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그 섬에 웃는 상괭이기 산다

5. 옥탑방 아래 흐르는 고해의 바다에..

by 소안

종말에 소희는 정신을 잃고 미동도 없다. 전라의 등짝에 기하학적인 줄무니추상화가 그려졌다. 처참함이라는 제목이 적당할 듯하다 핏빛 그림이 살아 움직인다. 피들이 서로의 영역을 넓혀간다. "

"이년이 엄살을 피워? 쇼하지 말고 일어나!."


실신한 소희의 몸에 찬물을 끼얹은 사내는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한다. 패인 살 속으로 엄동설한의 찬물이 스며들자 쓰라린 고통에 정신이 돌아온 소희도 분노가 치솟는다. 널브러져 이를 악문 소희의 눈에 문득 유리재떨이가 눈에 들어왔다. 방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사내의 막 돼먹음에 재떨이를 비울 때마다 지청구를 중얼거렸는데. 그 재떨이가 구세주처럼 빛나고 있다. 재떨이를 보는 순간 소희는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더 맞고 있다간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연이어 사내가 허리띠를 휘두르려는 순간 소희가 재떨이를 쥐고 벌떡 일어나 사내의 얼굴을 강타했다. 단말마의 비명을 지른 사내가 얼굴을 감싸며 고꾸라졌다. 소희는 재빨리 윗도리만 겨우 걸친 채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하지만 도망쳐 나왔어도 갈 곳이 없었다. 발바닥의 감각이 신발도 신지 않았음을 느끼게 했다. 12월 세밑의 한기가 소희의 몸을 사시나무를 방불케 했다. 추위를 피해 들어간 공원 화장실에는 동파 방지용 온풍기가 켜져 있었다. 온풍기 앞에 바싹 다가선 소희는 조그만 온풍기가 뿜어내는 온기에 빠져나간 영혼을 불러들인다. 한기가 조금 물러가고 정신이 돌아오자 서러움이 통곡을 불러왔다. 목구멍을 넘어온 켜켜한 울음이 화장실에 밀생 하다. 오열에 어깨가 들썩일 때마다 옷이 등허리를 자극해 심한 통증을 느끼게 했다. 돌연 모눈종이처럼 촘촘한 이승의 날들이 덧없음을 불러와 의식을 파고들었다. 소희는 화장실 문을 잠근 뒤 윗도리를 벗어 소매를 서로 묶고 문위 물건고리에 걸었다. 윗도리는 근사한 오라고 변해 목 매달기에 딱 좋게 보였다. 오라에 목을 집어넣으며 소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어 다리에 힘을 빼고 털썩 주저앉았다. 핏빛으로 얼룩진 소희의 몸뚱어리가 무기력하게 흔들거린다. 밀려오는 졸음이 소희를 매달고 무의식을 향해 달려간다. 동생들 얼굴도 암흑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영사기빛처럼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그때 노크 노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마치 동생들이 부르는 소리로 들렸다. 때맞춰 고리가 떨어져 몸뚱어리가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이윽고 화들짝 못한 소희가 오라에서 목을 뺐다. 저하나 죽어 없어진들 대수일까 만은 자신 때문에 누나가 죽었다는 생각으로 죄책감에 시달릴 동생들 모습이 가슴을 짓누른다. 소희는 목을 걸었던 윗도리로 흠뻑 젖어있는 얼굴의 눈물을 닦아낸다.


"그래! 죽기는 왜 죽어 아직 살날이 무진장 많이 남아있는데, 지금부터라도 하늘을 올려다 보며 살면 돼!..


소희는 엉덩이를 까고 변기에 앉아 뱃속의 모든 걸 쏟아냈다. 서리리리 얽힌 비루한 삶도 뱃속의 찌꺼기처럼 흘려보내고 싶었으리라. 소희는 금방 죽음을 실행했던 자신이 엉덩이를 까고있는 민망한 행동에 조소가 있었다.


"이럴 수가....!"


영민은 소희의 모습을 보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쩔 모른다.

