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어린 시절, 책장에는 하얗고 깨끗한 ‘ACE 세계 전집’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그 옆에는 엄마가 시집올 때 혼수로 가져왔다는 두꺼운 대백과사전도 무게감 있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각종 사진이 알록달록한 과학 전집도 있었지만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내 진짜 보물은 따로 있었다.
바로 만화책 <보물섬>
서점에 새로 나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설렘, 펼치기 전부터 두근거리던 마음.
그 시절, 책은 놀이였고 꿈이었으며, 가슴 뛰는 모험이었다.
조금 더 커서는 다섯 살 많은 중학생 오빠의 가방에 선물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와르르 쏟아내던 무협지들! 얼마나 행복하던지.
잊고 지냈다가, 다시 찾아보고서야 마주한 반가운 제목들, <비천검법>, <천하제일검>
손에 땀을 쥐게 했던 긴박한 사파와 정파의 대결, 강호에서의 의리와 복수의 서사, 전설의 무공을 익혀 무림을 통일하는 주인공의 고난과 성장.
오랜 시간이 지나 제목은 흐릿해졌지만, 다시 마주한 순간 그 장면들은 놀랍도록 생생해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주인공이 되어 강호를 누비고, 그 세계 안에서 숱한 풍파를 겪으며 함께 울고 웃었다. 아마 그때가 '진짜 독서'를 처음 경험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오빠와 나란히 숨죽이며 책을 읽던 그 모든 기억들이 내 가슴 한편에 온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수능 세대였던 나는 곧 독서를 '공부'로 배워야 했다.
신문 사설을 오려 붙이고, 『독서평설』,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정리하며 숙제처럼 읽던 책들. 그때부터 책은 점수를 위한 도구가 되었고, 독서는 성적을 위한 수단이 되었던 것 같다.
성인이 되어서도 독서와는 멀어졌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이외수, 류시화 등 몇몇 작가들의 글을 가끔 접했지만, 다양한 책에 깊이 빠져들기엔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아이의 독서록 과제를 대신 읽으며 잠시 만난 책들, 그중 몇 권은 꽤 감동도 있었지만... 역시 ‘금지된 숙제’로 하게 된 독서는 좋은 기억을 남기지 못했다.
이후, 생활에 당장 필요한 어학책이나 정보서적 외에는 손에 쥐는 일이 드물었고,
책은 그렇게, 내 일상에서 서서히 밀려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삶의 변화가 찾아왔다.
아이의 대학 진학과 이사로 출퇴근 시간이 짧아졌고, 여유가 생겼다.
가볍게 산책하듯 들른 동네 도서관에서 나는 오랜만에 책과 다시 마주했다.
그곳에서 만난 풍경은 잊고 지냈던 설렘을 불러왔다. 좋아하던 종이 냄새가 은은히 나는 공간, 집중하는 사람들의 조심스러운 숨, 책장을 넘기는 소리까지도 그 공간의 잊고 있던 아득한 정취가 다시 마음을 두드렸다.
"쉿!" 조용히 하라는 엄마의 말에도, 숨죽여 까르르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마저 정겨웠다.
그 공간이 참 좋았다.
그날 이후, 일주일에 두세 번씩 도서관을 찾게 되었고, 조금씩 책과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뒤늦게야 우리는 그렇게 책을 통해, 새로운 삶을 선물 받게 되었다.
퇴근 후, 남편과 함께 보조가방에 책을 담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
강아지의 젤리 같은 발바닥엔 풍선이라도 달린 듯했다. 발레리나처럼 가볍게 걷는 걸음마다, 기분 좋은 꿈이 공기처럼 새어 나와 작은 몸이 통통, 가볍게 솟구쳤다.
그 모습에 나도 덩달아 마음까지 들떠, 사뿐사뿐 발을 맞춰 걸었다.
풋풋한 풀내음이 코끝을 간질이고, 미묘하게 변해가는 저녁 풍경이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오던 그 순간,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은 이 일상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저 책을 빌리러 함께 걷는 시간이, 그렇게 좋았다.
호숫가를 향해 놓인 안방의 리클라이너에 나란히 앉아, 커피 한 잔을 곁들여 윤슬을 바라보며 책을 읽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평화로운 순간이 되었다.
독서를 함께 하게 되면서 우리 부부의 대화는 어느새 더 깊어지고 성숙해졌다. 글을 통해 타인의 삶을 상상했고, 그 여운은 나를 향한 사유의 시간으로 이어졌다.
예전엔 TV 앞에서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던 우리였지만, 이제는 “이 책에서 이런 문장이 있었어”라는 이야기로 수다스러워졌다.
과묵한 남편도 책을 통해 공유하는 생각이 많아지니 웃음도 많아졌고, 그렇게 일상이 조금씩 달라졌다. 이제는 독서하며 대화를 나누는 우리를 바라보는 아들의 표정에도, 응원이 담겨 있었다. 그 표정은 우리에게 조용히 말을 거는 듯한, 또 하나의 동기부여였다.
책은 우리를 달라지게 했고, 그 변화는 은은하게, 그러나 분명히 가족에게도 닿아 있었다.
