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

불편함을 통해 배운 ‘함께 사는 법’

by 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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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정말 ‘따꼼따꼼한 성장’을 할 수 있는 경험을 했다.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나는 절대 안 다칠 줄 알았다. 내 몸 중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이 다리였으니까.

하루에 3만 보를 걸어도 끄떡없었고, 20대 때는 에너지가 넘쳐서

친구들과 놀고나서 혼자 따로 석촌호수(약2.5km)를 두 바퀴 돌고 집으로 갔었다.

그런데 결혼 1년 차, 무거운 물건을 들다 오른쪽 허리에 디스크가 생겼다.

하루 3만 보를 걷기도 전부터 통증이 올라왔고, 누워만 있어도 아팠다.

다행히 일주일 정도 침대에 누워 있다가 걷기 운동을 조금씩 하자 회복되었다.


그로부터 3년쯤 지난 어느 날. 퇴근길에 급한 연락을 받다가 땅에 넘어졌다.

순간 눈앞이 하얘지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아팠다.

그래도 허리처럼 심하지 않으니 괜찮겠지 싶어 소파에 누워 있었는데,

남편이 빨리 병원에 가보라며 잔소리를 했다. 툴툴거리며 병원에 갔더니,

인대 두 개가 파열되었다는 진단이 나왔다.


“인대는 초기에 잡아야 평생 고질병이 안 됩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에 다치자마자 병원에 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깨달았다.

그날따라 남편이 참 고마웠다.

그렇게 나는 왼쪽 다리에 반깁스를 하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목발은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걸려 넘어질 수도 있으니 웬만하면 쓰지 말라고.


나는 원래 밖의 풍경을 느끼며 걷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예전에 허리가 아팠던만큼 안 아픈 게 오히려 기뻤다.

주말 내내 중요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 결혼식과 친정엄마 생신 파티!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그 계절, 단풍과 서늘한 공기,

살짝 멜랑꼴리한 분위기를 느끼며 뒤뚱거리면서도 끝내 약속을 지켰다.

옆에는 남편이 있었다. 그래서 서럽지 않았고, 외롭지도 않았다.

그가 없었다면 혼자선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혼자 살기 너무 어렵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장애를 평생 가지고 살아야하는 분들은 얼마나 힘들까...’

가슴이 먹먹해졌다.


평일이 되어 남편이 출근하고, 나는 혼자서 병원에 가야 했다.

걸어서 15분이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반깁스를 하고 나니 준비부터 왕복까지 두 배의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하루종일 집에 있기 갑갑했는데, 혼자 바깥에 나가니 기분이 좋았다.

가을 바람이 차갑게 불었지만, 그게 오히려 좋았다.

그런데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나서자마자입구를 막고 서 있는 아이가 있었다.

나는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게 천천히 걸어야 했지만,

아이의 부모는 기브스를 한 나를 보고도그저 웃으며 아이만 바라봤다.

결국 나는 방향을 살짝 틀어 돌아갔다.

그 순간,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아… 이게 시작인가.’

병원 계단을 오르는데,

내 앞을 막고 서 있는 아주머니가 핸드폰만 보며 비켜주지 않았다.

작은 일상이었지만, 그 무심한 시선이 마음에 상처로 남았다.

물론 고마운 사람들도 있었다. 교회 어르신들이 다가와 걱정해주시고,

어떤 언니는 나를 부축해주셨다. 길에서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봐주신 분들도 있었다.

그 덕분에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졌다.


하지만 혼자서 병원에 가던 첫 이틀 동안,

가장 괴로웠던 건 사람들의 냉담함이었다.

큰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은 특히나 힘들었다.

파란불이 켜지길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앉을 자리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쪽 다리에 체중이 집중되면서 점점 통증이 심해졌다.

“딩동.”

파란불이 켜졌다.

나는 부지런히 걸었다. 그런데 동시에 출발했던 사람들이 어느새 모두 내 앞을 지나가고,

나만 그 넓은 횡단보도 한가운데 남았다.



그때의 고독감과 시선의 무게는 잊을 수 없다.

‘혼자 남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민망함에 빨간불이 되자 뛰듯 건넜다.

처음으로, 장애인의 입장이 되어 걸어본 날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우리 사회가 왜 ‘불친절하다’는 말을 듣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 빠른지도.


‘차를 타면 되잖아.’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걷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걸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사는 동네는 특히 약자를 보기 어렵다.

장애인도, 자폐 아동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위해 피해 다니거나,

차를 타야 할 의무도 없다.


아마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지도 모른다.

“아픈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도와주며 살아라. 그게 인간답게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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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다른 건 다 괜찮은데, 큰 횡단보도만은 정말 건너기 싫어.”

“그래도 제일 짧은 길로 다녀야 해! 왕복으로 두 번 건너지 말고,

병원 가는 길에 한 정거장은 버스를 타. 그럼 돌아올 때 한 번만 건너면 되잖아.”

“오오, 좋은 생각이야!”

남편과의 짧은 대화 속에서도 위로가 있었다.

하지만 며칠 후, 오른쪽 다리에 체중을 계속 싣다 보니

예전 허리 디스크 통증이 다시 올라왔다. 결국 양쪽 다리에 힘이 빠졌다.


버스를 탈 때, 사람들의 시선이 차가웠다.

임산부석과 노약자석은 이미 다 차 있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음이 점점 차가워졌다.

‘이 좌석들의 의미를 모르는 걸까?’

나는 일부러 노약자석 앞에 서서 버텼다.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밤, 오래전 지하철에서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손주를 안고 자리를 찾던 할머니, 그리고 그 자리를 빼앗듯 앉아버린 한 젊은 여자.

그때 느꼈던 분노와 부끄러움이 되살아났다. 그 일을 잊지 않기 위해 다짐했었다.

“순간의 부끄러움보다 평생의 후련함을 택하자.”


그리고 오늘, 버스 안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 다짐을 다시 떠올렸다. 다리를 다친 뒤, 병원에 가는 일은

이제 내 하루 중 가장 큰 일이 되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두 발로 서 있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사람이 주는 상처였다.

물리적 폭력만이 폭력이 아니라,

무관심과 냉소도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우리 사회는 너무 빠르다. 다들 바쁘다.

나도 예전에는 몰랐다.

‘한 발로 서 있는 게 뭐 그리 힘들까’ 하고.

하지만 막상 다쳐보니, 세상이 얼마나 냉정한지 알겠다.


예전에 유튜브에서 본 영상이 생각났다.

유럽의 한 엘리베이터 앞,

휠체어를 탄 사람을 위해 안에 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내어주는 장면이었다.

그때 나는 “휠체어는 앉아 있으니 덜 힘들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기다림조차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 사회가 왜 배려심이 부족할까?

지독한 경쟁 때문일 것이다.

정신적 가치를 우습게 여기고,

느림을 패배로 여기는 사회.


어렸을 때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약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도 문제다.

엘리베이터 안의 사람처럼 행동하려면

상상력과 공감력, 교육이 필요하다.


이번 경험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인생의 속도는 빠름이 아니라, 함께 걸음이다.


조금 느려도, 뒤따라오는 사람을 기다려주는 사회.

그게 진짜 풍요로운 세상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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