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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거 싫어요

피로를 날려버린 '사과 로봇'

by 내가 지은 세상

하루는 아침 일찍 회의가 잡혔다. 출근 시간이 이른 남편은 새벽에 이미 나갔고, 나도 아이가 깨기 전에 얼른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욕실에서 나오니 아이 어린이집 등하원을 도와주는 친정 엄마가 와 계신다.

"왔어?"

짧게 인사하고 안방에 들어가 머리를 말리고 옷을 챙겨 입는다. 아침 대용 두유를 한숨에 쭈욱 다 들이키고 이제 막 잠에서 깬 아이를 꼭 끌어안고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는 회사로 간다.


이번 주만 시간이 앞당겨진 오전 회의는 매주 진행하는 회의로, 참석 대상이 무려 50여 명이 되는 큰 회의다. 같은 과제를 함께 진행하는 기획/UX/개발/사업/마케팅/품질 부서의 팀장님 및 실무자들이 참석한다. 각자 그날의 근무 형태(사무실 근무 또는 재택)에 따라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으로 참석한다. 각 세부 과제별로 나를 포함한 기획자들이 차례차례 진행 현황을 공유하고, 이슈가 있는 경우 아젠다로 올려 다 같이 논의하고 해결 방법을 찾는다. 나는 4가지 세부 과제를 담당하고 있는데, 한 과제는 테스트용 클라이언트에 상용 서버를 연결하여 검증할 방법을 찾아야 해서 이슈로 올리고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아침 일찍 하는 회의라 뇌가 잠에서 덜 깨서 그런가, 각 부서의 입장까지 대변해서 잘 전달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는지, 사람들 많은 데서 이야기할 때의 공포심이 다시 도진다. 긴장한 상태에서 내가 정확히 알지는 못하는 개발 구조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려니 머리가 하얘지고, 개발 팀장님들이 하는 이야기가 해석되지 못하고 소리로만 귀에 꽂혔다가 튕겨져 나가 버린다. 나는 어버버 하며, 다른 사람들 도움을 받아 대충 논의를 마무리하고 넘어간다. 한번 말이 꼬이고 나니 다음 과제를 이야기할 때에도 말을 더듬더듬 횡설수설하게 된다.

"... 에이프, 에입, 아니 에이피아이(API)를 호출하여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아 망했다, 얼굴이 약간 상기된 채 찝찝한 마음으로 회의실을 나서는데, 같은 팀 동료가 묻는다.

"근데 아까 논의한 이슈 왜 이러이러한 방식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거래요? 이렇게 하면 되지 않아요? 의례 그렇게 해왔던 것 같은데 왜 안된대요?"

물어보는데, 한껏 풀이 죽은 나에게는 질문이 날카로운 공격처럼 느껴진다. 단순한 궁금증에 물어본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에는 또 스크래치가 생긴다.


점심은 따로 조용히 먹고 싶어, 옆팀 친한 언니를 불러 점심을 먹자고 한다. 오전 회의에도 같이 참석했던 동료라, 만나자마자 푸념을 늘어놓는다.

"나 왜 사람 많은 데서 맨날 그렇게 어버버 하면서 말하지? 하 미쳐버리겠네 진짜."

"엥 아까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냥 니가 그렇게 느끼는 거지."

아주 아주 조금 마음이 놓인다.


정신없는 하루, 오전의 일은 잊은 듯 아무렇지 않게 업무를 마무리하고 바삐 집으로 간다. 이런 날은 집에 도착해서 휴우~ 크게 한숨을 내쉬고 소파에 늘어져 좀 쉬면 좋으련만, 현관문을 열면 새로운 업무, 육아가 기다리고 있다. 아이와 퍼즐을 맞추고, 동요에 맞춰 춤도 추고, 물 갖다 달라 먹을 거 갖다 달라 하는 각종 수발도 들고, 남편과 아이를 재운 뒤 어떻게 잠들었나 기억도 없이 뻗어버린다.


다음날 아침, 사워를 하다가 문득 어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황하며 말을 더듬은 내가 생각나고,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머릿속에 차고 넘쳐 입 밖으로 흘러내린다.

"아악~~~ 어떡해~ 나 어제 왜 그랬지!"

하지만 그런 순간도 잠시, 얼른 준비하고 출근해야 한다.


오늘은 팀 주간회의가 있는 날이다. 팀원들끼리 한 주간의 업무 현황을 공유하고 피드백을 주고 받는다. 그런데 내 순서가 되어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팀장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다.

'엇 뭐지! 뭔가 잘못됐나?' 싶어 말을 잠깐 멈추고 쳐다보니,

"우리 지금까지 이러이러한 상황 없었죠?"

"네"

"아~ 네네 그럼 됐어요."

한다.

아 다른 것 때문에 생각에 잠겼던 거구나. 또 괜히 쓸데없는 것 가지고 긴장하고 위축된 나 자신 때문에 자괴감이 밀려온다.


이번 주는 왜 이리 바쁘고 피곤했나- 생각하면서 터덜터덜 집으로 간다. 집에 가니 남편이 먼저 퇴근해서 아이와 놀아주고 있다. 아직 까치발을 들어도 키가 내 허벅지까지밖에 오지 않는 우리 집 쪼꼬미. 옷 갈아입고 아이에게 가니 스티커북 놀이를 하자고 한다.


"스티커북 많네~ 또 할머니가 사주셨어?"

"웅! 엄마 내가 사과 로봇 보여주까?"

한다.

웬 사과 로봇? 사과 로봇이 뭐지 처음 들어보네... 생각하고 있는데, 아이가 조그마한 손으로 스티커북을 뒤적뒤적하더니

"엄마 이거바!!"

한다.

진짜 사과 머리가 달린 로봇 그림이 있다.

"아 뭐야 진짜 사과 로봇이잖아~ 하하 사과 로봇이 뭔가 했더니 얼굴이 사과 모양이네 하하하"

"그치~ 웃끼지! 으하하하하하"

아이는 까르르 까르르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면서 뒤집어지게 웃는다. 정말 이걸 가지고 웃는다고? 싶게 별 것 아닌 거 가지고 아이와 얼굴을 맞대고 한참을 웃는다.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의 지능은 물고기 정도라고 한다. 눈만 겨우 꿈뻑꿈뻑 감았다 떴다 하고, 머리만 스르륵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할 뿐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이였는데, 이렇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같은 지점에서 웃음이 터져 함께 깔깔거릴 수 있을 만큼 컸다. 내가 웃으니 아이는 "사과 로봇이야! 진짜 웃끼지! 하하하하" 하며 더욱 더 신나 한다.


그렇게 이번 주의 피로를 다 날려버렸다.

그렇게 한주를 무사히 지나 보냈다.

그렇게 또 산다.


덕분에 웃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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