화장실 안 인기척은 있으나 노크에 응답이 없는 상황을 수상이 여긴 취객의 신고로 파출소에 가게 된 소희. 그 몰골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경찰의 물음에 소희는 입을 꾹 다물고 사내의 만행을 고발하지 못했다. 억울함, 그리고 허리띠의 잔인함이 느껴질 때면 법을 빌어 사내에게 벗어나고도 싶었으나 사내에 의해 뭉텅 그려 묶여있는 가족이 생각났다. 어쩔 수 없는 소희는 경찰의 닦달에도 끝내 사내의 안위를 지켜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보호자를 묻는 말에 어쩔 수 없었지만 영민의 이름이라도 댈 수 있음이 눈물 나도록 고마운 일이었고 위로가 되기에 충분했다.


"죽여 버릴 거야 이 새끼를 죽여버리겠어!~"

화를 삭이지 못하고 사내에게 달려가려고 하는 영민을 소희가 먹고 섰다. 뒤에서 허리를 껴안고 자제를 요구한다.

"안돼! 영민아 너까지 피해당하는 거 싫어 참아야 해!"

영민은 소희의 만류에 다소 진정된 듯했으나 처참한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 서글프기만 하다.


"어떻게 이런 폭력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


소희의 등을 닦아주며 영민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낀다.

옥탑방으로 온 소희는 한 달이 넘게 앓아누웠다 자면서 악몽을 꾸는지 허공에 손을 저으며 헛소리는 더럭더럭 하는 걸 볼 때마다 영민은 거대한 슬픔에 짓눌려 밤새 잠 못 들고 꺼이꺼이 울었다. 소희는 영민의 정성으로 차츰 폭행 흔적이 아물어 가고 있었지만 마음에 새겨진 상흔이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을 쏟게 했다 앞날에 대한 걱정도 표표히 옥탑방에 떠다닌다.


"이년 어디 숨겼어 말해!."

"아니. 이 사람아 여기 안 왔니까 그러나? 나도 찾고 있다네."

" 이년 바람나서 어느 놈하고 있는 게 틀림없으니 찾아오던지 아니면 내 돈 내놓으쇼"

"이 사람아 바람이라니 뭔 가당치도 않은 말인가?."
"내 모를 줄아요? 이년 나 몰래 만나는 놈 있수다. 이 연놈들 잡히기만 하면 둘 다 죽여 버릴 테니 죽고 싶지 않으면 들어오라고 하시오! 그럼 용서해 줄 거니까."


사내는 이미 소희가 영민을 만나는 걸 알고 있었다.

이발소 영업을 끝내고 술을 사러 가던 사내를 어느 영감이 불러 세웠다.


"뭐야! 우리 마누라가 어느 놈과 모텔에서 나오더라고? 영감 노망 났소 눈이 삐었소? 뭔 개소리야 "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사내가 길길이 날뛰며 영감에게 상소리를 한다. 영감은 괜히 알려줬다는 듯 혀를 차며 자리를 뜬다.

"무식한 놈 버르장머리 하곤... 저러니 지 아비도 버린 새끼 취급하지 쯧쯧..."


영감이 사라지자 사내는 사들고 가던 소주를 병채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떤지 요즘 이상하다 했더니 이년이 바람이 났어. 내 이년 가랑이를 찢어리겠어!"

사내가 부서져라 문을 닫고 나가자 소희 아버지가 동생들을 닦달한다.


"누나 어디 있는지 아냐? 너도 언니 소식 몰라?.. " 몰라요 묻지 마세요!"


동생들은 아버지에게 적개심을 품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버지 노릇 못하는 아버지가 미웠기 때문일 테다. 영감에게 소희 소식을 들은 사내는 수시로 집에 찾아가 돈을 내놓던지 아니면 소희를 데려오라며 행패를 부렸다. 그런 가운데 영민 모친 임여사도 아들이 일본으로 가지 않고 연포로 내려가 소희와 동거한다는 소문을 듣고 애만 태운다. 이를 확인하려 연포 이발소에도 가보았으나 사내가 소희대신 손님의 턱을 매만지고 있어 소문이 사실일 수도 있음을 짐작케 했다. 소희집을 수소문하여 아버지도 만났지만 임여사는 소희 아버지에게 험한 말 만 들었다. 영민 때문에 딸년 신세 조졌다는... 그리고 집안 거덜 나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는... 거기에 임여사는 딸년 등골 빼먹으며 사는 주제에 거덜 날 게 뭐 있냐며. 네 딸년 때문에 외려 내 아들이 신세 망첫다며 악담으로 응수했다.


