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하면 안 되는 국적 맞추기 놀이
말레이시아에서 지내는 3년 동안 내 외모도 현지화 과정(?)을 거쳤다. 첫해에는 어딜 가든 넌 한국인이니 아니면 일본인이니? 같은 질문을 들었고 누가 봐도 난 외국인 티가 났다. 그러던 것이 이 년 차에는 외국인 취급 혹은 현지인 중 가장 외모가 비슷한 말레이 차이니즈 취급 반반이 되었고, 삼 년 차에는 어딜 가나 누구도 거리낌 없이 나에게 현지어로 말을 걸었다. 심지어 그 무렵 모임에서 처음 만난 어떤 사람은 내 국적을 맞춰 보라는 주변인들의 부추김에 중국, 대만, 홍콩, 인도네시아 등등 아시아 각국을 돌다 마지막 일본까지는 나와도 차마 '한국'은 나오지 않기도 했다. 한국인이라고 하니 놀란 표정으로 의아해하기까지. 아무래도 그거 욕인 거 같은데.
한번은 회사에서 중국인 여자 팀장이 다른 한국 동료와 나를 비교하며 'ㅇㅇ은 한국인처럼 보이는데 너는 별로 한국인 같지 않아'라고 해서 내가 한국인 같은 게 어떤 거냐고 묻자 '음... 오렌지 립?'이라고 해서 빵 터졌던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외국인들에게 한국인의 이미지는 미디어에서 보는 그런 느낌이 강한 것 같다(쿨톤인 나는 오렌지 립은 절대 바르지 않긴 했다).
말레이시아 거주라는 지리적 환경에 아직 노화라는 걸 실감하지 못하던 나이라 피부관리의 중요성을 몰랐고 특유의 자연주의 성향(?)까지 결합되어 한 때는 그 쨍한 말레이시아 날씨에 선크림도 바르지 않고 일부러 햇볕을 쬐고 다니기도 했고, 그 흔적은 피부에 고스란히 남아 뒤늦게 애먹었다. 언젠가 한 번은 한국에 잠깐 들어왔을 때 공항으로 마중 나온 엄마가 입국하는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며 현지인 다 되었다고 가꾸고 다니라고 혼낸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쨌든 단정히는 다녔어야 했는데 조금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그때까지 한국에서의 자발적, 타발적 미적 족쇄를 벗어던지고 자연인처럼 지내본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겉모습의 현지화는 생존 전략의 일부였던 것 같기도 하다. 외국에 살면서 외국인 티 나서 별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최대한 현지인처럼 보이고 싶었달까. 하기야 그나마도 생김새가 비슷한 말레이 차이니즈가 있어서 가능했고, 서구권이었다면 현지에서 나고 자란 교포 정도로 보이는 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대학생 때 일본 교환학생에서 만난 독일인 친구가 일본에 있으면 동물원의 구경거리가 된 것 같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서양인도 그럴진대 동양인이 서양에서는 어떠랴. 나도 백인이 주류인 나라에서 지내거나 여행할 때는 현지인인 척을 할 수가 없어 좀 아쉬웠고, 마음먹으면 티 내지 않을 수 있는 아시아가 늘 편했다.
요즘은 갈수록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나라에 살고 있어 '전형적인' 외모로 국적을 판별하는 것도 의미가 없어진 것 같다. 예전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특히 동양인은 상대적으로 자신 있게 국적을 가늠하곤 했던 것 같은데 몇몇 예상이 처참히 깨진 경우를 경험하고 이제는 절대 속단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모습에 '저 사람은 절대 한국인일 수는 없다' 하고 속으로 생각한 사람이 번번이 한국어로 말을 하는 경험을 한 것도 다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 요즘엔 외국인이라도 한국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많아 어디서든 말조심은 필수기도 하고.
말레이시아에서는 상점 등에서 여자 손님에게 미스나 마담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시간이 지나며 점점 나를 부르는 호칭에서도 마담의 비율이 올라갔다. 말레이시아를 떠나고 한 번은 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스크를 쓰고 말레이시아 항공을 탔다가 오랜만에 미스 소리를 듣고 기뻐했었다(듣고 별생각 없으면 미스, 기뻐하면 마담이다) 마스크 벗고 있었으면 마담이라고 했겠지? 아무래도 다시 가야 하나. 이제 갈수록 미스 소리 듣기는 힘든데 아줌마보단 마담이 훨씬 낫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