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그 섬에 웃는 상괭이가 산다

5. 옥탑방 아래 흐르는 고해의 바다에

by 소안

5. 옥탑방 아래 흐르는 고해의 바다에

군데군데 쌓여있는 잔설이 겨울임을 증명하고 있지만 푹석한 바람이 수런대는 걸 보니 봄의 전령이 온 듯하다. 햇살마저 포근함을 주는 오후에 예비군복을 입은 사내가 어지럽게 돌아가는 바버폴 밑에서 얼쩡거린다. 이발소안을 훔쳐보기도 했다가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워 물기도 했다가. 무언가 이발소에 볼일이 있는 듯한데 섣불리 들어가지 못하는 모양이 똥 마려운 강아지 꼴이다.

그러더니 무엇을 보았는지 신음을 뱉는다. 창문 속을 훔치던 영민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소희 같지 않은 소희가 바닥에 널브러진 머리카락을 쓸고 있는 모습을 본 영민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른세수를 한다. 생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표정 없는 파리한 얼굴에 예전 소희 모습은 없었고 얼마나 많은 고역 속에 살고 있는지 겉모습만 봐도 짐작됐기 때문이다. 온갖 풍상을 겪으며 사는 너절한 삶의 모습을 본 영민의 눈에 비감함이 파고든다..

소희가 사내와 살기 시작한 뒤 영민은 휴학하고 입대했다.

소희를 잊으려는 선택이었으나 군대도 영민에게서 소희를 떼어놓지 못했다. 복무 중 늘 아른거리는 소희의 잔상에 탈영하고 달려가고도 싶었으나 그 위에 어머니의 수심 가득한 얼굴이 오버랩되어 겨우 제대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비군 복 차림으로 득달같이 달려온 영민에게 소희는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픔을 준다..

소희는 그랬다 정 붙이고 살아보면 살아지겠지 하는 생각에 무진 애를 쓰며 살았다 그럼에도 소희의 노력은 덧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상스럽고 우매한 사내는 고등교육이라도 받은 소희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것인지 걸핏하면 잘난 체 한다며 트집을 잡고 폭력과 폭언을 일삼았다. 천성부터 난폭하고 여자를 노리갯감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 사내의 인성 탓에 몸뚱어리에 멍 자국이 지워질 날이 없었다. 지옥 같은 생활은 날로 심해져 갔다.


"이년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너는 내 거야 이년아 네 년 식솔들을 내가 살게 해 줬는데 고맙다. 그래도 모자랄 판에 나를 거부해?"

사내는 소희를 강제로 쓰러뜨리고 욕심을 채웠다. 볼일을 끝낸 사내가 문을 닫고 나가면 소희는 찢어진 옷차림으로 침대에 엎어져 오열했고 며칠 뒤 사내는 또 폭력을 행사하며 소희의 옷을 찢고. 노리갯감이 되기 싫은 소위는 또 거부하며 인간 힘을 쓰는, 이러한 뫼비우스의 띠 같은 악순환은 계속됐다. 이보다 소희가 더 견디기 힘들어하는 건 이발소 일이었다.

면도 중 인면수심의 인간들 손이 은근슬쩍 허벅지 사이로 들어오는 건 예사였다.

그럴 때마다 뿌리치고 화를 내면 손님들이 가고 난 뒤 어김없이 사내의 솥뚜껑 같은 손이 뺨을 얼얼하게 했다.

"야! 이년아 그깟 몸뚱이 한 번 주무르는 게 뭐 어때서 지랄이야 장사 망치고 싶어?"


어김없는 욕설과 폭력에 머리카락 널브러진 바닥에 쓰러져 오열해야만 하는 소희,

사는 게 아니었다. 죽지 못해 숨만 껄떡이는 형국이었다. 지옥이 아마 이와 같을 것이라 생각이 드는 날들이다.

"아!! 소희야…."

손님 얼굴을 어루만지며 면도를 하는 소희의 모습에 영민은 숨이 턱 막혔다.

" 빨리 정리하고 올라와 고기와 술 좀 사 오고…."

영업이 끝났는지 사내가 이발소를 나와 사 층 집으로 올라간다. 불 꺼진 이발소 안으로 스며든 가로등 불빛에 소회의 실루엣이 아른거린다.

"소희야…!