소희가 영민의 옥탑방을 도피처로 삼은 지 네 계절째를 맞았다. 옥탑방에 눌러앉은 순간부터 소희는 저쪽 시간으로 인한 통증을 잊고 지냈다. 영민의 지극정성이 소희 자신의 현실을 망각하게 했기 때문이리라. 이 피난의 날들은 수치스러웠던 사 년을 보상이라도 하려는지 날마다 얼굴에 희색이 만연하게 했다. 살면서 이처럼 행복함에 풍덩 빠져본 적이 있었던가? 살맛이 난다는 게 어떤 건지 세상 사람들 모두 알고 있으나 자신만 몰랐던 행복을 느끼 날 들이다.
소희에게 영민의 옥탑방은 견고한 성안의 세상이었다. 옥탑방 아래 고해가 만들어내는 성난 파도도 감히 무너뜨리지 못하는 철옹성이다.. 그 속에서 소회는 영민에게 영원히 속박당하고 싶은. 욕심인지 뻔뻔함인지 모를 마음도 옥탑방에 응집되어 간다. 벌레 같거나 혹은 동굴 속 박쥐 같거나. 넌더리 나는 그따위의 삶 속으로는 또 빠져들기 싫었다. 그런데. 가끔 가족들 걱정이 소희의 안락함을 방해한다. 그럴 때마다 가슴속에 진창이 튀고 도탄에 빠진다. 자신만 살겠다고 연일 회죽거리는 꼬락서니라니.. 자괴감도 커져만 간다.

"영민 씨 도저히 걱정돼서 못 견디겠어 동생들 좀 보고 아야 할 것 같아!

"또 그놈 만나면 어쩌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야 나도 이제 폭력에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거야! 등신같이 살지 않을 거야! 이번 기회에 끝내고 싶어!.

듣고 있는 영민으로서는 그렇게 되길 바라겠만 어쩌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은 건 왜일까? "죽기 아니면....... "이라는 말은 가능하기도 하겠으나. "이번기회에....라는 말은 왠지 불가능할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맞는데 이골이 나서 폭력에 대항하는 깡다구도 보통 아니게 커졌지만 사내의 정치망 같은 그물 속 가족들은 어쩌란 말인가? 섣불리 사내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는 진퇴양난의 현실이다.

"입대 날짜가 언제니?"

:응. 누나 삼일 남았어. 내 걱정 마 군대 생활 잘하고 올 테니 누나 걱정이나 해 영민 형과도 잘 지내고!"


동생의 말에 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과연 이 난관을 헤치고 영민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자신의 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에도 판단이 서지 않는다. 게다가 너무 앞서간 가소로운 걱정이기도 했지만 영민 부모님이 과연 자신을 받아줄까 하는 것도 마음을 편치 않게 한다.

" 그런데 누나 선희가 걱정이야! 아버지 하고 단둘이 어떻게 살지? ;

" 누나가 챙길 테니 넌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알았어 친구 만나러 가야 하니까 누나도 얼른가! 그 사람 오기 전에.."

동생이 집을 나가자 소희는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린다. 그때였다 꽝 하는 하는 굉음에 소스라치게 놀란 소희가 비명을 지른다. 부서져라 문을 차고 들어온 사내와 근 일 년 만에 맞닥뜨렸다. 기겁하며 뒷걸음친 소희가 우두망활한 눈으로 사내를 쳐다본다.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귓속까지 파고들었고 소희는 공항에 빠진 듯 얼어붙었다 손에는 청소기가 잡혀 있었다. 그 손의 연약함과 달리 팔뚝엔 시퍼런 힘줄이 도두 보인다. 위기감이 모두 청소기를 잡은 팔에 살렸으리라. 소희를 노려보는 사내의 눈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검은 삿갓을 쓰고 검은 도포를 입고 얼굴엔 하얀 분칠을 한 저승사자를 떠 올리게 한다.
사내가 서슬 퍼런 말로 공포에 몰아넣었다.


"너 이년 드디어 나타났군. 네 에비가 내 돈을 얼마나 많이 가져갔는 줄 알아? 그런데 도망을 가서 딴살림을 차려? 갈려면 내 돈은 내놓고 가야지 이 씨발년아!"