처음엔 익숙한 이름의 연예인 작가, 하정우, 김혜자, 손미나의 책을 보았다. 얼굴을 알고 있는 이들의 고백은 낯설지 않았고, 자연스레 마음이 닿았다. 책이 일상이 되고, 독서가 습관이 되자 심리학 책에서 위안을 얻고, 소설에서는 몰입의 즐거움을 느꼈다. 그러다 문장 너머, 타인의 시선과 발자국을 따라가며 나와는 다른 삶의 방식들을 엿보게 되었다.
『운을 읽는 변호사』, 『죽은 자의 집 청소』, 『검사내전』, 『참 괜찮은 태도』 등 변호사, 검사, 사업가, PD 등 다양한 직업 속에서 또 다른 인생을 마주했다.
그렇게, 책은 나의 세계를 조금씩 넓혀주고 있었다.
"책을 읽어라."
어릴 때 수도 없이 들었던 말, 나 역시 아이에게 그 말을 주문처럼 반복했다. 하지만 정작 독서를 통해 갖게 되는 진짜 느낌은 그 당시엔 몰랐다. 책을 읽는다는 건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니었다.
다양한 삶을 엿보고, 지식을 음미하고, 무한한 상상을 펼쳐가는 과정이었다.
TV나 핸드폰을 하느라 긴 시간을 보낸 후엔, 어김없이 공허함이 남지만 책은 달랐다. 내면이 다채로운 색으로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시간을 잘 썼다는 만족감과 함께, 마음 어디선가 잔잔한 물결이 번졌다. 어떤 날은 깊고 묵직하게, 또 어떤 날은 바람처럼 가볍게. 나를 멈추게 하고, 돌아보게 만들었다.
지식을 넘어, 내면을 가꾸고 타인을 이해하며, 삶의 방향을 일러주는 조용한 안내자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책은 선한 영향력을 가진 친구였고, 때로는 나를 조용히 치유해 주는 존재가 되어 주었다.
마음은 더 부드러워졌고, 생각은 깊어졌으며, 말은 조심스러워졌다.
하루, 그렇게 나를 더 깊고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 따뜻함은, 이제야 돌아보게 된 지나온 시간을 향한 아쉬움을 몰고 오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 한켠에 안타까움이 스며들었다.
그중 가장 아쉬운 건, 아이가 커가는 그 시간 동안, 나도 함께 자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사실이다.
아이의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기에, 시간은 그 순간이 전부였기에, 부모로서의 독서는 더없이 필요했음을 이제야 절감한다. 도움이 되었을 만한 육아서적을 읽지 못한 것도 아쉽지만, 더 안타까운 건 나를 성찰할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다. 어떤 부모인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조금 더 일찍 돌아보았더라면, 아마도 우리의 하루하루는 조금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자주 떠오르는 문장이 있다.
“인간의 삶에는 여러 길이 있고, 어떤 길에도 다 의미가 있다. 하지만 독서와 사색의 시기를 놓친 인생은, 어떤 성공을 거두었더라도 아쉽기만 하다.”
김진명의 『때로는 행복 대신 불행을 택하기도 한다』 속 그 문장이, 지금의 내 마음을 꼭 닮았다.
다시 독서를 시작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책은 아이가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삶의 어느 순간, 그렇게 마음을 움직이고 스스로 돌아보게 만드는 경험을 하면서부터 우리는 아이에게 책을 선물하기 시작했다.
생일이나 특별한 날, 함께 고심해 한 권을 고르고 그 여백에 우리의 마음을 담은 편지글을 정성껏 써넣었다.
책 안에 담긴 가치들과 함께, 우리가 건네고 싶은 소리를 얹는다.
그 목소리가, 손길처럼 닿아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한 권, 두 권... 시간이 쌓이면, 아이의 책장 어딘가에는 마음이 깃든 책들이 차곡차곡 자리를 잡을 것이다.
세월이 책장을 덮는 동안에도 우리의 사랑은 그 사이사이에 변치 않고 고이 머물러 있을 것이다.
언젠가, 다시 펼칠 때 그 속에 오래된 종이 향처럼 스며든 우리의 마음을 가만히 느껴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훗날 자신의 가정을 꾸리게 되면, 그 책들이 새로 생긴 소중한 가족의 책장에 자리를 잡아 세대를 이어 함께 읽히길 바란다. 사랑을 담은 책 한 권이 서로의 생각을 열고, 삶의 깊이를 나누는 씨앗이 되어주기를. 그 마음을 조심스럽게 얹어본다.
다양한 이야기가 가득한 도서관이, 어린 시절 내가 상상했던 ‘보물섬’처럼 진짜 보물로 가득 채워져 다시 내게 돌아왔다. 이제는 그 시절 상상했던 보물섬에서, 진짜 보물을 하나씩 꺼내어 삶의 조각으로 이어가고 있다.
지금도 나는 매일 아침, 출근 가방에 ‘보물섬’에서 가져온 보석, 두어 권을 챙긴다.
그리고 조용히 기대한다.
책을 읽는 나. 또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길.
“영혼을 치유하는 곳”
고대 그리스의 도서관엔 이런 문장이 현판대신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책은 단지 지식의 도구를 넘어서서 마음을 어루만지는 존재임을, 오래전 사람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책장을 넘기며, 잊고 있던 나를 다시 만나고
사랑을 건네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되어줍니다.
그렇게 오늘도, 내 안의 삶이 깊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