이발소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던 소희가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누구. 아니 너 영민이?"

소희는 단박에 영민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군복 차림의 남자가 갑자기 뛰어 들어왔기에 덜컥 겁에 질리기도 했거니와 게다가 소희는 영민의 입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영민이 모자를 벗자 그때야 알아보고 문밖 동태를 살피더니 손을 이끌고 이발소를 나왔다. 첫 키스를 했던 공원에는 그날처럼 비가 내린다. 겨울비라고 해야 할지. 봄비가 맞는 것인지 아무튼 이 시기에는 백해무익한 비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영민의 출연에 어안이 벙벙한 소희는 아무 말이 없다. 삼 년 전에 헤어진 사람이기에 딱히 할 말도 없기는 했다.

"오랜만이지? 내가 왜 여기로 왔는지 모르겠어 나도 모르게 그만……."

"사람 당황케 하는 건 여전하구나? 얼마나 놀랐는지 아직도 가슴이 콩닥거린다. 너 생각나? 고3 때 처마 밑에서 울고 있는 나를 네가 보고 있었다는 걸 알고 얼마나 당황했던지…. 또 유학 가서 소식도 없다가 일 년 만에 나타났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그래 그때 생각난다. 교복 차림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 흘리는 너 무척 아름다웠지 그 모습 보고 꼼짝 못 하고 얼어붙었었어!"


소희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너 군대 갔구나! 휴가 나왔어?

"아냐 제대하고 오는 거야!"

"제대? 언제 입대했는데 벌써 제대를…."

"너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뒤 휴학하고 입대했어."

"그랬구나. 나 때문이었구나…."

"사는 건 어때 이발소 일 힘들지 않아 남편을 잘해줘…?"

"그냥 그래그래 견딜만해!"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건 짐작했지만 견딜 만하다는 말에 영민은 가슴이 아렸다. 어쩌면 도저히 못 살겠다는 말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견딜 만하다는 말이 왠지 살만하다는 말로 들렸다. 영민은 자신의 오지랖이 주제넘은 행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일었다. 소희 또한 영민에게 초라한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웠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문득. 그때 영민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 사람 나이도 많지만, 돈도 많아. 정 붙이고 살 거니까 나 잊어!"

자신이 했던 말이 비 오는 밤하늘에 공허하게 울려 퍼진다.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소희는 공원 정자의 낙수에 손바닥을 대고 얼음장 같은 빗물의 감촉을 느낀다. 가슴속까지 냉기가 전해져 왔다.

"그때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떼어놓지만 않았어도 네가 이렇게 살지는 않을 텐데…. 미안해 소희야…!"

"그런 말 하지 마! 일하느라 안 좋은 꼴 보였지만 나 잘살고 있어 동정심 같은 거 사양할게."

차가운 말투가 영민의 마음을 서겁게 한다. 소희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으나 기지사경에 놓여 있다는 걸 사윈 몸이 말해주고 있었다. 어두운 얼굴빛이 더욱 그러했다.

"이렇게 사는 게 팔자라 생각하니 살아지네?..."

돈이 많아 잘 살고 있다며 걱정 말라고 하더니 팔자가 사나워 이렇게 살고 있다는 말에 애련한 감정을 느끼는 영민이다

"영민아! 나 들어갈게. 너무 피곤해…."

영민을 알고 있었다. 물론 피곤하기도 했겠지만, 더 늦게 들어간다면 오금을 저려야 할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래! 들어가 늦으면 또 무슨 일 당할지 모르니까."

'또'라는 영민의 말에 소희의 가슴속에서 스멀스멀 울먹임이 기어 나왔다. 울컥하고 설움이 치솟는다.

"앗 뭐야?"

"어머! 죄송합니다."


손님의 턱 밑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하얀 이발 보를 물들인다.

이어 우락부락한 남자의 손이 소희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진 소희에게 사내는 욕설을 해댄다.

"야! 년아 무슨 생각을 하며 면도를 하길래 손님에게 상처를 입혀…?

상처를 입은 손님이 느닷없이 벌어진 상황에 어찌할 줄 몰라 한다. 그랬다. 상황을 만든 건 치료비 요구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남자의 술수였다. 소희의 실수를 폭행으로 응징하면서 손님을 계면쩍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면 얼굴이 밭고랑처럼 패인 것도 아니고 선혈은 낭자했으나 살짝 베인 걸을 가지고 어찌 치료비 운운하겠는가. 당사자는 오히려 황당함에 머쓱해서 하지 않겠는가?