씨발년이라는 욕설은 선전포고였고 이제 본격적으로 폭력이 쳐들어 올 것임을 소회는 예견했다. 씨발년 뒤에 늘 그랬기 때문이다.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방어할 틈도 주지 않은 사내는 소희의 머리채를 낚아 채 바닥에 내동댕이 첫다 손에서 기세등등했던 청소기가 벽에 부딪혀 유명무실해졌다. 엎어진 소희의 복부를 냅다 겆어찬 사내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영민에게 했던 "맞고만 있지 않을 거야!.."라는 말이 애처롭다. 두 번째 날아온 사내의 구둣발이 이번엔 얼굴에 꽂혔다. 소희는 찐득한, 기분 나쁜 그 무엇이 입안에 퍼려옴을 느꼈다. 어떤 이물질도 혀가 감각했다. 그것이 입속에서 굴러다니며 두려움이라는 소희의 정신세계를 분노로 바꿔놓기 시작한다. 몇 차례 더 사내의 구둣발이 몸을 짓밟았다. 남자의 폭력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었다. 금수도 이와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사내의 의식 속에는 오로지 소희의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관념만 가득하다. 한동안이라는 시간이 몇 곱절 더 지나가는 동안 소희의 몸은 남자의 구둣발에 이리저리 뒹굴어야 했다 그 탓에 목구멍으로 뱃속 오물이 쏟아져 나와 방금 청소한 방이라는 게 무색해졌다. 무수한 폭력을 자행했음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사내가 주방에서 칼을 들고 와 얼굴에 대고 위협했다.


"여기서 죽여줄까? 아니면 다시는 도망 안 가겠다고 약속하고 집으로 갈래?. 그 새끼도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각서 쓰고, "


칼을 보는 순간 소희의 정신세계 속에서 움츠리고 있던 분노가 벌떡 일어났다. 분노를 따라 소희도 벌떡 일어나 독기를 뿜으며 남자에게 달려든다.

"그래 이 새끼야 죽여라 죽여!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사내의 머리끄덩이를 잡은 소희가 미친 듯 울부짖었다.
그 순간이었다.

"악"

사내가 비명을 지르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사내는 방바닥에 넉장거리를 한채 자빠졌고 몸에서 검붉은 피가꿀럭꿀럭 쏟아져 나와 방바닥을 잠식한다. 소희도 몸의 나른함을 느끼며 스르르 아득함 속으로 빠져든다.


콧속을 파고드는 어렵픗한 냄새가 병원임을 자각하게 한다. 소희는 잃었던 정신을 되찾았고 침대에서 일어나려는데 팔목이 몸을 자유롭지 못하게 했다.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 침대 기둥에 포박당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건장한 남자가 들어와 다짜고짜 묻는다.

"남편을 왜 죽였죠?.
"예? 죽다니요, 그 인간이 죽었다는 말인가요? 전 죽이지 않았어요! 저를 때리며 죽이겠다고 칼로 위협해서 도망 갈려고 밀친 것뿐이에요. 그리고 그 뒤는 생각이 나질 않고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 이렇게."


24살 소희가 감내하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평탄하지 못했던 삶이 끝내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희는 자신의 삶이 억울했다. 그것은 사내를 죽였다는 누명보다 더 큰 억울함이었다. 부모님을 탓해보고, 이별했고, 잊었거를 다시 나타난 영민도 원망해보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소희의 눈에서 눈물만 뽑아낼 뿐이었다. 소희는 결국 주체적인 삶을 이끌어가지 못한 어리석음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라 생각하며 모든 것을 체념하고 인간의 조건을 포기하기도 했다.

"피고! 김소희를 징역 15년에 처한다."

15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소희의 정신을 앗아간다. 깨어났을 때 병원에서 그랬듯이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이번에는 병원 냄새는 나지 않았고 제복을 입은 사람들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문마다 쇠창살이 드리워 있다. 소희는 영민으로 인한 일장춘몽에서 깨어나 또다시 표독스러운 세월 속으로 곤두박이 첬다.

"영민 씨! 이쯤에서 각자 제 갈길 가자! 그때 유학 갈 때 그때가 우리 인연의 끝이 어야 했는데 아닌 인연을 억지로 맺으려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아 내 불행을 멈추려 널 받아들인 게 잘못이었어.."


