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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실의 큰 그림

브런치 작가의 목표

by 유호현 작가

우리 집엔 방랑자 치실이 산다.

나만 사용하고, 치아 사이에 불편한 것이 낄 때만 찾는다. 그래서 치실이 토라진 것 같다. 어느 날은 견과류 통 옆에 항의하듯 드러누워 있고, 또 다른 날은 집전화기 뒤에 숨어 고대 유물처럼 먼지를 덮어쓰며 나타난다. 그 외에도 온갖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출몰한다.

어제는 치아에 사과 껍질이 끼였다. 네 달 만에 치실을 찾았다. 이번엔 토라짐을 넘어 단단히 화가 났나 보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떠올랐다.


나도...


화장실 비품통을 열면 치실일 것 같았다.

커피 머신 뒤 전선을 들어보면 치실일 것이었다.


"이럴 바에 새로 사고 만다!" 다섯 번은 중얼거리던 순간, 올리브유와 아보카도 오일 뒤에 숨어 띠겁게 나를 노려보는 녀석을 발견했다.

격렬하던 사과껍질의 이물감은 어느새 잔잔했다. 대신 어제 비운 쓰레기통이 요동치고 있었다. TV장 뒤로 넘어간 오래된 약봉투, 유통기한 지난 영양제. 침대 아래로 들어간 자잘한 물건들이 버려져 있었다. 그 옆에는 발마사지용 골프공과 잃어버렸던 파커 볼펜이 있었다. 버리거나 되찾은 것들이 꽤 되었다.

치실을 찾는 동안 집안의 보이지 않는 무질서를 정리한 것이다. 순간 내가 우리 집의 치실이 된 기분이었다.


"이게 치실 너의 큰 그림이었냐?"

그러자 치실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치실을 찾으려면 치실이 되어라."


치실의 큰 그림이 무질서를 걷어내는 것이라면, 글쓰기의 큰 그림은 내 안을 정리하는 것이다.


브런치를 통해 나는 작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첫 글 '착한 암이라는 위로'가 좋은 반응을 얻었고, 에세이 공모전에 처음 도전해 최우수상과 상금도 받았다. 큰 회사 매거진에 글이 실리는 특별한 경험도 했다. 부럽게만 보였던 크리에이터 배지도 지난달 받았다. 글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도 느낀다.

짧은 시간 이룬 성과들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전보다 훨씬 잘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글이 써지지 않았다.

하지만 글도 방랑한다. 생각은 흩어지고, 문장은 숨어버린다. 그 과정을 견디는 동안 불필요한 말은 떨어져 나가고 꼭 필요한 말이 남는다.


중요한 건 글을 쓰는 그 자체다. 치실이 무질서를 정리했듯, 글쓰기는 내 안의 무질서를 정리한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당장 출간해도 되는 대단한 한 편이 아니라, 꾸준히 쓰는 행위다. 그렇게 쓰다 보면 출간이라는 목표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날 내 이력의 첫 줄에, 나를 작가라 처음으로 불러준 브런치스토리가 자리했으면 한다. 내가 받은 처음을, 다시 처음으로 돌려주겠다.


글쓰기가 내게 말을 건넨다.


"글을 쓰려면 글처럼 되어라. 쓰는 것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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