"죄송합니다. 실수했으니 이해해주십시오. 치료비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가벼운 상처인데 치료비는 무슨…. 괜찮습니다."

소희의 입술이 터져 피가 나는 걸 본 손님이 외려 미안해했다. 이렇듯 소희를 노예였고 남자의 욕정을 채워주는 여자의 몸뚱어리에 불과했다. 유산, 낙태, 폭력으로 인해 병원과 약방을 수시로 드나들어야 했고 남자에게 구속당한 지 삼 년 만에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영민의 말처럼 사내는 일관되게 또 또를 연출했다. 또 짐승 같았고 또 악마 같았다. 또 짐승같이 굴 것이고 또 악마로 변할 걸 알기에 늘 긴장 속에서 움츠리며 사는 날들이다. 이처럼 치욕을 겪는 날에는 사내에게서 벗어나고픈 마음도 간절했다. 하지만 지겨운 가족으로 이어진 연결고리가 너무도 질겨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소희는 "살다 보면……. "이라는 말 뒤에 희망이라는 단어를 매달고 어쩔 수 없음을 위로하며 산다. 어쩔 수 없음이 무상함을 가져올 때는 밤에 홀로 공원에 앉아 소주 한잔 들이켜면 그뿐이었다. 순간에 설움을 담아 목구멍으로 뱉어내다 보면 다음 치욕 때까지는 견딜 힘이 생겼다.

"너 내가 어떻게 사는지 아는구나? 그래, 나 네 생각처럼 그렇게 살아! 알았으니까 이제 찾아오지 마! 이런 것 모습 보이기 싫어"

소희가 단호한 말투를 던지더니 벌떡 일어나 뒷모습을 보인다. 소희의 등 뒤에 찬바람이 인다. 고장 난 가로등이 재빨리 소희를 삼켜버렸다.

"소희야 힘내!"


어둠 속을 향한 영민의 외침이 쓸데없어 보인다.

영민은 일본으로 건너가 복학할 생각도 하지 않고 의욕 상실의 날들을 보낸다. 수시로 다가드는 소희 생각에 이발소로 달려가 몰래 얼굴을 보며 갈증을 풀기도 했다. 머릿속은 미친 짓이라고 꾸짖고 있지만, 가슴은 미친 짓은 그만두지 못하게 했다. 애증으로 인한 번민의 덩어리는 날로 커져만 간다.

계절을 건너가며 영민은 사랑 또는 연민. 그도 아니면 맵싸한 과거에 빠져 소희처럼 추락하고 있다. 이러한 영민의 마음을 소희도 알고 있었다. 제대 후 줄곧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자신 또한 이러한 영민에게 시나브로 젖어들고 있었고 겉으로는 매몰차게 외면했지만, 영민 생각을 지운 날이 없었다. 매일 이발소 밖에서 서성대는 걸 사내가 눈치챌까 조마조마했지만, 영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날엔 더 조마조마했다. 영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염려하는 까닭이다.

" 아니! 너 또 술 먹었니? 도대체 어쩌려고 그래! 복학할 생각도 안 하고 이 녀석아"


소희의 치욕이 반복되는 것과 비례해 영민의 음주도 하루도 거를 날 없었다. 영민도 어머니로부터 또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 날들이다. 자연스러우리만치 두 사람의 사는 모습이 닮아가고 있었다. 소희는 매일 도탄에 빠지고 영민은 매일 술에 빠지고 그 모습들이 마치 외줄 타기 하는 아슬아슬한 모습이다. 그런 가운데 영민의 만용인지 용기인지 모를 것이 겁을 잃어가고 있다. 악마의 굴에서 소희를 구해야 한다는 정의감이 불붙기 시작했다. 소희 또한 이러한 영민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지 마음 다른 곳에는 자신을 데리고 도망이라도 가줬으면 하는 요행도 영민처럼 불붙기 시작했다. 그런 마음들이 끝나지 않은 첫사랑이라고 한다면 민망함이 들겠지만 어쨌든 두 사람 가슴이 새롭게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건 사실이었다.


