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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의 영어

말레이시아에 살면 영어가 늘까 아니면 퇴화할까

by 봄날의 봄동이

말레이시아에서 영어는 일상적으로 널리 쓰이는 언어라 할 수 있다. 바하라사는 말레이시아 말이 따로 있어 국어로 취급되지만 각기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세 인종이 살다 보니 공통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영어가 일상어로 자리 잡았고 어디에서나 영어로 된 간판, 안내 문구 등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면 말레이시아의 영어 수준은 어떨까. 당연히도 영어가 모국어인 국가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니 사람들이 대체로 영어에 대한 거부감이 없고 일정 수준은 거침없이 말하는 것은 맞지만, 원어민처럼 유려하다거나 발음이 좋거나 문법이 정확하다거나 하는 것은 역시 거기서도 일부에 해당하는 얘기고 특히 말레이계 중에는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상대적으로 좀 더 잘 알려진 싱글리시와 비슷한 정도랄까. 정통 영어라고 하기엔 애매한 영어와 현지어 그 사이 어딘가의 느낌.


일화를 하나 공유하자면 처음 말레이시아로 가기 위해 한국에서 전화로 면접을 봤을 때, 현지인 인사 담당자가 나에게 강점 두 가지를 말해 보라는 식의 질문을 했었다. 그래서 두 가지를 이어서 한 번에 말했는데 내 말이 끝나자 자꾸만 뚜? 뚜? 를 반복하는 것이다. 나도 그때까지만 해도 거의 한국에서만 지낸 지라 각 나라 영어나 발음에 대한 감각이 없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알고 보니 내가 말한 답변을 합쳐서 강점 한 가지로 알아듣고는 두 번째 강점을 말하라는 뜻으로 뚜(two)?를 반복했던 것이다. 된소리가 심한 발음은 물론이고 문법적으로도 그다지 적절하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내가 바로 못 알아들으면 차라리 the second 등으로 어를 좀 바꾸던가 문장으로 풀어서 두 번째도 설명해 달라고 했으면 오히려 알아듣기 쉬웠을 텐데 주구장창 '뚜'만 반복하는 통에 진땀을 뺐었다.


물론 개인마다 차이가 있지만 흔히 말하는 '원어민' 수준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고 대체로 각자의 모국어에 의한 영향이 강하다. 중국계의 경우 특유의 모국어 기반 강세가 굉장히 강한 편인데 그 강세가 또 틀린 경우가 많아 알아듣기 어려울 때가 있다(참고로 말레이시아의 중국어는 표준 중국어 만다린이 아닌 호켄이라는 방언의 일종이다). 한번은 회사에서 뭔가 교육 세션을 진행하는 담당자가 중국계였는데 중국계 억양이 너무나 강한 영어를 구사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곤혹을 치렀고 옆에서는 도대체 영어냐 중국어냐 하는 푸념까지 나온 기억이 있다. 또 중국계의 경우 그냥 영어로만 문장을 마치지 않고 ~~라, ~~아 등의 중국어 감정 표현어를 말끝에 붙여 얘기하는 경우가 많아 더 중국어처럼 느껴지는데 나도 지내는 동안 같이 입에 붙어버려 한동안 떼어내느라(?) 고생했다. 번외로 한국어의 아이고~ 와 비슷한 아요~라는 감탄사는 아이고보다 짧기도 하고 아이고 특유의 약간 불길한 느낌 없이 가볍게 느껴져 지금도 애용하고 있다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레이시아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은 '영어를 못한다'이다. 가서 살아본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제대로 배운 사람들의 경우가 문법이나 발음이 훨씬 정확하고 세련된 영어수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우리는 모국어가 뚜렷한 나라라 일상적으로 영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심리적 장벽이 높고 연습이 되지 않았을 뿐. 그래서 이런 평가가 늘 좀 억울하게 느껴졌다. 또 미국식 영어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교육에 비해 말레이시아는 영국 영어를 따른다고 볼 수 있어 여기에 따른 차이도 있다. center 보다는 centre등 영국식 표기법이나 단어를 심심찮게 볼 수 있고 발음도 당연히 미국식 r 발음 따위는 없이 정확하게 t를 발음하는 편이다. 어설프게 미국식 굴림 발음했다간 오히려 더 안 통하고 영어를 못한다고 인식할 수도 있다.


한번은 말레이 차이니즈 동료가 사석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너희는 한국어가 100% 모국어처럼 느껴지냐며 물어본 적이 있다. 자신은 영어, 말레이어, 중국어 모두 어느 정도 할 수 있지만 완벽한 모국어라 할 만한 언어는 없다며.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미국 교포 출신 한국 분도 언젠가 언어를 잃었다고 농담반 진담반 말한 기억이 있다. 스스로 영어도 한국어도 완벽하지 않다고 느낀다는 뜻이리라. 나는 외국 생활을 하며 하나의 정확한 모국어를 갖고 있음을 오히려 감사하게 여기게 되었다. 비단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다국어를 구사하지만 확실한 모국어가 없어 보이는 경우를 많이 봤고, 외국 생활 오래 하면 0개 국어가 된다는 말을 성인이 되어 한국을 떠나 산 나조차도 실감하고 위기감을 느꼈을 정도니까.


요즘엔 조금씩 인식이 변하고도 있어 보이지만 대체로 지금까지 한국 내에서는 영어가 모국어인 것을 무조건적으로 선호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어릴 때 현지에서 배워 모국어가 영어인 게 유리하다거나 외국에서 키우면 자연스럽게 바이링구얼로 키울 수 있다는 등등. 어느 정도는 맞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다양한 성장 과정을 거친 사람들을 만나고, 언어와 더 깊이 관계될수록 모국어인 한국어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바이링구얼은 개인의 부단한 노력 없이는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현실적인 장단점은 있겠지만 하나의 확실한 모국어라는 것도 못지않은 자산임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포처럼 영어를 하지는 못해도 자신 있게 모국어가 한국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꽤 괜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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