이월 늦눈이 함박으로 쏟아져 영민의 머리 위를 하얗게 만든다. 눈처럼 멈출 기미가 없는 눈물도 엄동설한의 추위에 얼굴에서 얼어붙어 알싸한 고통을 준다.
냉소적 반응을 보이는 소희에게 쫓겨나다시피 하며 면회를 마치고 나오는 영민은 아쉬움에 연신 뒤를 돌아본다.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울컥하여 시원하게 울음 한번 뱉고픈 심정을 구치소 화단에 쪼그려 앉아 담배연기 곰곰 물고 삭혀본다. 소희 없이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어느새 가슴 뻐근한 공허가 쓰나미처럼 덮쳐온다

술 취한 영민이 열차 좌석사이를 비척이며 헤집는다. 몸도 가누기 힘들 만큼 취해 이리저리 부딪치며 다가간 기차의 연결칸, 난간에 선 영민의 담배 연기가 빠르게 부서진다. 연기처럼 뒤로 내 내빼는 겨울나무들은 기차가 스쳐지날때마다 놀라 한 움큼의 눈덩이를 떨어뜨린다. 살을 에이는 듯한 칼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어도 영민은 추위를 감각하지 못한다. 얼굴은 한기 때문인지 술기운 탓인지 불과하게 달아올랐고 몸은 흔들리는 기차의 장단에 맞춰 마치 메트로늄을 처럼 리듬을 탄다. 난간에 서 있는 시간과 비례해 바람의 사납기도 그 기세가 더욱 등등해졌다. 감정이입에 빠져있던 영민은 결국소리 내어 울었다. 멀리 나른하게 이어진 구릉과 너른 들판이 흰 눈에 덮여 황량하고 쓸쓸하다.

굉음을 내며 달리는 기차의 요란함에 화들짝 놀란 나무들이 우듬지까지 이고 있던 눈을 모두 떨군다. 그 순간이었다. 영민의 몸이 총 맞은 새처럼 파닥거리며 중력에 의해 끝 모를 곳으로 추락한다.. 의식도 명멸하더니 이윽고 어스름 사라진다. 무심한 기차는 냅다 기적을 뿜어내곤 터널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나무들은 이전의 고요를 되찾았다. 하지만 삼나무 몇 그루 기차가 남기고 간 후유증에 오스스 떤다. 발치를 물들인 잔인한 핏빛에 두려움이 일었을까. 하얀 눈을 잡아먹으며 영역을 넓혀가는 검 붉은빛을 덮으려 안고 있던 눈을 모두 쏟아낸다. 지척에 한 무리의 눈보라가 또 다가온다.

"소희야 힘들지?"

비탄에 빠진 네 마음에 어떤 말을 한들 위로가 될까만은 그래도 힘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조금 전 너를 만나고 구치소를 나오며 많이 울었어. 너의 제갈길 가자는 그 말이 왜 그렇게 슬픔을 일게 하던지.... 힘내라는 말밖에는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음에도 짧은 면회를 하고 나온 게 아쉬워 면회실에 앉아 이 편지를 쓰고 있어. 모두 내 탓이야! 내가 네 앞에 다시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이런 불행한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네 인생을 망쳐놓았고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삶이 송두리 해 날아갔다고 생각하니 미쳐 버릴 듯 가슴이 아파, 소희야! 15년 무척이나 지루한 세월이겠지만 언젠가 지나가겠지,
결코 좌절 하지맞고 꿋꿋이 버텨주길 바래 네 삶을 망쳐 버리고 가는 나도 너 없는 인생 의미가 없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의욕이 모두 사라졌어.

소희야! 지금 창문아래 앙증맞은 푸른 잎이 이월의 눈을 뚫고 삐죽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게 보여. 이렇듯 아직은 모진 겨울이지만 지금쯤 어딘가에 있을 봄이 곧 포근함을 몰고 올 것이니 흔들리지 말고 살길 바래. 네 인생에도 봄날 올 것이니, 반드시 따사로운 햇살이 비칠 거야 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말고 오롯이 너만 생각해! 가족도 생각 말고 너만 생각해 나도, 네 가족도 모두 너를 이렇게 만든 죄인이라 어떻게 해야 용서받을 수 있을는지.. 아무것도 널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는 내가 증오스럽기 끼지 해
소희야 어쩌면 이 편지가 너와 나의 마지막 소통인 듯 해 그래서 너무 슬프기도 하지만,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기도 하지만 네 말처럼 운명이라 생각하고 나도 내 갈길 갈게,

사랑해! 몸건강하고 잘 지내 15년이라는 세월이 쏜살같았으면 좋겠어.