쉼 없이 돌아가던 이발소들이 멈췄다. 모처럼 소희의 몸과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부고를 받은 남자가 이발소에 사흘간의 휴무를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장례 끝나고 올 때까지 집에 꼼짝하지 말고 있어! 돌아다니면 가만 안 둔다.!"

사내가 급하게 집을 나서며 소희에게 엄포를 놓았다. 소희는 이 말에 아무런 거부감도 일지 않았다. 오히려 사흘 동안이나 집을 비우는 게 고맙기까지 하다. 부고의 주인과 어떤 사이인지 말하지 않아 알 수 없었으나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사내는 그 죽음의 까닭이 조문객들의 안줏감이 될 것을 예견했기에 소희에게 말할 수 없었고 동행도 하지 않았으리라. 사내와 살기 시작한 이후 처음. 그것도 무려 사흘이나 자유의 시간이 주어진 호사에 소희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사흘을 어떻게 보낼까? 밤거리도 걸어보고 티브이 하면서 눈을 박고 깔깔거려도 보고. 중국집에서 자장면도 먹어보고 침대에 누워 사흘의 자유를 그려 보는데 이게 뭐라고 기대가 됐다. 생각에 잠겨 해죽거리던 소희는 무언가 생각난 듯 벌떡 일어나 집을 나선다. 당장 오롯한 자유를 만끽하려 함인지 커피 한잔 사 들고 인적 끊긴 공원에 앉아 밤의 정취를 즐긴다. 하늘에는 칼로 벤 듯 날카롭게 잘려 휘우듬한 초승달이 애처롭게 떠 있다. 여우별 별도 도시의 불빛에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소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하늘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고등학교 마지막 겨울 방학을 앞둔 그때였다 고된 몸을 이끌고 귀가했거늘 맞아주는 이 없는 서러움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 흘렸던 게 부스럭 떠 올랐다. 그날 이후 하늘을 본 적이 없었다. 그때도 하늘엔 초승달이 외롭게 떠 있었다 소희의 머릿속이 영민 생각으로 분주하다.

세속의 질펀함 속을 유영하는 비루한 삶에 다시 파고든 영민의 존재가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게 했다. 영민이라면 이 지옥에서 구해 줄 것 같았다. 그게 자신을 향한 사랑이 아니더라도. 혹은 측은함이라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몸과 마음이 멍들어가는 날들에 진절머리가 났기에 가족이 아닌 자신부터 살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그러나 다른 마음한쪽에서는 영민까지 불행의 늪으로 끌고 들어오면 안 된다며 도리질 치게 한다. 공원에 앉아 곰곰 생각에 빠져 있던 소희가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안돼 영민 씨를 거부해야 해 영민까지 내 불행 속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어!"

공원 한편에서 고장 난 가로등이 명멸하고 있다.

그때 공원을 걷던 소희의 눈에 소주병을 입에 물고 고개를 젖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 영민아 나 때문에 네가... "


나무뒤에 숨어 영민의 모습을 지켜보던 소희가 쪼그려 앉아 흐느낀다. 조용한 흐느낌은. 오열을 가져와 공원의 정적을 깨뜨렸다. 입에서 술병을 땐 영민의 시선이 울음을 좇는다. 곧이어 울음의 주인이소희라는 걸 안 영민은 다시 소주병을 물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화산처럼 솟구친다. 고개를 들고 손톱 달을 응시하는 영민의 얼굴에도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희야!"

영민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소희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소희는 영민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강렬한 입맞춤을 한다. 영민 또한 갈증을 적시려는 듯 소희에게 스며들었다. 격정의 순간을 맞이한 두 사람처럼 밤벌레 소리도 잉잉거리며 질펀하다. 정신을 앗긴 돌연한 입맞춤은 뜨문뜨문 지나는 사람들 시선을 뺏었다. 이별했던 사 년 전보다 더 뜨거웠다.

"영민아! 나 좀 멀리 데리고 가줘 지옥 같아 못 살겠어!"

