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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저널리즘

LA 이민자 시위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혁명

by 최시헌

지난 6일부터 LA에서는 이민세관단속국(ICE)의 무차별적 불법 이민자 단속을 규탄하는 시위가 열리고 있다. 히스패닉계 주민들이 80% 이상인 캘리포니아주 파라마운트의 한 주택가에서는 수백명의 시위대가 ICE 요원들과 충돌했다. 시위는 지난 6일 ICE가 LA 곳곳에서 불법 이민자 단속을 벌이면서 시작됐다. 미 국토안보부는 최근 진행된 ICE의 작전으로 이민자 118명이 체포됐으며 이 중 5명이 전과가 있었다.


이제는 미국 전역으로 퍼지고 있는 이민자 시위는 이미 이민자에 한정한 의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 팔레스타인 전쟁, 소수자 차별, 사회적 평등 등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며 트럼프의 왕과 같은 군림을 규탄하는 No Kings(노 킹스) 시위로 발전되고 있다. 나에게 이 사건을 보자마자 떠오른 단어는 바로 ‘내전’이었다. 물론 내전은 가장 극단적인 상황일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세계적으로 엄청난 시련이 다가올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는 내전은 총을 쏘고 미사일을 날리는 전쟁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점은 LA 이민자 시위는 트람프의 이민자 단속에 대한 LA 시민들의 반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시작은 트럼프주의였던 것이다. 최근 트럼프는 정말 종잡을 수가 없는 행보를 보여왔다. 중국과의 관세 정책과 더불어 하버드 대학과의 다양성 이념 전쟁 등 트럼프주의만이 가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내면서 말이다.


그러나 트럼프주의는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신자유주의로부터 벗어나기는커녕 그것을 충실히 따르는 정치적 전략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내전의 형태를 띄고 있다. 나는 피에르 다르도의 <내전,대중혐오,법치-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책을 인용하며 이 상황을 다루려고 한다.


피에르 다르도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애초부터 내전이라는 근본적인 선택에서 출발했다. 내전이란 ‘내부에서 벌어지는 전쟁’, 즉 동일한 국가의 시민들 사이에 일어나는 전쟁을 의미한다. 외부의 전쟁은 국제법의 통제를 받지만 국내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무법지대로 밀려난다. 전략적 측면에서 보면 정치는 이러한 극악한 폭력의 사용을 완벽하게 수용할 수 있으며 내전이 법을 수단으로 전개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사례를 들 수가 있는데, 하나는 2019년 칠레에서 일어난 인민 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2021년 워싱턴 의회 점거 사건이다. 2019년 당시 칠레 대통령이 선포한 ‘전쟁’ 상태는 명백한 내전으로, 이를 위해서는 논증적으로 내부의 적이라는 형상을 구축해야 한다. 이 전쟁은 신자유주의 과두제 지배계층이 자신들의 지배를 직접적으로 위햡하는 시민들의 대중운동에 대항하여 전쟁을 선택함으로써 발발한 것이다.


이 모든 폭력사태는 미국 남북 전쟁처럼 두 무장세력이 충돌하는 전통적인 내전이 아닌 오늘날 내전의 독특한 형태로, 내부 세력간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대립의 양상을 띈다. 도널드 트럼프는 노예제와 인종주의를 부활시킴으로써 오래된 인종적 사회적 문화적 대립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창조하였다. 이른바 자유와 사회주의의 대립이었던 것인데, 공화당이 이 부분에서 가장 큰 성공을 이룬 부분은 트럼프를 자유와 동일시하게 된 것이다. 이제 트럼프주의는 그 자신을 넘어 자유 대 평등의 구도로 넘어간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특성은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과두정치세력이 앞장서 벌이는 총력전의 측면이다. 여기서는 사회적 권리가 축소되고 외국인은 모든 시민권을 박탈당한다. 이러한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민족적이며 사회적이다. 이에 더해 모든 저항과 비판을 억압하고 범죄화하기 위헤 법적 수단을 사용한다는 면에서 정치적이고 법적이다.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보수주의가 도덕,질서 수호를 내세우며 개인의 권리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문화적이기도 하다.


