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어귀,
하수구 옆 모퉁이에
할머니가 상추 몇 단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팔겠다는 말도,
사달라는 손짓도 없었다.
그냥,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스쳐 지나가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사실 스쳐 지나간다는 건, 무관심이 아니라 자기방어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장면이 종종 생각난다.
며칠 전, 유튜브에서 봤던
방글라데시 여행 영상이 떠올랐다.
한 여성이 식당에서 소고기 카레를 먹고,
주인은 애써 남은 음식을 싸줬다.
그걸 들고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아이 하나가 다가왔다.
“그거, 주세요.”
망설이다 건네줬고,
아이는 해맑게 달려가 가족들과 나눠 먹었다.
그 아이는 무엇을 꿈꾸고 있었을까.
관광지 길거리에서 매일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그녀는 그 순간을
아름답다 말하지 않았다.
도와도 찜찜하고,
안 도와도 찜찜한 마음.
그게 오래 남아, 주저앉아 울었다고 했다.
왠지, 알 것 같았다.
나도 동남아 여행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몇 번 있다.
줄까 말까 망설였고,
주고도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문득,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나는 그런 장면을 일부러 외면했다.
거리의 거지를 보고 일부러 욕을 하기도 했다.
그땐 내가 옳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 분노의 대상은 그 사람이 아니라,
바꿀 수 없는 인생의 비참함과
인간의 고통 자체에 대한
어렸던 나의 거친 표현 방법이었던 것 같다.
내가 미워했던 건 그들이 아니라,
그런 삶을 바꿀 수 없다는 현실 자체였다.
그런 감정은 말로 설명되진 않는다.
그냥, 오래 남는다.
연민보다 오래가고,
죄책감보다 더 깊은 감정.
그건 바로 무력감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장면을
살면서 여러 번 마주하다 보니,
무뎌짐과 동시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결국 고통일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묻는 마음이
이상하게 마지막까지 남았다.
할머니도, 아이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자기 자리에 쭉 있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무언가가 전해졌다.
말하지 않아도, 삶은 말하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의 상추를 사지 않았고,
아이의 현실을 바꾸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내 일상에 영향을 줬다.
조금 더 조심히 걷게 됐고,
눈을 맞추는 일이 많아졌고,
별것 아닌 걸
감사하게 여기는 날도 생겼다.
그리고 어느 날,
내가 질투하던 사람이 떠올랐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잘살까,
왜 나는 항상 이만큼일까.
그게 얼마나 쓸데없는 생각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 감정엔 사실
부러움과 감탄이 섞여 있었고,
나는 그걸 비교로 뒤틀고 있었다.
타인을 인정하는 용기.
질투는 그 용기를 거부한 결과다.
질투는 감탄이 길을 잃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굴 애써 도울 수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
내가 사는 방식만큼은 그냥 무심하지 않으려 한다.
시장 모퉁이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할머니처럼,
나도 나의 자리를 가볍게 살고 싶지는 않다.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다.
눈을 돌리고 싶은 순간도 많다.
그래도
있는 그대로의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버티며 살아가는 것.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딱 그만큼의 책임이고,
그만큼의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