절규하는 소희의 모습이 가련하다. 그 모습에 영민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택시에서 내린 소희가 영민의 손을 잡아 이끌고 모텔로 들어섰다. 방에 들어서자 소희는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영민의 옷을 벗겼다. 욕정에 목마른 원초적 본능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짐승 같은 남자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고 지옥 같은 삶에 대한 보상심리이기도 했다. 영민 또한 다시 찾은 사랑이란 착각이 더욱 뜨거운 불을 지피게 했다. 무아지경에 빠진 두 사람은 허리케인처럼 모든 걸 날려버리기라도 할 것 같이 거셌다. 바람 한 점 드나들지 않은 새장 속에서 죽지 꺾어 파닥거리는 새처럼 나는 소희, 이러한 현실 앞에 다시 나타난 영민에게 소희는 새장에서 나와 하늘을 맘껏 나는 희열을 느낀다. 무념하게 살아온 사 년이라는 시간이 심신을 시퍼렇게 멍들게 했기에 모두 위로받는 것인지 소희는 거대한 내면의 소용돌이에 끝없이 빠져들어 갔다.

가슴은 크게 울렁거렸고, 정신은 아득했고 눈앞에는 하얀 눈에 덮인 눈밭이 끝 간데없었다. 아찔한 지금, 이 순간이 아득한 영원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희롭던 절정이 몸의 기억을 만들고 사위어가자 소희는 울음을 터트렸다. 오랫동안 서러움에 울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우는 것밖에 없었다. 소희의 울음 앞에 영민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쩔쩔맨다. 각자의 삶을 사는 이유가 명징하지 않은 것처럼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올바른 삶인지 모호한 혼돈의 사고 앞에 두 사람은 길을 잃은 형국이다.

이성을 뛰어넘었던 잔망뒤의 소희는 공허한 관념의 유희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자각하며 다시 도탄에 빠진다. 영민과 도망이라도 가고팠던 순간의 간절함도 어물쩍 사라져 버렸다. 그건 자신의 경솔함에 고초를 겪으며 살아야 하는 여러 사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영민아! 오늘 일은 잊자 너를 보자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졌어 이게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제 갈 길 가자…."

"안돼! 난 그럴 수 없어 너 그 인간과 계속 산다면 파멸하고 말 거야! 가족도 중요하지만 너 자신을 더 소중하게 생각해…!

소희는 영민이 이런 말을 해주길 은근히 바랐고 예견도 했으리라. 그 말에 다소나마 자신의 처지를 위안 삼을 수 있었고 솔깃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사내에게 가져간 돈이 감당키 어려운 금액이기에 영민의 말은 모텔방 천장에 걸려 떠돌 뿐이다.

"아! 이 사람을 어찌하면 좋을까? 나 때문에 점점 수렁으로 빠져드는 이 사람을…."

소희는 자신의 안위보다 영민 걱정이 더 크게 다가와 한숨을 뱉는다.

"고마워 영민아! 너라도 행복하게 살아 난이게 내 팔자려니 하고 살면 돼 앞날이 지금보다 더 처참하지는 않을 거야!"

그랬다. 오욕으로 점철된 날들을 살다 보니 내성이 생긴 걸까? 오롯이 횡포에 시달리는 개 같은 날들도 잘 견뎠고 외려 폭력에 대항해 악다구니를 쓰며 대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당황한 사내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언어폭력으로 대신했기에 육체의 고통은 잦아들었다. 악마에 대항하는 악녀의 모습이랄까? 살다 보니 남자의 기세도 한풀 꺾여 나름 숨통이 트이고 있었다.

영민에게 안긴 소희의 얼굴에 눈물이 마를 새 없다. 영민을 위한답시고 말은 그렇게. 제 갈 길 가자고 했지만 이대로 영민과 멀리 달아나고 싶은 속마음이 심연에서 허우적거린다.

"나 좀 구해줘 영민아!"


영민과 모텔을 나오는 소희의 뒷모습에 어떤 시선이 따라다닌다. 혹시나 하며 이를 염려했던 소희는 연신 주위를 힐끔거려 보지만 자신을 향한 시선을 잡아내지는 못했다. 어떤 시선은 두 사람이 택시를 타고 사라질 때까지 꽁무니에 붙어있었다.

'어머니! 도쿄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이제 소희는 잊고 공부에만 전념하거라! 소희는 이미 남의 사람이잖니? 너 때문에 서울로 이사까지 하게 됐으니 다시는 이곳에 얼씬도 하지 마라!.

