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끝난 뒤에야 알게 되는,

그리고 그의 작은 성채에서 발견한 것들

by Andy

어떤 사랑은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다. 이건 삶에서 반복되는 비극이다.


할아버지와 20년을 함께 살고, 10년 정도는 1주일에 한번 정도 보며 지냈다. 애기 때의 할아버지는 소아과에 예방접종을 맞히러 가서 주사를 맞고도 안 울었다고 주변에 자랑하고 집 가는 길에 짜장면을 사주던 사람. 초등학생 때는 이따금씩 버스를 타고 30분 거리 학교에 와서 기다렸다가 하교하는 나를 찾아 함께 집까지 다시 같은 버스를 타고 가던 사람. 대학교 합격 소식을 누구보다 기뻐하고 나와 같이 직접 첫 등록금을 내러 갔던 사람. 함께한 시간이 길어 소중함이 와닿지 않던 사람, 그리고 그 이유 중 하나는 내게 사랑한다는 생색을 내지 않았기 때문인 사람.


할아버지는 어느새 너무 늙어버렸고, 특유의 철두철미했던 성격에 나이가 들수록 심해지는 OCD적 특징이 말년에는 그를 다소 고집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가끔 보면 애틋하지만 항상 가까이하기에는 어려운 존재, 그게 내가 할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이었다. 코로나 이전까진 외출을 할 수 있던 노인이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점점 기력이 쇠해 바깥 외출을 하기 어려워졌고 자신의 방과 거실, 부엌만을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 점점 느려지는 그의 걸음걸이를 보며 할 수 있던걸 할 수 없게 되는 노인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리고 부인할 수 없이 가까워진 죽는 날을 기다리는 노인의 기분은 어떨까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짧게 아프고, 순식간에 세상을 떠났다. 마음에 준비를 할 시간은 없었는데, 난 그런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98살의 할아버지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는 것은 자명했기 때문에,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었다. 할아버지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방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는데, 자신의 물건을 건드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의 방식으로 정리된 그의 방은 다소 부산스러워 보였다.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30년 된 가계부, 각종 수집물들은 오랜 기억 속에 숨겨져 있던 그만의 사랑을 드러냈다. 그의 가계부 속에는 짜장면, 돈까스, BBQ로 변화되어 가던 나의 입맛과 크레파스 같은 학용품, 그리고 손자, 손녀들에게 주던 명절 용돈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머리맡의 수납장 위에는 그가 받은 훈장, 졸업장, 표창장과 버리지 않고 모아둔 아들, 손자의 각종 서류들이 모아져 있었다. 나의 대학 합격증과 징병검사 통지서까지 조용히 모아놓은 그를 나는 잘 알지 못했다. 무엇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지만 조용하고 약간 의뭉스러운 노인. 할아버지가 더 이상 지키지 않는 성에 들어가고 나서야 나는 그 안에 있던 것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남들보다 좀 더 섬세한 손자’인 나에 대해 그는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사랑은 잃은 뒤에야 뒤늦게 깨닫는다. 평균 수명을 거뜬히 넘기고 살아계실 때 자손들의 사려 깊은 돌봄을 받은 그의 죽음이 비극일 수는 없겠지만, 그의 사랑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은 나의 작은 비극이다. 마지막 순간 할아버지가 자신의 삶의 색깔을 되돌아보았을 때 밝고 아름다운 빛이었기를, 그리고 언젠가 나도 그처럼 아낌없는 사랑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할아버지에게 그를 추억하는 섬세한 손자가.

202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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