둘째로 각국가나 지역의 특수한 전략들이 범세계적인 단일 전략으로 수렴하지는 않는다. 셋째로 신자유주의 내전은 시민 전쟁이다. 이러한 시민의 범위에는 과두지배자(신자유주의 질서 방어)vs중산층(신자유주의 현대화 담론 옹호)vs인민/중산층 일부(민주주의)등이 해당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국민주의로서 국가의 이익을 노동자의 이익으로 동일시한다. 가족,전통,종교의 보수적 가치를 장려하며 글로벌화한 엘리트를 고발하며 문화적 정체성을 해체한다. 국민주의와 경쟁주의는 사실 신자유주의의 두 가지 버전에 불과하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국가는 본래 시장을 구축하고 국가의 지나친 규제와 통제 위협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경제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전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즉 강한 국가를 확립하고 다양한 사회운동을 탄압하는 등의 신자유주의가 가하는 폭력은 시장질서를 보호하는 수단인 것이다. 경쟁시장은 극단적인 수단들을 정당화하는 일종의 정언명령이 되고 내전은 경쟁을 위한 전쟁인 동시에 평등에 대항하는 전쟁이 된다.


신자유주의의 이론을 대표하는 하이에크는 이러한 사상의 뿌리가 진화주의와 보수주의에 있음을 드러낸다. 그에 따르면 자유주의자는 곧 진화주의자이다. 인간 사회는 문화적 진보의 동학을 따른다. 도덕적 ,종교적 이상주의를 거부했던 그는 자유의 증진과 자발적 진화를 옹호했다.


그러나 그의 급진주의는 자의적 강제-자발적 진화의 대립구도는 문명화된 진화와 야만적인 퇴보의 대립구도로 수렴된다.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뿌리는 인종주의적인 위협 또한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결론에서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두 가지 굴레, 국가도, 경제도 우리의 운명이 아니라는 점을 주장한다. 국가도 경제도 경쟁사회를 구축하고 보호하는 신자유주의의 억압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내전에 대항하는 혁명으로서 비국가적인 정치를 제안하는 한편 탈제도화는 불가하다고도 말한다. LA 이민자 시위는 그의 주장 대부분을 반영하고 있다. 트럼프는 인종주의로부터 시작된 ICE의 이민자 구속에 이어서 다양성 이념 및 민주주의와 대립하는 폭력적 억압(해병대 파견,내셔널 가드 파견 등) 뿐만 아니라 이를 보도하는 언론에 대한 탄압까지 동원하며 그의 ‘신자유주의’를 공격하는 모든 사회적 가치들을 격렬하게 부정하고 있다.


사실 내전은 진행되고 있었던 ‘과정’이었던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질, 그러나 언젠가는 신자유주의의승리로 역사의 종언을 알릴 전쟁이었다는 음모가 마침내 폭로되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사회주의나 진보 좌파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신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및 좌파가 유일하게 공통되는 부분은 바로 역사의 변증법이다. 역사는 끊임없이 나아갈 것이라는 교만함이라는 무한한 욕망이 그들을 추동한다. 두 사상 모두 각각의 유토피아를 제안하고 있지만 앞서 영적 투쟁으로서의 정치에 대해서 쓴 글에서 말했다시피 그러한 유토피아는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할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혁명을 할 수 없는 것인가? 우리는 이대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순종적인 양이 도축장으로 얌전히 걸어가듯 아포칼립스를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나는 믿는다. 낡은 것은 갔지만 새 것은 반드시 올 것이라고. 그러나 혁명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이라든지, 그것을 위한 진지전이라느니 하는 가짜 예언자들의 이데올로기 운운은 믿지 않는다.


그들의 이론은 정교한 것은 틀림없으나 운명을 무에서부터 창조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 무한한 욕망, 교만함이야말로 인간의, 신자유주의의 아킬레스건이다. 혁명은 지도자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고 통치 수단이 바뀌는 데에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고 방식이 전환될 때 비로소 혁명인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레비아탄을 물리치려거든 두꺼운 탐욕을 꿰뚫을 겸허한 작살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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