거짓말이었다. 돈이 필요했기에 나름 묘책을 짜낸 것이었다. 일본으로 간다며 부모님에게 돈을 받아 안주한 곳은 이발소 주변 옥탑방이었다. 왠지 소희 주변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소희를 위한 아무런 계획도 없지만 소희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옆에 머물면서 이발소 창문을 통해 얼굴이라도 봐야 살아질 것 같았다. 맹목적인 사랑인지 아니면 연민에 의해 애달픔이라고 하는 게 맞을는지 모를 것들이 영민의 의식을 앗아가고 있다.

소희에게 주어진 사흘의 자유를 차용해 달콤함에 빠졌던 일들이 수시로 뇌리에 왕왕거렸다. 그 달콤했던 순간순간이 소희의 늪으로 점점 끌고 들어간다.

.

"소희야!."

또 왜 왔어? 어쩌려고 그래 너?."


이발소 영업이 끝나고 장을 보러 가던 소희를 영민이 막아선다.


"머릿속이 온통 네 생각이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나 자신이 자제가 안 돼! 나 공부하러 일본으로 간다며 집 나왔어.".

"뭐!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언제?.

소희가 화들짝 놀란듯하더니 이내 관심 없는 척 묻는다. 내심은 서운함이 가득했을 터였다.

"아니 못가! 너를 두고 절대, "

"공부하러 일본으로 돌아간다며 집 나왔다는 건 그럼 무슨 말이야?.

"방황하는 나를 보며 부모님이 속상해하셔서 거짓말했어! 그리고 아랫동네에 방 얻었어, "

철이 없다고 해야 맞을 것 같은 영민의 행동에 소희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말 일본으로 가는 줄 알고 깜짝 놀랐던 마음을 부러 태연한 척 한 건 영민에 대한 배려였다. 왜 안 그렇겠는가? 어릴 적부터 가족보다 더 따뜻했던 영민이었다. 그런 사람을 자신의 불행한 삶 속으로 끌어들인다는 건 양심이 허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마음도 있었을 터였다. 이솝우화 속 신 포도에 대한 여우의 논리처럼 "저 포도는 시고 맛도 없을 거야!" 너무 높아 손이 닿지 않으면 이렇게 생각하며 포기하는 게 현명할 것 같았고 오르지 못할 나무.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 앞에서 헛꿈을 꿀 수 없다는 자기 합리화에 빠져 영민에게 벗어나려는 자구책일 테다. 그런데도 진심인지 가식인지 모를 마음 한 자락이 자꾸만 영민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라 한다. 이러할 땐 거듭 영민을 거부해야 한다고 마음먹어 보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확실하지 않은 미래 그리고 불행한 현재. 그 틈에서 미아가 되어 길을 찾지 못한다. 확실한 건 영민이 나타나고 뒤부터. 사내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대가리를 치켜들고 있다는 거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행복하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행복이라 여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에 불행한 삶 한구석에 내몰려보지 않은 사람 없으랴마는 시간에 묻어가는 먼지에 불과한 인생인 소희 또한 때때로 미증유의 행복을 움켜쥐고 싶은 마음이 쉬 고독을 불러온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무시로 뒤를 돌아보는 날들이 늘어만 갔다. 잊히지 않는 것들의 존재로부터 속박당하기 시작했다. 짧은 화양연화가 휘적휘적 가슴을 헤집고 다녔다. 그럴 때마다 소희는 심연에 감긴 자아를 잦아 바람을 맞는다. 생각을 말아야지 했다가도 생각은 기어 나왔고 영민이 오기를 바랐다가 영민이 아주 멀리 떠났으면 했다가 온갖 마음이 수런대는 날들이다. 이런 가운데 영민의 끈질기고 진심이 느껴지는 구애는 소희를 맥없이 주저앉혔다. 살아지겠지 했던 마음이 살아야겠다는 진취적인 생각으로 변해 갔다. 그런 생각이 소희를 자연스럽게 영민의 옥탑방 계단을 오르게 한다. 뒤를 힐끔거리던 습관도 어물쩍 사라졌고 대담하게 친정에 잔다는 거짓말도 서슴없이 나오게 했다. 소희에겐 영민과 같이 있는 그것만으로도 피폐해진 삶의 명약이 되고 있었다 많은 생각을 묶어 두었던 두려움은 영민과 같이 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대담함으로 바뀌고 있다.

