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지만, 하나가 되지 못했다
668년. 신라는 드디어 백제를 무너뜨리고 고구려까지 무릎 꿇린다. 당나라의 힘을 빌린 결과였다.
역사책은 이것을 “삼국 통일”이라 부른다. 하지만 진짜 통일이었을까? 정작 고구려의 중심지는 신라 땅이 되지 못했다. 만주와 평양 대부분은 당이 차지했고, 신라의 통일은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삼국의 땅은 통합되었지만, 삼국의 ‘사람’은 하나가 되지 않았다.
1. 당과의 전쟁 - 해방의 전쟁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곧바로 진심을 드러낸다. 그들은 한반도 전체를 '안동도호부'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지배 아래 두려 했다. 도호부의 중심은 평양, 그리고 웅진성(공주)이었다. 이에 신라는 다시 전쟁을 준비한다. 매소성,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가 대승을 거두며 당군은 물러난다. 통일은 했지만, 그 통일은 다른 외세를 몰아내는 싸움으로 다시 이어졌다.
‘이제부터는 당과의 해방 전쟁이다.’ – 이 전쟁의 지도자, 문무왕
2. 삼국 유민 - 하나가 되지 못한 나라
백제와 고구려는 사라졌지만, 그들의 백성은 여전히 존재했다. 고구려의 왕족이었던 보장왕은 부흥을 꾀했고,
검모잠, 안승 등 고구려 잔존 세력들은 각지에서 봉기했다. 이들은 여전히 자신을 고구려 사람이라 불렀고,
신라를 자신들의 나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라에겐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정복한 땅의 백성은 어떻게 하나로 묶을 것인가?’
3. 내부의 균열 - 신라 왕실의 선택
신라는 정복보다 정치와 제도의 통합을 시도한다.
무열왕계의 왕통 유지
갈문왕 제도 폐지
신문왕의 대대적인 중앙집권 정책
관료제 강화, 녹읍 폐지, 국학 설치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라 중심의 통합이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 언어, 정체성은 배제되었다.
결국 신라 내부에서도 귀족의 반란이 계속되고, 피로사회가 시작된다.
보충설명 : 내부의 분열 - 갈문왕을 없앤 이유
신문왕은 전쟁보다 내부의 권력 다툼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삼국통일이라는 외적 과제는 마무리되었지만, 내부에는 왕권을 흔들 수 있는 구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갈문왕 제도였다.
갈문왕은 신라 왕족 가운데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이들에게 부여된 명예직이자 존칭이었다. 실권은 없지만, 실질적 영향력이 매우 컸다. 왕의 아버지나 형, 또는 강력한 왕족들이 이 칭호를 받았고, 경우에 따라선 실제 왕보다 더한 권세를 휘두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왕은 있지만, 권력은 두 개였던 셈이다.
신문왕은 이를 과감히 없앴다. 왕 외에는 누구도 왕처럼 불릴 수 없다는 원칙. 이는 단순한 호칭 정리가 아니라, 신라의 정치 구조를 완전히 뒤흔드는 개혁이었다. 그는 더 나아가 귀족 중심의 정치 질서를 무너뜨리고, 관료제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녹읍 제도 폐지: 귀족들이 땅을 나눠 가지며 백성 위에 군림하는 관행을 중단시켰다. 이제는 관료들에게 월급(관료전)을 주는 방식으로 바꿨다.
>> 귀족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조치였다.
국학 설치: 귀족 가문 출신 젊은이들에게 유학을 가르쳐 체계적인 관료를 양성했다.
>> 가문의 배경보다 능력 기반의 행정체계를 만들려는 시도였다.
지방 통제 강화: 지방에 직접 관리를 파견해 왕의 명령이 전국에 고르게 미치게 했다.
>> 지방 호족의 독자적 힘을 견제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 속에는 신문왕의 분명한 철학이 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나라가 안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 안의 구조가 바뀌어야 진짜 통일이다. 그는 검 대신 제도를 들었다. 정복 대신 질서를 다듬었다.
그리고 왕의 권위는 혼자만의 것이 되었다.
4. 통일의 그림자
통일은 외형적인 것이었지만, 진짜 문제는 ‘통일 이후’에 시작되었다.
새로운 외세(당)와의 갈등
구 삼국 백성들의 저항
내부 귀족의 권력 투쟁
고구려 땅 대부분의 상실
신라의 통일은 ‘완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긴장의 시작이었다.
5. 우리가 오늘 배울 수 있는 것
국가의 통일은 지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신라의 통일은 지리적 성과였지만, 정신적 통합에는 실패했다. 오늘날 우리가 ‘통일’을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국경선을 다시 긋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과 기억을 껴안는 일이어야 함을 신라의 역사는 말해준다.