촉함을 몰고 왔다. 곧이어 미영의 가게 어닝 위에서 따닥따닥 빗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그들이 피운 모닥불 타는 소리 같았다. 미영도 모닥불을 피우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빗소리가 듣기 좋은 미영은 어닝을 감는 것도 마다하고 빗소리를 즐긴다. 뜨문뜨문 뿌리던 비는 점점 세차게 변하더니 괴성을 지르는 바람까지 불러들였다. 그때야 어닝을 감아 들이는 미영이다. 바닷가 특유의 돌풍에 미영의 치맛자락이 아슬아슬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해변에서 놀던 그들도 뜀박질에 바쁘다. 정열적이었던 모닥불은 연기만 품어내며 맥없이 사그라들었다. 창가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는 미영의 모습이 요지부동이다. 그들 중에 있던 여대생이 무언가 가슴에 품고 가는 모습이 아기를 안고 교도소에서 나올 때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교도소에서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도 미영은 죽고 싶은 마음이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패할지언정 죽음을 시도해 볼 만한 강에도 바다에도 갈 수 없는, 죽음도 허락하지 않는 수감 생활이 심신이 썩어 들어가는 날들을 살게 했다. 그런 가운데 아기가 태어나 엄마가 되었지만, 나이와 관계없는 모성은 지리멸렬한 수감 생활을 잊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비록 원치 않은 아이였지만 열 달 제 배 아파 낳은 아기인데 세상에 나온 연유야 어떻든 어찌 신비롭고 예쁘지 않을까. 품에 안고 눈 맞추고 있노라면 눈동자 속으로 빠져들 것 같은 희열, 꼬물거리는 손과 발을 만지작대며 느꼈던 카타르시스. 이 모든 게 누더기가 된 심신을 정화해 주었거늘 어찌 보고 싶음이 가슴에 파고들지 않을 텐가.

모든 게 주어진 운명이라 생각하며 섬에서 아이와 유유자적한 삶을 살리라 마음먹었거늘 그런데 새로 시작하려는 삶에 삶이 끝났다 생각하게 했던 장본인이 나타나 순간의 증오심을 불러일으켰고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떠넘기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새 일 년이 넘어가는 날들, 아이가 얼마나 자랐을까. 불쑥불쑥 눈에 아른거릴 때마다 도리질 치며 떨쳐내 보려 애쓰지만 그런데도 하나 더 추가된 그리움에 새무룩한 날들을 사는 미영이다.

깡통 앞에 쪼그려 앉은 미영은 천정의 낙수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정말 고쳐달라 그럴까…?"


여느 때 실로폰 소리처럼 청아하게 들렸던 빗소리가 왠지 둔탁하게 또는 감기 걸린 가래 끊는 소리처럼 뜨악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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