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소리

14장 — 세상의 심장 소리

by 나리솔

14장 — 세상의 심장 소리


창문을 활짝 열자, 도시는 마치 거대한 숨을 내쉬는 생명체처럼 그 모든 존재를 한꺼번에 쏟아냈다. 끼익거리는 오래된 버스의 경적 소리는 한 시대를 묵묵히 견뎌온 고뇌처럼 들렸고, 건물 숲 사이를 휘감아 도는 바람은 잊혀진 누군가의 쓸쓸한 속삭임 같았다. 저 멀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이의 짧은 울음소리는 가장 순수한 슬픔의 메아리처럼 심장을 울렸고, 늦은 시간까지 그림자를 드리우며 터벅이는 퇴근길 사람들의 발걸음은 저마다 짊어진 삶의 무게를 웅변하는 듯했다. 평소라면 무심히 스쳐 지나갔을, 그저 도시의 배경음악처럼 흘려보냈을 소리들. 그런데 오늘은, 마치 실핏줄처럼 얽혀 내게로 뻗어오는 살아있는 목소리들처럼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하나하나의 소리가 독립된 운명을 지닌 존재처럼, 서로 다른 간절함으로 나를 향해 손짓하는 것 같았다.

책상 위,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온 낡은 책은 어느새 열네 번째 장을 스스로 펼쳐 보이고 있었다. 그 고요한 페이지 위에는 단 한 줄의 문장이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세상은 단 한 순간도 침묵한 적이 없었다. 다만, 네 영혼이 그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방 안의 공기마저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착각에 빠졌다. 희미하던 소리의 파동은 점점 선명해지며, 잃어버렸던 기억 속 퍼즐 조각처럼 맞춰져 갔다. 벽 너머의 이웃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거리에서 쿵쿵거리는 생활의 박동, 심지어 창밖 작은 나무의 여린 잎새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조차도 저마다의 이야기가 되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여기 있어. 잊혀지지 않기 위해 매 순간 존재하고 있어.” “나를 그저 지나치지 마. 한 번이라도 나의 의미를 들여다봐 줘.” “내 깊은 곳에 스민 고통의 흔적을 기억해 줘. 그게 나를 존재하게 하니까.” “내 작은 기쁨마저도 함께 나누어 줄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반짝일 텐데.”

수많은 목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어 나를 감쌌다. 처음에는 너무나 혼란스럽고,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거대한 폭포 속에 서 있는 것처럼, 내 작은 존재가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특정한 개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본질적인… 세상 그 자체의, 우주가 숨 쉬는 소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귀를 두 손으로 막아 보았다. ㅠㅠ 어쩌면 이 엄청난 소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소리는 막으려 할수록 더욱 선명해지며, 바람처럼, 물결처럼, 이미 내 안으로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오히려 두 귀를 막을수록, 그 울림은 내 심장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쿵, 쿵, 하고 생생하게 퍼져 나갔다. 마치 세상의 심장 소리가 내 안에서 뛰는 것만 같았다.

“…이게, 정말 세상의 목소리구나.” 나는 텅 빈 공간에, 혹은 내 안의 심연을 향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이전의 나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던, 미지의 영역이었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이 있었다. 지하철 덜컹거림 속에서, 무심한 시선으로 스쳐 보았던 노인의 깊게 패인 주름진 얼굴. 그 주름 하나하나에 새겨진 삶의 애환과 지혜를 나는 왜 그저 '늙음'이라는 단어로만 치부했을까. 길모퉁이에서 낡은 기타를 연주하던 청년의 서툰 멜로디에서 나는 왜 그의 꿈과 좌절을 읽어내지 못했을까. 병원 대기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말없이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던 모자의 모습. 그 꽉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불안과 사랑, 간절한 기도를 나는 왜 그저 '흔한 풍경'으로만 여겼을까. � 나는 그 순간들을 눈으로는 분명히 보았지만, 내 마음으로는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그들의 존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 채, 나만의 작은 생각과 감정의 우물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너는 늘, 오직 너만의 세상 속에서 살았다.” 낯설고도, 그러나 너무나 명료하게 다가오는 묵직한 합창이, 마치 수천 년 된 고목들의 속삭임처럼 내 영혼을 흔들었다. “세상은 끝없이 너에게 말을 걸고, 너를 기다렸지만… 너는 세상을 향해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너의 삶은 잎을 잃은 나무처럼 점점 작아지고, 외롭고 위태로운 고립 속으로 파고들었지.”

내 가슴은 답답함을 넘어, 마치 거대한 바위가 얹혀진 것처럼 무거워졌다. 정말 그랬다. 나는 언제나 ‘나’라는 이름의 견고한 성벽 안에 갇혀 있었다. 나의 상처, 나의 사랑, 나의 후회, 나의 슬픔… 오직 나만의 감정에만 몰두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온 세상의 목소리는 그 성벽이 얼마나 좁고, 얼마나 왜소한 세계였는지를 잔인할 만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의 모든 고뇌가 이 광활한 세상 속에서는 얼마나 작은 점에 불과했는지, 그리고 내가 놓쳤던 삶의 무한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깨달으니, 아득한 후회마저 밀려왔다.

촉촉한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이제 더 이상 두려움이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침묵을 깨고 들려온 세상의 노래에 대한 감격이었고, 마침내 베일을 걷어낸 진실을 마주한 깨달음의 눈물이었다. 나의 닫혔던 귀와 마음이 조금씩 열리는 순간이었다.

찰나의 바람과 함께, 책장이 또 한 번 스스로 스르륵 넘어갔다. 마지막 장에는, 마치 내 영혼을 위로하듯,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세상의 심장 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만이, 비로소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목소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나는 한참을, 그 문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 글자 하나하나가 빛을 발하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창밖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 그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더 이상 도시의 흐릿한 배경이 아니었다. 모두가 저마다의 고유한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과거를 말했고, 걸음걸이는 미래를 향했다. 그들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 소리들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외면한 채 살아왔던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오늘은 열네 번째 장을 펼친 날. 그리고 나는 알았다. 내가 진정으로 귀 기울여 듣는 그 목소리들이야말로, 바로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 그 자체라는 것을. 세상과 나의 경계가 사라지는 듯한, 아주 벅찬 깨달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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