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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감정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by 장민혜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갑작스럽게 기억나는 순간이 다가온다. 그럴 때면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기억 한켠에 이런 것을 두고도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고? 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이었다. 어떠한 기억의 슬픔도, 상처도 없는 것이 기억 한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는 나는 스스로 실망스러운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기억남으로써 선명해지는 무언가가 마음속에 떠오를 때면 더욱 깊숙한 곳으로 잠수를 하고 싶어졌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공간으로의 가라앉고 싶어진 것이다.


기억나지 않아야 할 것들은 때때로 나를 괴롭게 했다. 평범한 일상 중 하나였을 뿐임에도 나는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사람에게 기억이란 무슨 의미인가. 추억이란 무슨 의미인가. 스치듯 지나친 어느 사람에게서 나던 전 연인과 똑같은 섬유유연제의 향, 전 연인이 좋아했던 것들, 전 연인의 마지막 말까지. 때때로 잊고 지내던 것이 다시 한번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 나는 이미 흘러간 모든 것에 대한 감정에 물들곤 했다. 그것이 주는 아픔은 상당했다. 인간의 뇌는 고통을 잊기 위한 방어기제를 가동한다고 들었지만, 내가 만나야 하는 것은 상당한 아픔이었다. 아픔을 잊기 위해 노력해 왔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어느 순간에 무너져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무너진 뒤에 복구를 꿈꾸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연인을 예시로 들었지만, 친구에 관한 기억이라거나, 가족에 관한 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상대는 기억하지 못하고, 나는 기억하고 있는 일들. 그런 일들을 곱씹다 보면 시간은 금방 흘러간다. 흘러간 시간 속에서 나는 처절해지게 되는 것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 오랜 세월을 약속했던 인연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우정이든 아니면 사랑의 어떤 형태든 상관없이. 흘러간 세월 속에서 나는 허무함을 느끼고 끝내 세상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 속에 갇히고 만다. 그러한 생각 속에서 건져올릴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유한한 삶과 유한한 우주 속에서 결코 존재하진 않기에 아름다울 뿐이라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 아름다운 개념이긴 하지만, ‘영원히’라는 말의 주체가 내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 나의 세상은 부서져 내린다. 조각조각 위를 밟으며 피가 흐르는 발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면 나는 결국 또 다시 그때의 기억속으로 되돌아간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후회 속에서 처절해지고 마는 것이다. 식품이 아닌 것에도 유통기한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내 모든 관계의 유통기한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너와의 우정은 몇 달이나 갈까. 또 다른 이와의 감정은 또 얼마나 가는 것일까. 모든 것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순간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유통기한을 곱씹다 이미 흘러가 버린 지난 인연을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기억의 단위를 셀 수 있다면, 기억의 유통기한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결국 나는 웅크려 하염없이 울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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