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소리

15장 — 침묵의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by 나리솔


15장 — 침묵의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밤은 유난히 그윽하고 고요했다. 창밖으로 아스라이 보이는 가로등 불빛조차 오늘은 도시의 번잡함을 잃은 채, 모든 소란을 삼킨 듯 희미하게 흔들릴 뿐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익숙한 도시의 숨소리도, 이따금 스치던 바람의 나직한 속삭임마저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시간. 세상에 오직 나 혼자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듯한, 밀도 높은 적막감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처음에는 이 고요함이 익숙지 않아 낯설고 불편하기까지 했다. 마치 텅 빈 공간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막연한 불안감마저 감돌았다.

책상 위, 언제나처럼 나의 사색과 깨달음을 기다리는 듯이 조용히 펼쳐져 있는 노트는 이번에도 여백만을 내어주고 있었다. 늘 무언가 의미 있는 문장들로 채워지던 공간이었건만, 오늘은 어떤 단어, 어떤 글귀 하나도 그 흰 종이 위에 새겨지지 않았다. 그저 옅은 달빛 아래 고요만이 사뿐히 내려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잠시 글쓰기를 멈춘 채 멍하니 시간을 보낸 탓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이번 챕터는 시작조차 하지 못한 채 실수를 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짧은 의구심마저 스쳤다.

하지만 이내, 나의 내면에서 어떤 파동이 일어났다. 아, 이건 실수가 아니었다. 의도적인 공백. 그 자체로 강력한 메시지였다. 빈 페이지의 침묵은 단순히 말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너무나 명확하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후, 다시금 나에게 찾아온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겉으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흔들림 없는 고요함은 심해의 바닥처럼 어둡고 깊었지만, 바로 그 심연으로부터, 낯설면서도 너무나 익숙한, 무겁고 장엄한 목소리가 마치 거대한 존재의 발자국처럼 나의 의식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귓가에 속삭이는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었다.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울리는 진동이자, 마음속에 또렷이 새겨지는 언어였다.

“너는 지난 시간 동안 얼마나 분주하게 바깥세상의 소리만을 쫓아 헤매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듣고 말하며 살았는가. 그러나 진실은 종종 귀를 어지럽히는 요란한 소음 속이 아니라, 바로 이 고요한 소리의 부재 속에 은밀히 숨겨져 있단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 명징하여, 나의 모든 사고와 감각을 일시에 멈춰 세웠다. 나는 그 말의 무게에 짓눌려 숨을 고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슴이 저릿해지는 깊은 공감이 온몸으로 퍼졌다. 정말이지 그랬다. 나의 삶은 늘 타인의 말, 세상의 외침, 나의 감정적 표현, 그 모든 '소리'들을 따라 흘러왔다. 사랑하는 이들의 달콤한 고백, 따뜻했던 가족의 추억이 담긴 웃음소리, 해맑은 아이의 티 없는 웃음, 거리의 웅성거림, 세상 모든 것들이 내게 던지는 질문과 대답... 그 모든 소리들은 나의 삶을 규정하는 중요한 좌표였다. 소리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침묵은 단 한 번도 나의 온전한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저 '소리의 부재'일 뿐, 의미 없는 '공백'이라 여겼을 뿐이다. 어떤 정보도, 어떤 감동도 줄 수 없는 텅 빈 공간이라고 치부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의 내면에 울리는 목소리는 그 모든 편견을 깨부수고 있었다. 나의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던 인식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침묵은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심지어는 소리가 미처 담아내지 못했던 가장 본질적인 것들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깊고 넓은 '그릇'이었다. 그 텅 비어 있는 듯한 고요 속에서, 놀랍게도 나를 둘러싼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고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흐릿하게 잊혀졌던 얼굴들, 이미 떠나간 이들의 따스한 잔상, 다가오지 않을 것만 같던 아련한 지난 시간들, 그리고 아직은 형체가 모호한 미래의 그림자들까지. 그들 모두가 말없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마치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이 침묵의 공간에서 한데 어우러져 응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왜 이제야… 왜 이제야 비로소 이 모든 것을 느끼게 된 걸까?” 나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미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외면해왔던 이 진실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은 회한과 함께 벅찬 감격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고요의 심연에서 울려 퍼지던 그 목소리는 더욱 또렷하고 선명한 울림으로 나의 질문에 답했다. 마치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나에게 횃불을 건네주는 듯한 명쾌한 해답이었다.

“네가 진정으로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침묵은 아무에게나 쉽사리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버리는 두려움과, 너를 잠식하는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들—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 있는 자만이 비로소 이 깊은 침묵과 온전히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은 마치 나의 내면 깊숙이 숨어 있던 가장 솔직한 부분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나는 늘 홀로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찾아 끊임없이 헤맸다. 그래서 침묵은 회피의 대상이었지, 탐험의 영역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야 알았다. 진정한 마주함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후에야 가능하단 것을.

나는 느리게 방 안을 둘러보았다. 평소라면 단지 공간을 메우는 답답하고 무의미한 존재로만 느껴졌을 벽과 낡은 가구들이, 오늘은 전혀 다른 의미를 띠고 나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변함없이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존재함' 자체가 가장 웅변적인 목소리라는 것을.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목소리이자 가장 진실된 외침이다'라는 심오한 깨달음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모든 사물은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한 이야기였고, 침묵은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한 가장 순수한 언어였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따스한 물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이 눈물은 과거의 아픔이나 슬픔 때문에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마음 깊은 곳에 켜켜이 쌓여 먼지처럼 가라앉아 있던 모든 오해와 선입견, 그리고 잊고 지냈던 나 자신의 진실된 모습이 깨끗하게 씻겨 나가는 듯한 정화의 눈물이었다. 무언가 가득 차 있던 마음이 비워지면서 오히려 더욱 충만해지는 역설적인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그 순간, 펼쳐진 노트의 책장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린 듯, 스르륵 스스로 넘어갔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하얗게 비어 있던 새하얀 종이 위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명료하고 빛나는 한 줄의 문장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침묵은 그저 모든 것의 마지막이 아니라, 모든 새로운 시작을 위한 숭고한 문이다. 네 안에서 잠들어 있던 진짜 목소리가 다시 깨어날 때, 세상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언어로 너를 따뜻하게 맞이할 것이다.”**

나는 그 문장을, 어떤 망설임도 없이, 어떤 감탄사도 내뱉지 않고, 오랫동안 그저 응시했다. 그 의미가 나의 심장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뿌리내릴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어떤 소리도 내지 않은 채, 그저 오롯이 그 고요를 경청했다. 그리고 마침내 온몸으로 깨달았다. 침묵조차도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하고 진실된 하나의 목소리이며, 때로는 가장 큰 혼란 속에서도, 이 고요한 울림이야말로 가장 정확하고 진실한 대답을 건네준다는 것을.

오늘은 열다섯 번째 밤이었다. 침묵이 내게 말을 건넨 밤. 그리고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나 자신에게 말했다. 소리의 껍데기를 넘어선 자만이, 비로소 세상의 진짜 목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진정한 듣기는 귀가 아니라, 마음과 영혼으로 이루어지는 깊은 교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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