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미네소타.....
미국으로 입양되던 날 명진은 울면서 말했다.
“지연아, 내가 꼭 편지할게.
우리 성인이 되면 다시 만나자.
꼭, 꼭 널 찾으러 올게. 안녕!”
양부모를 따라 도착한 농장은 푸른 풀밭과 소떼뿐이었다.
하늘은 높고 맑았지만, 명진의 가슴은 낯설고 서늘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 울음이 이국의 공기를 흔들었다.
“이쪽은 조, 열 살.
그 옆은 벤, 아홉 살.
그리고 잭, 여덟 살.
넌 앞으로 샘이야. 알겠지?”
거대한 체구의 양아버지가 낮게 말했다.
그의 눈빛은 따뜻함이 아닌 명령이었다.
명진—이제 ‘샘’이라 불리는 소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내가 ‘샘!’ 하면 바로 뛰어와야 한다. 알겠니?”
“…네, 알겠습니다.”
저녁이 되자 아이들이 식탁에 모였다.
딱딱한 빵과 감자수프.
아이들은 허겁지겁 먹었지만, 샘은 한입도 삼키지 못했다.
입안에 번지는 낯선 냄새와 질감, 그리고 공기 속의 긴장감이 샘을 위축시켰다.
“안 먹을 거면 내가 먹을게.”
첫째 조가 접시를 낚아채 빵을 삼켰다.
벤과 잭도 달려들어 남은 수프를 퍼먹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배고픔보다 더 깊은 공포가 어른거렸다.
양아버지는 술잔을 기울이며 낮게 말했다.
“안 먹으면 너만 손해야, 샘.”
양어머니는 옆에서 고기를 씹으며 웃었다.
하하하— 그 웃음소리는 뜨겁고, 방 안의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았다.
밤이 되자 아이들은 낡은 2층 침대에 누웠다.
조와 벤은 위층, 잭과 샘은 아래층.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낮고 날칼로운 개 짖는 소리가
어두운 방안을 가득 메웠다
“야, 샘. 내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야 해.
안 그러면 도널드한테 혼날 거야.”
조의 속삭임에 샘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고였지만 꾹 참았다.
‘명진’이라는 이름은 이제 사라졌다.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오직 “샘”뿐이었다.
새벽 다섯 시,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간.
아이들은 축사 앞으로 모였다.
문을 여니 젖소의 거친 숨과 흙먼지가 얼굴을 덮쳤왔다.
“샘, 저쪽 막장부터 치워.” 조가 말했다.
처음 맡아보는 냄새에 샘은 입과 코를 막았다.
그때, 멀리서 도널드의 고함이 울려 펴졌다.
“샘! 뭐 해! 손 내리고 빨리 안 치워?!”
아이들의 손은 쉴수가 없었다.
건초와 젖은 지푸라기를 나르고, 똥을 치우고, 물을 옮겼다.
젖소가 밥을 다 먹은 뒤에야, 비로소 식사를 허락했다.
아이들은 마른 빵과 식은 수프를 허겁지겁 삼켰야만 했다.
이곳에서 일 순위는 젖소였고,
이 순위도 젖소였다.
젖소가 아프거나 우유가 줄면,
아이들은 ‘훈육’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견뎌야 했다.
양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단어를 가르쳤다.
“Milk, Feed, Clean.”
오직 젖소를 위한 언어였다.
열여섯 살이 되기 전까지
이곳을 떠날 수 있는 아이는 없었다.
명진은 이제야 알았다.
그들이 모두 ‘일꾼’으로 데려온 아이들이라는 걸.
달이 떠오르자 허리가 욱신거리고,
온몸은 건초먼지와 땀으로 가득했다.
명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끝없는 푸른 하늘.
그 아래, 한국에서 보던 별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희망도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