-영민-

편지를 읽고 난 소희는 면회실에서 매정하게 했던 말들을 주워 담으며 오열한다.
헤어지자는 말은 했지만 정말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 숨을 쉬는 의미마저 상실하게 한다. 또한 15년의 감옥 생활은 생물학적으로만 살아있음이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기에 급기야 또 생명의 끈을 놓고 싶은 마음도 꾸물꾸물 돋아났다. 어쩌다 삶이 이따위로 흘러갔을까? 24년을 살아온 소희의 삶 속에 내재되어있는 감정이란 게 온통 모욕과 수치심. 울분 같은 쓰레기들 뿐이었다. 그런데 영민으로 인하여 행복이 그것들 틈이라도 비집고 올 수 있음이 퍽이나 다행이었거늘... 소희는 겨우 맛본 알량한 행복마저 쓰레기 속에 흡수되기 전에 삶의 성장을 멈추고 싶었다.

"누나 지내는 건 좀 어때 힘들지?..

"난 괜찮아 너희들이 더 힘들지? 미안하다...."

" 우리 걱정 안 해도 돼 누나만 몸 상하지 말고 건강하게 지내. 그런데. 누나 힘들까 봐 숨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알아야 할 것 같아!...

" 무슨 일이니? "

명오가 여짓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명오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소희는 얼굴이 하얗게 변하더니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누나 정신 차려. 언니. 언니..."

면회실 참관 교도관도 의무관을 부르며 뛰어나간다.. 소희가 눈을 떴을 때는 천장의 조명들이 눈을 찡그리게 했고 반쯤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바깟 세상엔 계절이 없어 보였다. 겨울인 것 같으나 폭섯 해 보였고 봄인듯했으나 나무들은 잉태를 미루고 있는 듯햇다.


"정신이 좀 들어요?."

의무실 침대 커튼은 젖히며 나타난 의무관이 팔에 꽂힌 링거를 매만진다. 그때야 어렴풋이 이 동생들과 주고받았던 대화가 생각났다 또다시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아픔이 와락 밀려온다. 따라서 터져 나온 울음은 주위 사람들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신 때문에 영민이 죽었다는 사실이 영민을 따라. 죽고 싶은 마음을 이끌어 낸다.


앓아누운 지 며칠이 지났어도 소희는 지독한 무기력감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영민 곁으로 가고 싶은 맘 간절한 테 그러하지 못하는 현실에 살아있음이 고통이다. 어느 때였나? 뼛속까지 스며든 혼자라는 외로움을 켜켜이 슬픔으로 뽑아냈던 적이, 돌연 고독하더라도 그때처럼 혼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방 사람들의 과잉 인정이 달갑지 않아서였고 더욱이 오롯한 영민에 대한 그리움을 방해받기 때문이었다. 살인죄로 장기형을 선고받은 것보다 정작 더 큰 슬픔은 영민을 볼 수 없다는 애석함이 아니라 같은 하늘아래 영민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소희는 자신의 몸 반쪽이 떨어져 나간 아픔에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가 버겁기만 했다. 영민이 죽었다는 걸 안지도 몇 달이 지났건만 소희는 여전히 애상 속에서 창살 사이의 하늘만 올려라 보며 피폐해져 간다.


"소희야 밥 좀무바라! 정말도 굶어 죽을라 카나?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사람은 살아야 할거 아이가?

"그래 소희야 동생들도 생각해야지 몇 술 뜨자"

소희는 동료들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매달린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15년이라는 형량이 얼굴을 날로 야위게 했고 눈물은 다른 날이 없었다.

"야 이 년아! 저년은 18년 이 년은 10년 저년도 10년 나 같은 년은 20년도 감지덕지하고 있고, 여기 억장 안 무너지고 죽고 싶은 사람이 네년뿐인 줄 알아 이년아?'


이년 저년이 받은 징역 수가 모두 수십 년이라는 고참의 버럭에 소희는 움칠한다..

"여기 이년 저년들 그리고 나. 모두 네년보다 더 하루에도 몇 번씩 목매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이년아! 넌 니 뱃속으로 싸지른 새끼나 없지 여기 이년들 모두 핏덩이도 있고 코 찔찔이도 있고. 그런 새끼들 떼어놓고 들어와 속이 모두 숫덩이가 된 년들인데 니깟년이 어디서 까불고 있어 까불길 유난 떨지 말고 얼른 밥 처먹고 몸 챙겨 이년아!"

고참의 한바탕 욕설에 소희는 뼈마디가 우직끈 거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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