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국가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에서의 마지막 해, 새로운 회사에 입사하고 서류 처리를 위해 HR을 방문했다. 당시 말레이시아 노동법상으로는 외국인 근로자가 하반기에 입국하면 비거주자로 보아 월급에서 약 30%에 달하는(그때 당시 26~8% 정도로 중간에 한 번 올랐었다) 높은 비거주자 소득세를 6개월 정도 원천 징수하도록 되어있었다. 만약 연초에 입국해서 그해 말레이시아에 거주할 수 있는 날짜가 180 몇 일 이상 남으면 거주자로 보아 해당사항이 없지만, 하반기에 입국해서 달력 연도 기준 거주 기간이 반년 정도가 안 될 것 같으면 조세법상 비거주자로 보아 우선 높은 세금을 공제하는 식으로, 근로자 입장에서는 무려 3분의 1가량이 떼인 월급을 장기간 받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미 말레이시아 3년 차, 세 번째 직장으로 이 곳에서 두 번의 세금 정산 경험이 있었고 말레이시아 국세청격인 HASIL 사이트에서 상세한 예시가 담긴 소득세 관련 문서를 보고 내 경우는 직전 연도 거주기간과 공백기간 등을 고려해 거주자에 해당함을 알고 있었다. HR을 방문해 세금 담당자와 여기에 대해 확인하자 그는 극구 부인하며 무조건 나도 30%에 달하는 비거주자 세금을 떼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확인한 규정을 설명해도 듣지 않았고 그건 예시일 뿐이다, 얼마 전에 세무당국 담당자가 여기 와서 직접 세미나를 했다는 말만 반복해 말이 통하지 않았다.
답답해진 내가 그럼 HASIL 오피스에 가서 내 케이스에 대한 확인을 받아오면 되겠냐고 하니 그러면 가능하단다. 결국 시간을 내 주구장창 대기해야 하는 하실 지점에 방문하기로 마음을 먹고 나왔다. 당시 채용을 담당했던 현지에 오래 거주한 한국인 리쿠르터분은 이야기를 듣더니 여기는 관공서에 뭔가 요구할 일이 있으면 말레이 남자를 데려가라고 한다며 아무리 말 잘해도 소용없고 그게 '먹히는' 방법이라고 조언해 주셨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 인도, 중국계 3인종의 다민족 국가이기는 하지만 주류는 말레이로, 부미푸트라라고 해서 국가 정책 등 공적 영역에서는 토착 주민 격인 말레이를 우대하는 경우가 많은 듯했고, 이슬람이라 말레이 중에서도 남자를 데려가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말의 문제가 아니라 규정이 그런 걸? 결국 나는 하실 오피스에 가서 상담 후 확인을 받아냈다. 세무관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내 경우 거주자에 해당한다면서 서류를 준비해 주었고 나는 이를 회사에 전달해 비로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는 이슬람 국가이긴 하지만 말레이계가 아니면 종교가 강제되지는 않으므로 평상시에는 외국인 입장에서 크게 의식하지는 않고 지냈다. 주의할 점이라면 관공서 방문 시 옷차림 정도랄까? 긴옷에 신발 등을 단정히 하는 것이 좋다. 나는 말레이시아에서 운전면허학원을 다니기도 했는데 첫날 이론 교육 시간에 샌들을 신고 갔다가 발을 다 덮는 신발이 아니면 교육에 참가할 수 없다고 해서 신발을 빌려 신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또 살다 보면 이곳이 이슬람 국가였지 느끼는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대형마트에 가면 보통 논할랄 코너가 따로 빠져있어 돼지고기, 술 등의 상품은 한곳에 모여있고 그 구역의 계산대도 따로 있는데 처음에 잘 모르고 돼지고기와 다른 물건을 같이 담아 일반 계산대로 갔더니 계산원이 말레이인 경우 바코드를 찍을 때 더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물건 끝자락을 집게 손가락으로 잡아 옮기거나, 아예 만지지도 않고 나에게 대신 건너편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런 일을 몇 번 겪고는 논할랄은 미리 안에서 계산하고 바깥 계산대에서는 계산했음을 알리고 맘 편히 직접 옮겼다
곳곳에 있는 이슬람 사원과 하루에도 몇 번씩 들리는 아잔이라는 기도소리도 그렇다. 처음에는 아침 일찍 들리는 아잔 소리에 잠을 깨며 괴롭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모닝콜처럼 여겨져 고마웠고, 더 지나자 잘 들리지도 않게 되었다. KL 근교 푸트라자야에는 관광지로도 유명한 핑크 모스크가 있는데 언젠가 그곳을 방문해 입구에서 대여해주는 히잡을 쓰고 들어갔다가 안에서 나도 모르게 머리가 답답해 모자를 잠깐 제꼈더니 뒤에 계시던 아주머니가 0.1초 만에 모자를 다시 씌워 약간 무서웠던 기억도 있다.
이슬람이라고 하면 막연히 두렵게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의외로 이슬람이라 좋았던 부분도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음주 문화다. 특정 구역이 아니면 술취한 사람들이 길에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일이 별로 없어 조용하고 평화롭게 느껴진다. 종교상 엄격한 규율이 있어서인지 일상생활에서 범죄 노출 위험이 '체감상' 더 적기도 했다.
하지만 좀도둑, 소매치기, 캣콜링 등의 잔(?)범죄는 오히려 더 흔하기도 하다. 교민카페에는 오토바이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글이 심심찮게 올라왔고, 나도 말레이시아에 살면서 가방을 길가 쪽으로 안 메고 지퍼 부분을 항상 손으로 잡고 있는 버릇이 생겼다. 콘도에서는 좀도둑 방지를 위해 대부분 철로 된 그릴 모양의 이중문이 설치되어 있고 그 사이가 신발장으로 쓰이는데, 문 빗살 안으로 작대기를 넣는 건지 신발을 훔쳐 간다는 얘기도 종종 돌곤 했다.
한번은 혼자 지하철 역에서 집으로 걸어가다 말레이계로 추정되는 남자가 오토바이에 탄 채로 '유후~~' 하며 내 옆에서 캣콜링을 시전하고는 쏜살같이 지나가는 바람에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열이 잔뜩 받아 있는데 그 오토바이가 앞에서 유턴을 하더니 이번엔 나를 아예 쳐다보고 오며 또 한 번 '유후~~~' 하는 게 아닌가? 이게 도대체 사람을 뭘로 생각하나 어이가 없어 잔뜩 노려보며 Watch your mouth! 하니 금세 또 놀란 표정으로 한 손을 들어 미안하다는 표시를 하고는 사라졌던 적도 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하지를 말지 그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