"동생 생일인데 이발소휴무니까 다녀올게요. 휴가 나왔는데 밥이라도 해먹이고 올게요!"

"다른 데 가려고 그러는 거 아니지?"

"다른 데 갈 때도 없어요…!"

이죽거리는 사내의 말에 대갈일성으로 응수했다. 거짓말이었지만 조금도 가책이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 사내를 증오하게 해서이다. 사 년을 시달림 속에 살아오면서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보며 자기 연민에 빠진 소희는 더 기다릴 수 없었다. 살다 보면….이라는 말 뒤에 붙어야 할 "행복하지는 않더라도 편하게 살날 오겠지" 하는 그 평범하게 살날은 도무지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동안 겪어온 사내의 성향으로 봐서 애당초 인간 되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알았다 대신 내일 아침밥만 해주고 와! 나 종일 굶기지 말고…."

이래서 인간 되기는 글렀다고 단정 지은 이유이다. 이발소를 나온 소희는 득달같이 영민의 옥탑방으로 뛰어 올라간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경쾌하기만 하다. 사내의 집으로 올라갈 때 다리에 매달았던 쇳덩이는 과감하게 떼 버린 듯했다. 울음은 내 안의 어디까지 이르러야 멈출 수 있을까 울음의 끝을 향해 억누르며 살았던 뜨악한 삶을 퉁치려 옥탑방을 오르내린다. 옥탑의 평온한 섬에서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암울함을 옥탑방 아래 흐르는 고해의 바다에 흘려보냈다. 소희에게 옥탑방 사방 열 자의 공간은 은밀하고 견고한 피안의 세상이었다. 날마다 밤은 하얗게 내려앉았고 날마다 사랑의 향기도 난만했다.

'누나 아저씨 왔다 갔어! 누나 어디 있냐고 새벽에 난리를 피고 갔어"

이른 아침 동생들이 사는 집으로 간 소희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순간 터럭이 거꾸로 일어서는 공포가 목을 조여왔다. 소희는 너무 놀라 오도카니 서서 쿵쾅거리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새벽에 사내가 다녀갔다면 거짓말하고 외박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테고 이후 일어날 일들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이 분주하다. 외박해야 했던 이유를 이리저리 궁리해 보지만 사내가 속아 넘어갈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해 낸 건 모두 핑곗거리로는 미약하기만 한 핑계 감이라 미쳐 날뛰는 사내의 모습만 떠올려졌다. 한참 동안 생각에 골몰하던 소희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중얼거린다.

"그래! 언제까지나 당하고 살 수는 없어 이제 영민 씨도 있으니까 맞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

생각이 이토록 크나큰 발전을 거둔 것은 더는 지리멸렬한 인생을 살지 않으리라 각오했고 각오 뒤에 영민이라는 존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피한다고 피해질 일도 아니고 정면으로 맞닥트리며 대응하기로 했다. 은근 오기가 발동했다.

"밤새 어느 놈하고 뒹굴었는지 말해!. 너 이년 오늘 죽어봐라!"

발길질로 소희를 엎어뜨린 사내가 앞섶을 낚아채 윗도리가 찢겨 나갔다. 브래지어마저 잡아당겨 오롯이 알몸이 드러났다. 사내가 허리띠를 풀며 멧돼지처럼 씩씩댔다. 이윽고 허리띠가 허공을 가르며 바람 소리를 내더니 소희의 몸뚱어리를 휘감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소회의 등짝이 움찔한다. 단박에 등에 핏줄 선연한 한 길이 난다. 허리띠는 또 소회의 등에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 소리가 거듭될수록 소희 몸은 무기력해지고 의식은 까무룩 꺼져간다. 소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비명을 질러대는 게 유일한 대응이다. 잘못했으니 그만하라는 사그라져가는 소희의 목소리가 공허함을 불러올 뿐. 사내는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는듯했다. 또다시 허리띠가 냉랭한 공기를 가르며 소희의 비명을 유도했다. 종말에 소희는 정신을 잃고 미동도 없다. 전라의 등에 기하학적인 줄무늬 추상화가 그려졌다. 처참함이라는 제목이 적당할 듯하다 핏빛 그림이 살아 움직인다. 피들이 서로의 영역을 넓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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