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한 챕터를 닫다
말레이시아 생활 3년 차, 세 번째 회사에서 일 년 정도 근무를 했을 무렵 팀장직 제안을 받았다. 고객지원부 일은 이미 삼년 차라 익숙했고 특이하게도 마침 그곳에 일본어를 하는 사람이 나뿐이라 한국 일본 싱가폴 지역을 담당하는 팀장 자리를 새로 만들 테니 나보고 맡아보라는 것이었다. 실무만 삼 년 했으니 관리자 역할을 해보는 것도 배울 게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쩐지 내키지 않았고 오히려 지금이 말레이시아 생활을 청산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보니 말레이시아에 온 지 벌써 삼 년의 시간이 지났고 이제는 일도 생활도 꽤 적응이 되어 있었다. 적응기였던 1, 2년을 지나 삼 년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말레이시아 생활을 좀 더 즐기게 되기도 했다. 한국에서 따지 못한 운전면허를 이곳에서 학원을 다니며 취득하려 하고 있었고 그러면 작은 차도 하나 사볼까 하던 참이었다. 한국인으로서 말레이시아의 삶은 대단치 않더라도 일하고 저축하면 경제적으로 나쁘지 않은 환경이었고 이미 생활도 익숙해져 이곳에서 정착해 오래 살아도 나쁠 것은 없어 보였다. 직장에서는 상사로부터 인정도 받는 느낌이었고 팀장이 되면 급여도 더 오를 테니 그렇다면 언젠가 이곳에서 집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왠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내가 왜 말레이시아에 왔었지? 삼 년 전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는 것도 경험도 별로 없던 나는 외국에서의 생활을 경험해 보고 싶었고 독립을 하고 싶었고 그때까지 작은 미련을 갖고 있던 승무원의 목표를 이루기에 관련 있는 '서비스직' 경력을 쌓으며 한국보다 쿠알라룸푸르에서 훨씬 자주 열렸던 외항사 채용 오픈데이에도 참석하기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뒤섞여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는 그다지 새롭게 경험할 것도 없이 익숙해져 버린 이곳에서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 년 전에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내 발로 선택해 왔지만 이 제안을 수락하면 내 커리어는 정말 이쪽으로 확정되는 느낌이었고 그것은 더 이상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열정도 없는 일을 하며 주말에는 말레이시아에서 흔한 루프탑 바나 맛집, 호캉스 등이나 다니며 놀러나 다닐 내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침 코로나도 터졌다. 나는 고민 끝에 제안을 거절하고 퇴사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나는 코로나를 지나 대학원 진학, 취업 등으로 몇몇의 다른 국가에서 또 지내기도 했지만 이십 대 후반 처음 무작정 떠났던 말레이시아에서의 생활이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고 이후 다양한 환경에서도 나를 지탱해 준 마음의 기반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낼 때는 생활이니 여러 가지로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다 추억이어서 그런가. 떠난 이후에도 바쁘게 지내느라 잊고 있었는데 최근 유독 말레이시아 생각이 자주 나서 이 글을 써보게 되었다. 기록되지 않은 일은 잊혀진다고, 나중에는 말레이시아에 다녀온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까마득한 기억이 될 것 같았다. 다소 과감했던(?) 내 이십 대 후반의 기억을 꺼내 정리하고 이제 더 가벼운 마음으로 내 삶의 다른 챕터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